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읽지 못할 책은 없다 - 평범한 대학생을 메이지대 교수로 만든 독서법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임해성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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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읽지 못할 책이란 없다’는 말은, ‘어떤 책이든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바꿀 수 있다. 어느 정도 독서습관이 잡힌 ‘매일독자’에게는 크게 새로울 내용은 없었으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쌓아가는 사이토 다카시의 구조력이 돋보였다.

“핵심은 두 가지다.

* 하나는 책 읽기를 즐기라는 것이다. 독서는 수행이 아니다.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책 읽기는 숙제나 프로젝트 같은 게 아니다. 업무상 참고하려고, 또는 역량 강화를 위해 책을 읽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독서를 한다. 호기심의 강도는 높을수록 좋다. 어떤 계기로 ‘좀 더 알고 싶다’는 대상이 나타나면 굳이 주저할 이유가 없다. 10권이든, 20권이든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관련 책을 읽으면 된다. 이런 왕성한 호기심이 독서의 원동력이다. 어떤 책이든 부담 없이 술술 읽는 게 가능해진다면 독서 욕구가 더욱 커질 것이다.

* 또 하나는 양(量)을 늘리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장서 1,000권을 목표로 하라고 제안할 것이다. 벽 한쪽 면을 책으로 채우면 된다. 얼핏 많아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방에 책장이 아예 없거나 몇 권 꽂혀 있지 않다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습관만 들이면 어느새 꽂을 곳이 없어질 것이다. 내가 권하는 방법으로 독서를 하게 되면 500권 정도까지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거기까지 다다랐다면 그 다음은 더 수월하다. 이내 1,000권까지 읽을 수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지식이 많이 쌓였을 뿐 아니라 감정 또는 가치관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견해와 자신의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독서의 묘미다.”

사이토 다카시의 이야기 중 내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발췌독’에 대한 내용.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완독의 부담감을 버리고, 마음껏 읽고 싶은 부분만 읽을 것. 지루한 내용은 훌훌 넘기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상상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늘 내가 해오던 방법, 다만 이에 늘 패배의식과 죄악감을 가졌을 뿐. 나는 이 마음으로 어려운 책을 두 번 세 번 읽어왔다. 물론 그렇게 못한 책도 많지만, 『티마이오스』,『소피스테스』,『파르데미데스의 세계』,『야전과 영원』같은 책들 말이다.

책에 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묻는다. “내게 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매일 읽지 않으면 못 견디는가? 왜 어려운 책이어도 끝까지 붙들지 않으면 못 견디는가? 왜 그렇게 어려운 책을 이해하고만 싶은가?” 아무리 물어보아도 명쾌한 답은 안 나온다. 내게 예민과 슬픔과 우울이 그렇듯 ‘DNA’의 문제라는 것 밖에.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는다, 내일도 읽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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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 상속제도는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
백승종 지음 / 사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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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마감시간에 늦지 않으려 허겁지겁 병원문을 열고 들어간 병원, 대기자 리스트에 ‘홍길동’이란 이름이 떠 있어 깜짝 놀랐다. 홍길동이라니, 본명인가? 의사 선생님 휴식시간을 위해 올린 이름인가? 진료를 마치고 간 약국, 역시 내 약봉투 앞에 선 약봉투의 주인공은 ‘홍길동’이었다. 조선 시대 사회적 지위와 상속에서 차별받은 서자의 대표자, 놀라움과 함께 서글픔이 올라왔다. 『상속의 역사』에서는 이런 서자의 사회차별은 ‘기득권층이 권력과 재산을 독점하기 위해 창안한 사회적 장치’라고 말한다. 물론 그러다가 서자들이 위인들 중 상당수가 되었다고 하니 ‘웃픈’ 이야기이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이들의 세계에서 차별과 배제는 본능이 아닌가 싶다. 사람 둘만 모여도 갑과 을이 생긴다. 자연히 서넛이 모이면 차별적 계급과 배제가 나타난다. 상속(相續)은 바로 이런 인간의 이기심과 자기 계급을 지키기 위한 재산권 이야기. 그리고 재산은 이기적 자연상태에서 나날이 격차가 나는 것이 당연지사. 『상속의 역사』를 서술하는 류승종 저자의 이야기는 강력하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악화일로에 있다. 그 문제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쓴다.” 즉, 이 책은 ‘상속’으로 바라본 역사서이다.

책은 모두 3부로, 1부 《상속의 민낯》, 2부 《상속의 전략》, 3부, 《상속과 젠더》로 분류. 각 부마다 사회계약과 다름없던 상속, 합리적이거나 전략적인 다양한 상속제도, 상속과 성차별을 다룬다. 연금제도가 시작될 때에야 사라진 부양계약서, 유언장 혹은 은퇴계약서 이야기로 시작된 이야기는 마지막 한국의 여성상속 미래예시 이야기로까지 소소하게 재미있다.

상속은 모두 ‘재산의 이동’ 이야기이다. 어떤 나라에서건 도시에서는 돈이 몰렸고 소수의 자수성가 부자가 탄생했고, 다수의 도시빈민이 늘어났다. 서양에서 꼬마신랑이 없는 이유는 동양과 상속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다. 동양에는 아주 어린나이에 결혼하여 부모 아래서 차츰 성인의 권리와 의무를 배웠다면 서양에서는 상속재산이 결정되어야 결혼할 수 있었기에 서른이 넘는 노총각들이 수 없었다. 한편 어린 여자들이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지참금으로 상속이 일찍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산상속을 못 받은 남자, 지참금 없는 여자들은 평생 홀로 살았다. 결혼과 재산‧상속과의 연관성은 이렇게 컸던 것이다. 그러니 부모와 자식, 친척간 법적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서 입양이나 대부모 제도가 발달했고, 종가가 큰 권력을 가졌으며, 길드나 대학이 발생했다. 종교기관 역시 나름의 역할을 했다. 부부간의 관계 역시 재산을 지키는 데 중요했다. 이혼 금지에는 지참금 문제가 있었고,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levirate marriage)에는 과부의 복지 문제가 있었다.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을 지키는 건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도 중요했다. 물론, ‘여자’ 역시 재산의 일부다.

이 ‘상속의 역사’ 끝에 다다른 지금은 어떤 문화 가운데 있는가, 『상속의 역사』에서 말하듯 ‘지금도 자력으로 부자가 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니,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경제가 큰 폭으로 성장하는 격동의 시기에도 한 사람의 개인이 부자가 되는 데는 상속만큼 결정적인 요소는 없다. 한국 역사상 21세기처럼 경제활동의 기회와 종류가 다양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요즘처럼 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서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자력으로 부자가 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악화일로에 있다. 그 문제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쓴다”고 말한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저자의 겸손한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금수저’의 대물림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곤 한다. 안타깝게도 부와 가난의 대물림은 유사 이래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온 오랜 관습이다. 지금 우리가 금수저의 불평등을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실은 새로운 현상이다. 사회 정의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이 그만큼 커졌다는 증좌다. 세상이 그만큼 좋아졌다거나 나빠졌다고 함부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진 것은 다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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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되기의 민낯 - 독박육아 구원 프로젝트
신나리 지음 / 연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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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책을 다 읽는다, 『엄마 되기의 민낯』이라는. 대한민국 여성의 3-40대 상당수는 결혼과 육아에 매여 사는 사람이 많다.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애 키우기 좋은 직장’이라고 흔히 말하 듣는 내 직장에서는 더욱 그렇고. 나 같은 비혼 여성이 아이 엄마, 동료, 친구와 살아가려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으니.

저자는 카카오 기반 브런치 플랫폼과 오마이뉴스에 글을 연재했다고 한다. 이곳 글의 특성이 그렇듯이 주로 ‘자기 수기’형의 특징이 잘 드러났다. 관련된 사회학 책을 많이 읽어온 나에게 특별할 내용은 없었지만, ‘자기’ 글이라는 데 저자의 ‘생활’ 특성이 두드러진다. 요즘 이러한 에세이가 인기를 얻는 것은 SNS가 생활을 파고들면서 개인의 생활을 오픈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일상이 되어서가 아닐까. 저자는 여기에 적절히 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저자 신나리의 인생은 꽤 ‘성공적’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았고, 정확히 전달했으며, 끝까지 투쟁해 원하는 것을 얻었다. 게다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결과가 눈에 나오다니. 와우!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역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투닥투닥’ ‘알콩달콩’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일단 가져보았으니 불평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364페이지의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다음과 같다. “아내가 한 문장, 한 문장 써 가는 동안 나는 돈만 버는 사람에서 아빠가 되어 갔다. (이종찬, 저자의 남편)” 내가 갈 수 없는 나라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만큼 고되며 외롭고, 또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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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의 탄생 - 내면의 품격을 높이는 일상의 매뉴얼
김명훈 지음 / 비아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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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넬로피》의 메인 줄거리는 ‘진정한 신랑감 찾기’다. 가문의 선대가 저지른 몰염치한 짓으로 마녀의 저주를 뒤집어쓴 페넬로피는 돼지코를 가지고 태어난 귀족 영애다.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같은 피를 가진 이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뿐. 전형적인 블루 블러드 페넬로피 가문은 블루 블러드 상류층 남자라면 모두 다 선을 보인다. 이때 몰락 귀족 맥스를 만나 진심이 통하게 되지만… 이 저주가 풀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몰락 귀족으로 자기를 속인 가난한 음악가 조니 마틴이 ‘나는 상류층이 아니므로 페넬로피의 상대로 자격이 없어’라며 도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류층의 ‘자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겼을 것이다.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 아닌가, “중산층의 자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프랑스, 영국 등 나라별로 조건을 헤아리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김명훈의 『상류의 탄생』은 ‘진정한 상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을 담는다.

1부 《누가 상류인가?》에서는 이 책에서 말하는 ‘상류층’의 정의를 제시한다. 사회적 ‘위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지향적인 사람들이 상류층임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알려주며 상류층의 바른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상류의 탄생』표지에 제시된 배려, 책임, 통찰, 원칙, 예의, 절제, 청렴, 전통, 박애, 품위라는 개념을. 2부 《책임을 다한다는 말》에서는 미국의 전통 있는 상류층이 어떻게 자신들의 가치를 지켜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건국 초기 대통령부터 기업가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 모였다. 3부 《다르게 사는 방법》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품위를 강조하여 이야기한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내면적 계급’이며 진정한 상류인 것이다. 미국 뿐 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독일, 덴마크의 이야기로 사회지도층의 고결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제목은 『상류의 탄생』이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상류의 품위이며 상류의 가치관이다. 돈이나 권력으로 상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결한 가치관을 가진 이야말로 상류임에 마땅한 이라는 것. 그러므로 상류는 하나둘 더 탄생되어야 한다는 것, 사회 전체가 상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바람이며 목적이다. 미국 이민자인 저자의 특성상 『상류의 탄생』에는 미국 이야기가 주류를 차지한다. 3부에서의 스웨덴, 핀란드, 독일, 덴마크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이 책의 이야기는 미국에 치우쳐 균형이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바마가 교황에게 보낸 선물 등 상대의 가치관을 제대로 파악하고 배려하는 소박한 선물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얼마나 진실함을 선물하고 있는지를 반성했다.

사람들은 왜 상류가 되고 싶어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내가 살아오고 느낀 그 이유는 주로 권력이었다. 힘을 누리고 싶어 상류가 되고 싶어했다. 여기에서 ‘힘’에 대한 시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힘인가. 매일 때리고 부수고 다시 짓고 바꾸는 이 사회에서, ‘변화’를 보이는 것이 힘이라면 좀더 느리고 부드러운 힘을 계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키고 다스리고 숙성하는 힘을. 그것이 두터운 상류를 만드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힘을 소유한 이는 자연히 위로 올라간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 나는 힘을 가질 수 있는가? 어떤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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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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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니 참 진부한 제목이다. 비록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해도, 이 신뢰할 만한 사회학자가 ‘고통의 문제’를 주제로 내놓은 책을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이름의 저자였다면 아마 이 책을 쉽사리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고통의 문제’를 궁금해했고, 신학책을 포함해 여러 책을 읽어왔으나 여기에 ‘답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으니. ‘고통을 나눌 수 있는지 여부’에 역시 회의적이다. 고통이란 게 각자에게 절대적인 것인데 누가 누구의 고통을 공감하고 또한 덜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다만 나는 ‘고통을 통과하는 몸’만을 경험했고, 경험해 왔다. 날카로운 시간에 더 상처입지도 못하는 극한 고통의 시간까지 지나,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언젠가… 그때의 시간을 ‘웃프게’ 말할 수 있는 경험. 그건 오직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냈을 때 가능한 치유뿐이었다. 이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내 경험을 정확한 학자의 언어로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으며, 내게 없었던 중요한 요소를 말해 주었다. 내가 ‘곁’을 두려 하지 않았고, ‘곁’을 미워했다는걸.

엄기호의 이전작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서문과 에필로그는 ‘감정’이 실려 뜨거웠다. 본문 역시 사유의 밀도가 훨씬 치밀했다. 느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나 치밀해서 줄을 긋기도 힘들었고, 한 순간 주의를 놓치면 다음 문장으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꽤 집중해야 했다. 책은 모두 세 챕터 1부 《고통의 지층들》 2부 《고통의 사회학 》 3부 《고통의 윤리학》으로 구성되었고, 그중에서 내가 가장 공감한 것은 1부였고, 가장 깨달음이 컸던 것은 3부였다.

1부 초반부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진부하도록 너무나 ‘평범한(!)’ 고통의 모습이다. “끝이 없다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인권 현장에서의 고통뿐만이 아니다. 모든 고통이 그랬다. 사회적 관계로 인한 것이건 육체적 질병에 의한 것이건 사람들을 가장 공포스럽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고통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절망한 이들은 너무나 전형적인 고통의 반작용을 발산하고, 고통의 무의미와 허무에 시달리다 곁에 있는 이들을 괴롭힌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말이다. 말인지 주문인지 알 수 없는 소리 언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말밖에 고통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고통은 갈 곳을 잃는다. 고통받는 이는 외로움에 치를 떤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2부의 내용은 ‘사회학’이란 단어를 쓸 것도 없이 너무나 낯익다. 고통을 전시하는 사회에 있어서. 더 큰 고통, 더 비참한 고통을 드러내 전시해야만 이 고통은 관심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고통은 널리고 널렸다. 모든 고통이 가진 절대성을 의미 있게 여기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뉴스 가치’에 도달할 정도의 수준과 내용, 강도인 고통을 건져 올릴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절대성이 아니라 선정성이다. 따라서 이 플랫폼에 올라탈 때 피해자는 자기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물론 이때 돈을 버는 것은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어 주목을 이끌어내는 플랫폼 자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목은 돈이 된다. 플랫폼에게 말이다. 이때 고통의 절대성은 내 고통이 다른 누구의 고통과 ‘비교’하더라도 절대적으로 고통스럽다는 것으로 의미가 변질된다. 고통 간에 경쟁하게 되고 소위 말하는 고통의 올림픽이 벌어진다. 고통이 고통을 밀쳐낸다. 자신의 고통이 다른 고통에 비해 절대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더욱더 자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통의 콜로세움’에서 계속 뼈저리게 고통받는 이로 살아갈 수밖에. 일단 ‘고통 관종’이 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관종 사회는 고통받는 사람의 존엄이 존중되는 바로 이 길을 봉쇄했다.”

한편 엄기호가 이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을 통하여 가장 말하고자 했던 것은 3부, 《고통의 윤리학》이 아니었을까. 고통은 어쩌면, 아주 약간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약간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고통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단어는 ‘곁’이다. 저자는 말한다. “고통의 곁 옆에 또 다른 곁이 있을 때 그는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고통받는 이의 곁이 고통받는 이를 이끌어 함께 걸어야 한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게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것이 고통을 나누는 첫 움직임이다. 그렇게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이때 주로 나눈 이야기는 ‘고통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가 그 고통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고통의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 삶의 자리에서 함께 걷도록 하는 일이 가장 정확한 배려임을 생각도 못 했으므로.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내 통증을 잊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생활이었다, 그것도 바쁜 생활. 내가 있을 자리가 생활 가운데 확실히 있을 때에 나는 ‘고통받는 이’ 대신 ‘유능한 한 인간’으로 나를 정의할 수 있었다. 세상 가운데 내 몫을 확실히 할 때 나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고통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중요한 해답은 읽기와 쓰기다. 고통당하는 이가 가지지 못한 고통의 언어를 시간을 들여 시도하는 것은 ‘고통의 해명’에 있어 정확한 처방이다. 자신에 대한 앎에 이르고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또한 이 언어는 삶을 재건하는 가운데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원이 된다. 여기 소개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민승남 옮김, 민음사, 2004)이나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메이 옮김, 봄날의책, 2017), 프리모 레비의 『고통에 반대하며』(채세진·심하은 옮김, 북인더갭, 2016)를 꼭 읽어보고 싶다.

저자는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고 강조한다. 간접적인 연대만 있다는 것이다. 관건은 그런 간접적인 곁과 곁의 유무다, 고통의 곁. 그 곁에 또 다른 곁을 구축하는 것만이 수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곁을 단단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인터뷰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말미에 첨부한다. 나는 이것보다 더 완벽한 고통의 결실을 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이에 대해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한 분으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외딴 섬에서 나고 자랐다. 그분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동생이 부모님이 뭍으로 출타한 사이에 열병에 걸려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모는 돌아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했다. 아이의 상을 치른 후 부모가 한 일은 나에게 말을 전해준 분을 포함하여 자식들을 뭍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동생이 죽은 그 고통의 현장에 다른 자식들을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장소에 있는 한 계속해서 그 죽음이 회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이 가족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아무런 죽음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고 한다. 뭍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집으로 찾아갈 때도, 뭍으로 자식들을 보러 부모가 나올 때도,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을 하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아 명절에 방문할 때도, 아무도 그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지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늘 그들 근처에 머물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그 죽음을 늘 의식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음이 없었던 것처럼 매일 연기하고 연기하는 만큼 죽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하나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을 잃은 내 슬픔이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 견줄 수 있을까. 아이를 잃은 내 슬픔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어린 나이에 죽음을 목격한, 그것도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죽음을 목격한 자식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확하게 또 정반대의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면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내 고통을 아느냐?”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 말이다. 이 두 마음 사이에서 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이 이 가족의 ‘공동’을 파괴하지 않는 일이었다. 고통을 통한 연대가 아니라 슬픔을 같이 공유할 수 없다는 그 침묵으로 이 가족은 서로에게 곁이 되었다. 그 고통을 이야기하는 순간 아무도 누구에게도 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곁이 되었다. 재희의 형제자매들이 어머니의 곁이 된 재희 옆에서 끊임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곁이 된 것과 달리 모두가 고통의 당사자인 이 가족은 침묵으로 슬픔을 공유할 수 없는 슬픔을 공유하며 ‘곁’이 되었다.

그러나 재희의 이야기에서도, 이 가족의 이야기에서도 곁, 즉 유대와 연대의 가능성에 관해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고통을 통한 연대, 정확하게 말하면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고통을 통해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곁이 만들어지고 그 곁으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회’만을 통해 가능하다. 고통의 곁에 곁이 되는 연대를 통해서, 혹은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는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동행과 연대는 고통으로부터 한 다리 건넌 우회만을 허락한다. 이 우회를 통해서만 우리는 고통과 동행할 수 있다. 그 동행을 견딜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고통이 만드는 절망을 동행이 주는 기쁨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그나마 생긴다. 그리고 혹여라도 고통이 끝난다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아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을 계속해서 도모하다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면 고통을 끝맺을 수 있다. 이 가족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죽음으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어느 명절에 부모가 계신 섬에 방문했다. 노년에 집을 개조해서 숙박업을 하고 있던 이 집에 웬 낯선 청년이 한 명 있더란다. 어느 날 섬에 흘러 들어온 청년인데, 청소하며 일을 도울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왔단다. 그날로 이 집에 눌러앉게 되었고 밥을 먹는 것에서부터 잠을 자는 것에 이르기까지 스스럼없이 부모와 너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같이 하였다고 한다. “OO가 돌아왔네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 몇 십 년 만에 죽은 동생의 이름이 가족들 사이에서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 숱한 세월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않았던 이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환생해서 돌아온 자식을 두고서야 가슴에 묻었던 자식의 이름을 꺼냈다. 그리고 이 환생한 자식과 더불어 그들은 더 단단한 ‘공동’이 되었다.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언제 고통에 관해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것은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될 때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책에서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이기에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끝나지 않는다면 말할 이유가 없다. 말할수록 상처만 더 깊어진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말이다. 고통은 끝나고서야 말할 수 있다. 고통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서야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에게 함몰되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통은 끝나지 않으며, 고통이 끝나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을 도모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도모하다가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고통은 끝날 수 있다. 환생한 자식과 함께 살아가며 죽은 자식에 대해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책 말미에-고통과 연대하는 우회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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