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냉정한 사람’ 나의 ‘더러운’ 성질을 겪어본 사람들의 평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따뜻한 사람인 줄 착각한다. 겉보기로는 관대하고 털털한 부분이 분명 있으므로, 그리고 여간해서는 상한 마음을 잘 안 비춘다.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DNA가 그렇게 태어났다. 의식으로는 용서하지만 무의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른다. 내상을 감추는 사람으로 타고난 것이다. 여러 번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상처를 받는다. 선을 넘는 순간 차갑고 냉혹한 인간으로 돌변한다. 《겨울 왕국》에서의 엘사 같은 폭발이다. 완전히 다른 관계성으로, 변곡점(變曲點)을 돌아버리는 순간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한 사람의 역사라면, 인류의 역사를 한 사람의 생애로 비유해 읽는 것이 왜 안되겠는가. 『그해, 역사가 바뀌다』 의 저자는 1492, 1820, 1914, 1945년을 역사의 변곡점(變曲點)으로 읽는다. / (1) 1914년, 에덴동산 입구에 도달하다, (2) 1820, 동양과 서양의 운명이 갈리다, (3) 1914,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다, (4) 1945,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가 / 그리고 이 변곡점을 만든 추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으며, ‘문명의 무의식’과 ‘정신적 자질’을 내비친다.

무의식(無意識)은 자각되지 않은 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원인이면서, 의식의 배후에 숨어 있으면서 의식을 조종하는 것일 수도 있다. 19세기 후반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egmund Freud)에 의해 무의식이 소개되면서 인간의 행동과 정서를 지배하는 욕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에 의해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이 연구되면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 안에 자리 잡은 정신적 콘텐츠의 집합체가 가진 막강한 파워를 인정하게 되었다. 저자는 넓고 얕게, 혹은 좁고 깊이 파고들어가는 이야기로 역사의 변곡점에 있었던 일들을 표현한다. 물질적인 변화뿐 아니라 내면적인 변화도 파고들어본다. 그리고 저자의 입담은 환상적이다. 질투는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대등할 때나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데 입담도 좋아!! 글도 잘 써!!” 인생 불공평하다. 턱도 없는 그분에게 질투가 날 만큼 말이다. 완! 전! 재! 미! 다!

책의 첫 관문은 1492, ‘아이 네 구두’로 알려진 콜럼버스에 대한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면서 구두를 빠뜨렸고, 그래서 ‘1492년’으로 외웠던 바로 그 변곡점이다. 한 번도 콜럼버스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게 그는 언제나 식민을 유도한, 장기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원흉이 된 나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가 종교심이 강한 신비주의자였고, 투지가 넘치는 활동가였고, 열정이 넘치는 독학 주의자였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아주아주 오래전의 수능 사회탐구 영역 이후로 역사를 들여다본 것이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르는 것에 대한 생소함보다는 재미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부여하면서 저자는 유럽 문명이 가진 세계관과 정신력에 대해 서술한다. 문명과 야만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대립하고 충돌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제는 1820년, 서구가 패권을 장악한 지금의 경제구조가 만들어진 변곡점을 서술한다. 과거에는 중국이 가장 큰 부를 장악했다. 동양과 서양의 운명이 달라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다를 버리고 차지한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중국은 정화(鄭和)의 대항해를 마지막으로 바다에 관심을 잃었다. 그러나 서구는 탐욕스럽게 바다를 정복하고 교류를 핑계 삼아 타국을 욕심냈다. 게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지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인구 역사상 경제성장의 대부분이 19세기와 20세기에 급속도로 이루어졌으며, 1820년대에 경제적으로 앞섰던 국가들이 크게 성장했음을 밝힌다. 세계 경제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1914년은 인간이 자연을 통제, 망친 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변곡점이다. 이때 마지막 나그네 비둘기 ‘마사’가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멸종한다.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는 치명적이다. 근대 이후 자연은 인간에 의해 크게 파괴된다. ‘종석종’과 마찬가지였던 몇 종의 생물들이 피해를 입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파급효과는 너무나 컸다. 여기서 언급된 인디언의 생태·생명관에 나는 관심이 있다. 조화와 균형의 상태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마다지윈(pimadaziwin)’한,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으로 어우러진 온 세상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는 이제 깨어졌다. 역병이 돌고 동물은 무차별적으로 사냥된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변곡점을 말한다. 1945년은 2차 대전의 끝을 맺는 해다. 미인대회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언제나 나오는 미인들의 멘트가 있다. 자신들이 바라는 것은 “World Peace”라고. ‘세계 평화’는 진부할 정도의 세계적 가치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가?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역사상 폭력의 문제는 언제나 일반적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있어왔고,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거나 폭력은 일상이었다. 무력의 발전과 쇠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은 문화다. 문화의 양상에 따라 고대와 중세, 근대의 전쟁 모습은 다른 모습을 띤다. 저자는 이 챕터에서 스티븐 핑커와 엘리아스의 연구를 활용해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같다. 엘리아스는 에티켓을 통해 인간의 육체성을 통제했다고 말하고, 핑커는 ‘숫자’가 아니라 ‘확률’을 보면 인류는 점점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더 많이 보고 듣게 되어서 그렇지 우리 본성에는 선한 천사가 잠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울한 세계관을 가진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는 못한다. (개인적으로 스티븐 핑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두께의 그 책을 다 읽을 수가 없어서 뭐라 확언할 수 없지만, 우울한 심성과 비관적 세계관을 가진 내게, 스티븐 핑커의 찬란한 긍정성은 놀라울 뿐이었으므로. 또한 핑커의 인간성에 관련된 스위트한 이야기들은 로맨틱한 이미지들을 그리게 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좋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주경철 교수는 역사(과거)를 통해 미래를 풀어나가기를 바란다. 4차 산업혁명이니 뭐니 하면서 인간에 대한 존중과 가치의식이 땅에 떨어진 이때에, 사람의 미래를 걱정하는 데에는 공부를 많이 한 교수님이나 나같이 잘 모르는 인간이나 비슷한가 보다. 지난달에 읽었던 『호모 데우스』와 『그해, 역사가 바뀌다』 모두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책이 마무리된다는 것에는 동일하다. 솔직히 나는 더 이상 내 미래를 장밋빛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현상 유지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거절될 것이 두려워 무엇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인류의 미래에 ‘피마다지윈(pimadaziwin)’이라니! 바라기에는 감히 너무 큰 아름다움이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40년 가량이다. 나는 어떤 생을 눈과 뇌에 담고 떠나게 될까. 나의 기대 없음이 철저히 거절되기를 바란다. 나같은 인간의 비관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끝내 믿어보는 이들이 놀랍도록 승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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