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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소설은 정말 최고의 어두운 분위기를 풍긴다.
늑대의 제국은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매우 읽고픈 소설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데뷔작인 황새를 읽고 나니까 다시 한번 꼭 읽어야겠다는 다짐과 확신이 든다.
소설 속 주인공인 루이는 나이 30대에 아직 직업활동을 해보지는 못했지만 부유한 양부모 밑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
물론 물직적으로는 풍족했으나, 왠지 자신과 거리를 두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 가족의 사랑에 굶주려 어딘가 공허하고 의욕없는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양부모님은 루이에게 스위스 조류학자인 뵘을 소개시켜 주었고, 뵘에게 소개받은 아르바이트에 응함으로써 루이의 평범했던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뵘이 돌보던 황새 무리 중 일부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는 원인을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직접 황새를 따라가며 조사해달라는 일이었다.
황새는 매년 같은 경로로 여행을 떠났다가 떠난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습성을 지녔는데 그 해에는 왠일인지 황새들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루이가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갑자기 뵘이 심장을 적출된 채 잔인하게 살해당하게 되고, 루이는 여행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저 거부할 수 없는 마음의 소리와 우연히 황새가 여행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황새> 는 엽기적인 사건과 은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몇 가지 사실들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힌트들이 여기저기 있다.
우선 책 표지 앞장부터 나와있는 황새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는 생태습성과 다이아몬드 시장의 독특한 생리라는 문구를 읽자마자, 나는 황새가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소한 힌트가 되는 글들은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봄에 황새들이 돌아오면 뵘은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해서 '이러이러한 번호가 지나가는 걸 봤어요? 그리고 이 번호는요? 또 저 번호는?' 이라고 물어댔소. 그럴 때 보면 그 양반 영락없는 미치광이지. 5월이 돼서 새들이 다 지나가고 나면 그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더 이상 전화를 안 하는 거요." - p.71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정돕니다. 고리를 끼웠을 때는 개략적인 항로를 그리는 데만도 10여 년이 걸렸죠. 그런데 항공표지 덕분에 우리는 한 달만 있으면 황새들의 정확한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 p.80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루이가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간단한 사건의 실마리는 잡을 수 있다.
다만 계속해서 발견되는 심장이 적출된 채 죽임을 당한 시체들... 어째서 계속 같은 성질의 심장이 사라지는지 끔찍한 와중에도 궁금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동한 일은 3가지인데 하나는 여행중 사귀게 된 방랑하는 유쾌한 지식인 미나우스의 슬픈 죽음, 두번째는 그리고 루이가 자신을 뒤쫓던 살인자 중 한 명을 죽이고 보았던 장엄한 1천 마리 황새의 아름다운 날개짓이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루이는 자신의 생을 위해 싸워야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서 처음으로 그토록 장엄한 광경을 본 것이다. 아름다운 황새가 가져다주는 끔찍한 죽음들... 그건 아프리카 오지의 신비한 아름다움 속에 감추어진 끔찍한 살인들을 나타내는 듯했다. 그리고 루이 대신 내가 미나우스에게 잠시 애도를 표했다. 나도 그가 좋았으니까 말이다.
'오슈발트 슈펭글러의 저서에 나타나는 문화 개념' 이라는 주제를 8년 동안 파고든 끝에 얻은 결과였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봐도 아무 쓸모가 없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저 피곤하기만 한 그 무거운 1천 쪽짜리 논문을 마무리 짓는 순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던 건 오로지 공부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p.22
그리고 마지막 3번째, 유쾌하게 자신의 삶을 루이에게 투영한 작가의 표현력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봉투를 여는 순간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내 눈앞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갈고리에 걸려 있는 일종의 인간 도살장을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입술이 찢기고 눈구멍이 텅 빈 얼굴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팔다리들. 모든 시체들은 하나같이 흑인이었다. - p.46
그가 여행을 떠나기전 이 사진을 보고 여행의 길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예측을 못 했다는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하나같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흑인 아이들, 그리고 자신이 가야할 아프리카... 어떤 끔찍한 것이 자신을 기다릴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도 못했을까? 그럼에도 여행을 떠난 그의 용기가 참 대단하다.
루이와의 여행에 동참할수록 우리는 커다란 사건들의 핵심이나 연결고리들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원인과 잔혹한 범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전까지는 한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고 안전한 곳에서 호위호식하던 그가 그렇게 끔찍한 사건들을 겪고도 여행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궁금증 때문이기도 했을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 황새에 빠져들고 새로운 충만감과 사명감을 느끼다니...그 용기는 대체 어디서 솟아나온 것일까?
그리고 그를 낯익어 하는 난쟁이 의사.. 이쯤되면 독자들은 그의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과 이 사건들의 연관성이 궁금해서라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루이가 항상 거짓으로 말했던 그의 과거 중 과연 과거에 정말 일어난 일은 무엇일까?
악이 이 땅으로 돌아오고 있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라즈코의 장인이 한 말이다.
과연 루이가 만나게 될 악은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