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살인
이언 피어스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화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던 헨리 맥알파인은 어느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후미지고 거친 프랑스 브르타뉴 앞바다의 황폐하고 거친 폭풍의 섬 우아로 떠났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초상화를 그려달라며 그의 친구이자 저명한 비평가인 윌리엄 나스미스가 찾아온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찾아온 친구 윌리엄에게 이야기하는 헨리의 독백 형식으로 되어있다.
참 특이한 느낌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언 피어스의 독자이자 헨리의 조롱이 섞인 비난을 듣기를 감내해야하는 그의 친구 윌리엄이 되었다.
헨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둘이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나같이 형편없는 화가로선 될수록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해. 티치아노 같으면 단번에 모든 걸 이해했겠지.
그는 천재지만, 자네가 언젠가 지적했듯이 나는 천재가 아니잖나. 자네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닫기 전엔 그 말에 상처를 받았지. 난 자네 말이 진실이라면 어떤 말이든 용서할 수 있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네.
 - p,14~15
 
자네가 몇 년 사이에 좀 세련됐기 때문에 난 지금 골치가 아프다네. 자네가 도착하기 전에 상상하던 것과는 달라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 자넨 자신감이 좀 지나치고 건방져졌군. - p.26
 
자넨 지금 평범한 의자에 앉아 있지만, 난 교묘하게 그걸 옥좌로 바꾸고 있네. 자네의 오만한 자세를 보게.
자네는 신문이나 유행잡지에 평이나 끼적거리는 일개 비평가가 아니네. (중략) 자네가 손가락을 올리면 명성이 따르고, 자네가 고개를 저으면 화실에서 몇 년 동안 죽어라 땀 흘리며 키운 희망이 영원히 끝장나지.
- p.41
 
이런식이다. 헨리는 윌리엄을 칭찬하다고 그에게 얼마나 매혹되었는지 말하고 자신을 낮추다가도 금방 그를 조롱하고 있다.
평론가인 윌리엄이 자신이 후원하지 않기로 한 화가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는 윌리엄에게 화가로서의 복수를 한다.
바로 그의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그림으로 그의 왜곡된 마음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
 
윌리엄은 겉으론 거칠 것 없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양, 대범한 척 하지만 실상은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질투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대범함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에블린과 재키라는 과거의 여인들, 윌리엄은 그녀들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하며
그 와중에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그제서야 헨리는 윌리엄의 표정이 말해주는 그의 나약함과 위선적인 모습을 깨닫게 되었고
그걸 그림으로 그려 윌리엄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윌리엄이 과연 그런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고, 폭풍속을 헤치고, 마지막으로 그 뒤에 버티고 선 헨리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사실 피카소의 '비현실적인' 그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사실 얼마나될까?
인상주의니 야수파니 입체파니 하는 것들은 따지고 보면 평론가들에 의해 구분되어지고 논해지고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런 비평가들의 평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모든 비평가가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대로 윌리엄같은,
그러니까 자신이 분류하고 자신을 따르는 자신이 인정한 사람들을 밀어주기 위한 비평을 우리는 잘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비평가들의 시대' (p.69) 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우리는 비평가의 비평을 비평해대며 그림을 보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평에 자신이 그리고 싶어하는 그림보다는 사람들과 비평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림을 그려야하는 화가들의 고뇌가 반복된다.
비평가들의 비평을 받아들이는 예술가들의 마음이 책에 나온 부분이 있는데 나는 이를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본 적이 있어서 쉽게 공감이 갔다.
 
처음엔 믿을 수 없어하고 점차 그만 읽고 싶어하다가 결국은 끝까지 읽고 싶은 욕구에 이끌리거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결국은 그런 방어 노력이 산산조각 나게 돼. (중략) 자신이 읽는 평이 악의와 편견에 찬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고 진실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게 돼. (중략) 그 다음엔 증오. (중략) 
마지막으로 자기 방어 노력과 자신감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믿음이 찾아오지. 거기 쓰인 말, 인쇄된 말인 만큼 그 말이 사실이라는 믿음. 자신의 실제가 드러났다는 믿음. (중략)
- p.208~209
 
헨리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후대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어한다.
이는 비평가 없이 그냥 있는그대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소망일 것이다.
언젠가 과연 그런 날이 오게될까? 그저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차례가 왔을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을까? 선배들을 암흑에 몰아넣고 그들의 명성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으며 그렇게 즐거워했으니 말이야. - p.37
 
이 그림은 '헨리 모리스 맥알파인이 그린 어느 신사의 초상' 이 될까? 아니면 '이름 없는 화가가 그린 윌리엄 나스미스의 초상' 이 될까?
국립 미술관에 소장될까, 아니면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소장될까? 두고 보세나. 이건 자네의 명성과 내 재능의 싸움이 될 거야.
결과는 우리 두 사람이 죽은 뒤 한참 있다가 판가름 나겠지.
  - p.10~11
 
비평가란 보이는 것 아래 숨겨진 걸 봐야 하지 않겠나? 예술 작품을 판단하면서 그걸 만들어 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수 있나? 동료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사람이 만들어 내는 작품을 이해할 수 있나?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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