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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평점 :
나는 슬픔의 딸로 태어났다. 맑고 밝은 기쁨에 속한 이도 있고, 평정과 온유에 속한 이도 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리되지 못했다. 뼈저린 슬픔에 나의 가슴은 언제나 반응하고, 절절한 슬픔에 언제나 이끌린다. 목구멍은 언제나 헐었고, 심장은 언제나 피맺힌 상태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날카로운 신음의 묵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표지를 열고 <한국의 독자들에게>의 첫 문장을 읽고 다음 문단... 그의 아들을 잃었다는 고백과 함께 쏟아진 슬픔은 내게도 동일한 날카로움으로 쏟아졌다. 그랬다. 나는 울었다. 아들을 잃은 그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겪어온 고통이 내게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불치의 신경증으로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파멸과 세계의 파멸을 바랐다는 아들의 소망 역시 내게는 거울과도 같았다.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대로 죽어지지 않아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다.
“이런 비참을 겪고도, 그래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아들의 물음을, 저자는 동일본 대지진 앞에서 다시 떠올려 묻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앙 가운데 존재를 저주하고 행복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인간이 본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저자 강상중은 자본주의의 환상 가운데 잊혀온 존재의 존재성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호모 파티엔스’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살아있을 의미 같은 건 없다’는 절망에 계속해서 내몰리는 수용소의 상황에서도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싶다’는 바람을 포기하지 않고 지겨운 끝에 다다른 말이기 때문에 아주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적어도 내게 ‘고민하는 인간’은 존엄한 인간이다. 고민이라면 나쓰메 소세키가 이야기한 돈, 사람, 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뿐이겠는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고 반항이며 긍정일 텐데. 살아있기 위해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고민해야 한다. 손에 닿지 않는 모든 것을 긍정해야만 한다.
한편 왜 살아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고민거리다. 강상중은 환상이란 없음을 넌지시 말하지만 나는 거기에 또다시 묻는다. 사람은 환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냐고. 생은 거대한 고통이고, 연약한 인간은 환상을 덮는다. 환상이 아니라 환각이어도 좋다. 특별히 내일을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간을 견디기 위해서이다.
모든 절망은 미증유의 절망이다. 새롭지 않은 절망은 없다. 더욱 괴롭지 않은 절망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고통 앞에서 낯설다. 이때의 해답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나 자신을 순간에 맡길 뿐이다. 고통을 직면하던지, 휩쓸려가던지, 싸워 이기든지 정답은 없다. 모두 우연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는 인간의 의지도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이 절망 앞에서 인간은 죽어지고, 또한 온전히 죽어지지 않아 한번 더 살아간다. 그러므로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단 한 번의 생물학적 생에서 사람은 몇 번이고 영혼의 장례를 다시 치르고 치른다. “다시 살아나 이 세상에 돌아오기를 각오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런 사람은 아픔을 감추고 아름다운 태도로 존엄을 세운다. 그의 아픔은 잠시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음으로’ 나날이 존엄하고 아름다운 이가 되어간다. 그는 아픔을 읽고 느끼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또다시 살아있는 이유가 된다. 저자의 아픈 아들이 그러했고, 계속 아픈 저자가 더욱 그러했듯이.
언제나 그랬다. 나만 살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는 잠시 더 살아갈 수 있었다. 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실낱같은 삶의 의지가 되어주리라. 만약 내가 태어난 이유가 있다면, 내가 이렇게 지독하게 불행했던 이유가 있다면, 분명 누군가를 ‘위로’하려는 목숨이었기 때문이라고. 운명론자인 나는 믿는다.『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존재도 분명 그렇다고. 이것이 나의 믿음이고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