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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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경기도민의 아침은 죽음과도 같다. 그 중에서도 주말 아침은 또 달리 그렇다. 토요일 아침 20분 간격으로 서을을 향하는 광역버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두렵기 그지없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텁텁한 공기와 찌든 담배 냄새,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이 공간 안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 아침은 정말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교수라는 명함은 지위 뿐 아니라 특권의 보증수표다. 공부하는 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위치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라. 그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꼰대’일 텐데, 그런 그들에게서 억지웃음이 아닌 진심어린 폭소를 얻어낼 수 있다니. 지난 가을, 김영민이라는 특색 없는 이름이 지닌 칼럼니스트는 그렇게 문자중독-신문을 읽는 우리들을 강타했다. 폭발적인 관심에 들뜰 만도 한데, 이 저자는 평화롭게 칼럼을 지속하더니 세련되게 또 칼럼을 마무리 지었다. 분명 부담스러웠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같은 글줄을 보면 저자에게 더없는 호감이 간다. 언제나 죽음에게 말을 건네는 인간이며, 언제나 죽음에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인간. 그래서 오늘 하루에 더 기를 쓰는 인간. 그 역시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왜 내게는 유머가 없는가? 왜 나는 안 되는 것인가?

주로 ‘칼럼’을 묶은 이 에세이집의 장점은 역시 즐거움이다. 글을 읽는 내내 술술 읽히는 글의 ‘재미’를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예리한 유머를 구사할 수가 있는지 감탄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밝고 즐거운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죽음, 슬픔, 고통에 대한 위로가 이 책의 목적이며 정조다. 학교와 학생 사이에서 느꼈던 무력함과 지식에 대한 허무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사실, 뒤로 갈수록 책의 내용이 아쉬웠다. 오히려 칼럼으로 책을 모두 구성하고, 인터뷰는 부록으로 짧게 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저자의 신춘문예 당선 영화평론과 다른 평론, 저자의 인터뷰 기사가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다 보니 책의 일관성이 깨져서 완성도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저자의 성격을 고려하자면 (더 기다려서 다른 글을 덧붙이더라도) 일관된 느낌의 책을 원했을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약간 급하게 책을 낸 게 아닐까 싶었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 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살아 있는 시체여, 죽음을 생각하며 재미와 의미를 찾아라.”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즐겁지는 않아도, 적어도 괴롭지는 않은가? 소소한 근심을 감각하는 지금, 나는 살아 있다. 그 감각이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곧, 소소하니 웃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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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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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중략)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중략)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_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남자와 여자는 사건을 만들지만 이야기의 깊이를 만드는 건 ‘여자’다. 『대설주의보』의 모든 단편들을 읽고 난 후 든 생각. 모든 이야기 가운데 남자와 여자가 얕거나 깊거나 비밀스럽거나 막장인 사랑을 한다. 평범한 남녀의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한편, ‘평범한’ 이야기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각자 기막힌 부분을 품고 있는 것을.

『눈의 여행자』를 읽고 고른 『대설주의보』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작처럼 장편소설일 줄 알았지,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같은 이야기일 줄 알았지. 눈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눈 이야기는 하나뿐이다. 역시 내 기질에는 한 권짜리 장편이 더 맞다. 그리고 표제작인 ‘대설주의보’는 참 좋은 이야기였다. 참, 좋았다. 과하지 않고 담담하니 참 좋았다. 그리고 해피 엔딩인 것 같아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곱 개의 이야기 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세 개의 에피소드, 《보리》, 《대설주의보》, 그리고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다. 여기 등장하는 남녀들은 그들의 입으로 말한 대로 ‘남들처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더 처절하고 더 우스꽝스러워져버린 관계들. 그런데 실은,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정말 있다. 꼭 만나지 않아도 이어진 관계.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삶의 면면을 알아갈수록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 목숨은 이상하다. 어떻게든 이어진다. 의도와는 상관없다. 남자와 여자는 사건이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은 듯 보일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내뱉는 것이다. “왜 우리는 늘 비석 없는 무덤들처럼 공허한 것일까. 여름 한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 볼 때처럼. 다만 혼자일 뿐인데, 실은 나도 그게 견디기 힘들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남자와 여자인가보다. 누가 그랬더라 일본 소설가였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주름살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고. 꼭 눈 덕분(德分)이 아니더라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는 경우가 있다. 분명 일어나고야 마는 ‘사건(事件)’, 그것을 확인하려고 우리는 계속해서 소설을 읽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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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행자
윤대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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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가 쓴 방송작가 드라마, 만화가가 그린 만화가 만화는 기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분명 이 주인공은 작가 자신일 거야!’라는 확신 때문. 그건 작가가 쓴 작가 소설에도 마찬가지.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가 바로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작가 역시 저자 자신과 꼭 같은 인물일 것이다. 작가후기를 보니 확실하다. “「설국」의 무대 니가타에서부터 시작된 눈과의 동행길”이라는 카피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작가는 “눈을 배경으로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말한 덕에 일본의 대설(大雪)을 따라가며 한 달간의 집필 여행을 한다. 결국 제목인 『눈의 여행자』이며 주인공 작가 ‘나’ 도 작가 자신이라는 이야기다.

출근길 집어든 낡고 가벼운 책은 몰입감이 강했다. 출근하는 한 시간 반 동안 100페이지 이상이 술술 넘어갈 정도였다. 계약기간을 일 년 지나고도 원고를 넘기지 못한 ‘나’ 소설가에게 찾아온 기묘한 편지와 책 한 권 때문에 그는 일본 니가타로 떠난다. 편지에서 요구하는 ‘눈’에 대한 과제. 거기에서 찾아달라는 누군가 때문에. ‘나’는 책에 남은 메모를 따라 이동하면서 나름 비밀을 풀어 가는데. 그 끝에서 만난 사연은 기묘한 슬픔 그 자체였다.

“그쯤은 저도 압니다. 어느 누가 자기 상처나 고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는 일 아닙니까?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저는 분명 그렇게 배웠습니다. 또 집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위안받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저희 부부가 무슨 고통을 더 받겠습니까?” (P.248)

소설의 뼈대는 ‘이야기’다, 핵심은 ‘사람’의 이야기. 나는 그 모든 이야기에 상처와 고통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시간은 상처 그 자체이므로.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는 일”이라는 말 앞에서 마음은 멈추었다. 정확한 표현이어서. 나 역시 그 모든 구원 앞에서 내 구원을 얻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그 ‘구원’ 때문에 꾸역꾸역 책을 붙들지 않고는 하루를 그냥 넘길 수 없으니.

작가가 ‘눈’에 매혹된 이유는 정확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불가해한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히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몰라도 다 함께 이 세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여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느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 모두는 사라져버린다. 다시 눈이나 비가 되어 세상을 찾을 때까지. 퍼붓는 눈 속에서 나는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때로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도 했다. 태초의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눈의 소리를 들으며.” (P.233) 눈송이가, 눈이 선사하는 아름다움. 눈이 덮어버리는 모든 상처와 고통이라는 용어에서는 앞서 나온 ‘사람의 상처나 고통을 구원하는 게 글쓰는 일’이라는 맥락을 불러일으킨다. 눈 역시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진다는 데에는 구원인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또 다른 구원을 얻는다. 항상 간절히 원했던 따뜻한 손과 재회한 것. ‘그’가 오래전 사랑한 여자는 놀랍게도 나와 비슷한 여자였다.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여자’. 이 여자로 인해 생긴 상처도 이 만남으로 회복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더듬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더듬이가 서로의 정체를 알아보게 한다고. “나 아저씨 누군지 알 것 같아.”(P.266)라는 말은 그렇게나 정확했다.

『눈의 여행자』는 내게 ‘구원’의 이야기였다. 기대하지 않고 읽어내린 소설 한 권이 이렇게 큰 즐거움을 주다니. 이거야말로 하루치의 기적이 아닌가. 이야기의 종결로 갈수록 치밀한 문장과 비유가 놀라웠다.하다 못해 ‘갈색은 중독성이 강하다.’ 커피의 갈색에 중독되면 콜라와 담배와 위스키에도 쉽게 손이 가고 끊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기’가 맞다. 나는 오늘 행복했다.

내가 얻었던 모든 구원의 순간들에 리스펙. 허여멀건 표지의 책 한 권을 어루만지는 지금 나는 꽤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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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발레 - 그래도 안 힘든 척하는 게 발레다 아무튼 시리즈 16
최민영 지음 / 위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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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부터 마흔 사이, 일 년 반 동안 발레를 배웠다. 『아무튼, 발레』의 저자 최민영 기자와 비슷한 나이에 (나도) 취미 발레를 시작한 것. 운 좋게도 직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딱 적당한 발레 학원이 있었고, 단 하나 있는 성인 클라스가 월요일과 수요일 일곱 시부터 아홉 시, 딱 내가 비는 시간 이틀이었다. 뜨거운 여름날 건널목 아스팔트 크랙에서 발목을 심하게 접질러 병원에서 ‘절대안정’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발레를 다니고 있을 거다.

최민영 기자는 나의 발레 전도사다. 재치 있는 입담과 총명한 인사이트가 가득한 그녀의 트위터는 그야말로 ‘호감형 기자 SNS’. 감수성과 논리 사이를 오가는 균형있는 글줄 가운데 어느날 분홍색 발레슈즈 사진이 올라왔다. 한 줄 두 줄 발레 이야기가 올라왔다. 잊고 있었다, 내가 ‘발레 허우적허우적’을 해본 적이 있었다는 걸. 방과후 특별활동이 유명한 사립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여동생은 한동안 발레를 배웠지만 나는 한두 타임 기본동작을 해보고는 도망나왔다. 매년 체육대회와 학예회마다 억지로 고전무용과 민속무용을 배우는 걸로도 충분했다. 미술수업에 더 더 집중했다. 몸을 쓰는 것과는 더더욱 멀어졌다. 단언컨대 나는 최기자의 트위터에 올라오는 발레 이야기 덕분(德分)에 발레를 시작했다. 그분처럼 지덕체를 갖춘 인간이 되기를 감히 바란 게 아니라, ‘지덕체 흉내’를 내고 싶어서.

물론 그건 과욕이었다. “속 모르는 소리다. 잘 추고 싶은 마음은 마그마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데 막상 몸으로 표현되는 건 한겨울 개봉한 지 열두 시간도 더 지난 주머니 핫팩만도 못할 때, 그 서글픈 간극은 취미 발레를 배우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가끔 수업 때 안무를 따라가지 못해 ‘몸개그’ 중인 내 모습을 스튜디오 거울을 통해 발견한 날에는, 홧김에 단 음식을 잔뜩 먹고 늦은 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내면의 눈물을 훔치며 생각하는 것이다.”《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 같은 나의 마음은 일년반 내내 하루라도 다르지 않았으니.

코어근육이 단단하기는커녕 턴아웃 자세조차 결코 안 되었던 나는 한시간 반 동안 클래식 음악에 맞춰 마음을 움직이는 데 만족했고 정말 그 시간 그걸로도 좋았다. 내게 발레는 몸도 그렇지만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주는 운동이었다. 폼은 엉망이어도 제법 ‘순서를’ 따라하던 시기도 있었건만, 지금은 별 기억이 안 난다. 1번 자세부터 6번 자세가 머릿속에서 다 이미지로 뒤섞이고, ‘앙아방(en avant)’, ‘앙오(en haut)’, ‘앙바(en bas)’, ‘알라스콩(à la second)’ 팔자세들도 허우적허우적 확신이 없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플리에(Plié)와 그랑 플리에(Grand Plié).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던 다리 자세라였을까? “플리에는 스스로를 높이겠다는 마음으로는 스스로 높아지지 않는 삶과 참 많이 닮았구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내려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올라갈 수 있는 힘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바워크의 플리에를 하면서 가끔 불전에서 108배를 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나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사실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 ‘플리에’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순간들 말이다. 원하던 일을 얻지 못했을 때,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졌을 때, 사랑이 어긋났을 때,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 때, 그건 넘어지는 게 아니다. 그저 각자의 ‘플리에’를 하는 거다. 높이 뛰어오르는 순간이 있으려면 플리에를 꼭 거쳐야 하고, 내려와야 할 순간에도 플리에는 꼭 필요한 거니까. 그래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에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곤 한다. 플리에 같은 그 시기를 잘 지난다면, 인생의 속근육도 자라는 것이겠지.”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아무튼, 발레』의 이런 서술은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폴짝폴짝 뛰어오르고 내리던 한때들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발레하며 얻은 시스터후드, 발레하며 만난 남자분들, 발레하며 만난 스트레칭의 고통, 발레하며 만난 좌절과 유투브 덕질의 순간들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낯익은 에피소드를 만날 때마다 꽤 오래 그때를 생각했다.

저자에게 발레는 삶의 비타민이었다. 누구나 매일 먹고 마시는 밥 같고 생수 같은 에너지원이 있다. 의식주 말고 ‘의식주 같은’ 필수품. 이건 내가 해 봐서 하는 말인데 발레는 정말 그럴 만하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몸을 쓰는’ 무엇이라는 거다. 참 이상하지, 우리는 늘 몸을 혹사해 가며 ‘노동’을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몸을 힘들게 움직이는데 노동과 몸취미(여기에서는 발레)는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만약 나의 경험이 맞다면 그건 ‘반짝임’이다. 나를 반짝이게 하는 몸취미, 기꺼이 내 몸을 움직이고자 하는 내 기쁨. 그게 다르다. 그래서 “요즘 발레가 '낮은 곳'으로 임해서 동네 곳곳에 발레교습소가 생겼다”(한국일보 기사)는 우스개소리가 나오는 것. 덧붙이자면 나는 작년 재작년 이 반짝임에 숟가락을 얹어 두 개의 글을 썼다. 기꺼운 몸의 경험은 그렇게나 차원이 다르다.

또다시 몸을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요즘 나의 몸쓰기는 ‘숨쉬기 운동’ 말고는 걷기, 그것도 11월 언젠가 추운 날을 계기로 만 보 안팎을 오가는 데 꽤 되어버린.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품위’는 ‘균형’에서 나오는데, 이노무 ‘체’는 언제 밑바닥을 안 보이는 날이 올지 한숨이다. 그러니 일단 북극곰 이글루(?!)에서 기어나와 ‘폴짝폴짝’ 뛰는 것부터 시작이다.

“몸으로 창조하고 생산하는 활동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에 집중하다 못해 우울하게 자기 자신을 파먹지 않나요. 하지만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순한 생의 원칙에 따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지요. 몸이 진짜예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이런, 연분홍 봄에는 다시 발레학원에 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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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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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덮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설국(雪國, 유키구니)’이라는 제목 역시 이 ‘감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하얀 눈이 흩뿌리는 나라, 뿌연 흰빛이 공기를 가득 채운 세계, 어떤 곳을 보아도 블러(blur, 흐림)처리된 이미지 뿐. 어디에도 환상 그뿐이다. 애매모호한 사람과 감정, 그리고 감각뿐이다.

『설국』의 주인공은 둘, 혹은 셋이다. 남주인 시마무라와 여주인 고마코, 그리고 비중은 적지만 여자주인공과 대조된 모습으로 강한 이미지를 남기는 요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마무라의 입장에서 서술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두 여자다. 눈의 나라를 가득 채운 두 여자의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에 압도된 한 남자의 얼어붙은 행동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이 남자, 시마무라는 말 그대로 한량이다. 무용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상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돈으로 온천 순례가 연례행사인 금수저. 이 물렁한 남자의 특기는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여자의 아름다움을. 흐릿한 남자는 일에도 인간관계에도 사랑에도 이도 저도 아닌 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랑하며 그저 산다. 그 어떤 집착도 없다, 그냥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갈 뿐이다. 허무함을 한껏 만끽한다. 아름다움만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고마코, 게이샤로 살면서 한 남자와 인연도 맺지만 사람 마음이 흐르는 걸 어쩔 수 없어 시마무라를 사랑한다. 한때 그녀의 연적이었던 요코는 곁에 머물며 또 다른 허무를 발산하고 시마무라의 시선은 계속 요코의 뒤를 따른다. 그녀 역시 또 달리 아름답기에.

시마무라는 부정하고 싶지만 고마코를 사랑한 것이 분명하다. 절대 고마코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으면서, 그렇게 그 여자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느끼다니. 그게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하면 안 되는 다수의 이유로 빗장을 걸어도 그 사람의 단 하나 아름다움이 넘치듯 쏟아져 들어올 때 물들어 버리는.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자가 탐하는 아름다움은 요코의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가장 충만한 아름다움은 고마코의 것이다. 닿을 수 있었던 아름다움 역시 고마코의 것이다. 요코를 향한 시선은 동경을 넘어서 설국이 만든 환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마무라가 계속 주워내는 죽은 곤충은 무엇을 설명하는 걸까? 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굳이 이 흰 눈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 곤충 유해가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끼워 넣는가? 그건 아무래도 허무 때문. 사랑도 죽음처럼 언젠가 말라 스러질 거라는걸. 분명 시마무라는 저자 가와바타를 투영한 주인공일 것이며, 아무리 민감해진 지금 사랑이라도 언젠가 무디어져 흩어질 거라는 거라 생각하기에 고마코에게 확신을 주지 않는 것이리라. 허무에 시달리는 인간은 섣불리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사랑이 찾아와도 솔직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그리하지 못한다. 고마코의 사랑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 허무를 종교로 믿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그렇게나 슬프다.

이런 생명력 없으며 이기적인 남자, 그 주제에 사랑에 목마른 남자가 고마코는 어디가 좋았던 걸까? 소설을 읽으며 언제나 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어떤 인간에 가까운가 하는. 굳이 고마코와 요코에 비하자면 나는 요코 쪽이다. 나는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사랑은 안 한다. 나에게 100퍼센트를 걸지 않는 남자에게 나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곧 죽을 운명일지라도 내게 인생을 거는 이만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고마코가 더욱 안쓰럽다, 가장 서러운 선택을 했기 때문에. 사랑 때문에 비참함을 느끼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끝내 동등할 수 없는 남자를 상대로 가장 나쁜 패를 쥔 여자가 여기 있다.

왜 『설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품인지 와 닿지 않는다. 분명 시대의 문제가 있을 테고, ‘오리엔탈리즘’의 안경 말고는 그 어떤 이해도 내게 와닿지 않는다. 무엇이든 2018년을 살아가는 내게 ‘옛 여자의 운명’은 서글프기 그지없고, 이기적인 안도감만 베푼다.

어찌 되었건 이 책에서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은 하나다. 아름다움의 감각. 『설국』으로 확신한다. 사랑에는 촉수가 있다는걸. 이 책의 모든 글줄에는 촉감이 가득하다. 어느 한 군데 직설적인 장면이 없는데도 이 애매모호함 가운데 에로틱한 촉감이 축축하게 내 피부에 와닿았다. 하다못해 소리도 촉감처럼 들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형언(形言)할 수 없는 감각을 형언하였다. 놀라운 성과다.

사랑은 감각으로 스민다. 처음엔 온도로, 나중엔 촉감으로. 사랑은 민감하다. 그걸 아는 사람만이 『설국』을 온몸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 『설국』덕으로 내 사랑을 충만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감각의 책’을 덮었으니 이제, 이 희뿌연 겨울의 아름다운 사랑을 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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