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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진 1 - 완전판
다카하시 츠토무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세주문화사에서 소장본 나온거 1권부터 16권까지만 샀었는데

두어달 전쯤 못 산 17,18,19권 사려고 보니까 절판인 것이다.

소문에 출판사가 부도 났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고 ㅠ.ㅠ

그렇다면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뢰진이 과연 다시 출간될 만큼 인기가 있었을까 -_-;; (이 만화책 아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_-;;)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요새 계속 어찌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니까 서울문화사에서 나와부렀네 ㅠ.ㅠ

사실 은근히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나온걸 보니까 그 전에 산 게 쫌 억울하다.

보니까 표지가 좀 다른데, 다른 점에서는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모르겠네..

새로 사자니 그전에 산게 아깝고 (5~6만원을 그냥 날리는 꼴? ) 값도 무려 5,500원 ㅠ.ㅠ

어찌해햐는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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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택배 2009-07-0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인성을 주인공으로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로 만든다고 한창 뉴스떴을때가 있었어요...그것때문에 새로 나온것 같기도하고.... 그리고 은근히 매니아가 있으니까요 이 만화 ㅋㅋㅋ
 
 전출처 : messiah_0 > 미래를 향한 끝없는 향수
나의 지구를 지켜줘 1 - 애장판
히와타리 사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나의 지구를 지켜줘> 원작을 읽은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2002년 초봄이었다. 이 작품이 87년에 연재를 시작했는데 10년도 지난 21세기에 보기 시작했으니 뒷북이 이런 뒷북이 싶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고전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람의 가슴 속까지 전달되는 법이다.
 
누구나가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겠지만, 하나의 이야기는 사건(events), 인물(characters), 배경(settings)이라는 3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이야기가 재미를 주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 요소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하고, 걸작으로남으려면 기막힌 하모니를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는, 전생물과 순정만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어떨까.

이 작품은 전생이라는 소재로 배경을 꾸미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 전역에 전생 붐을 일으켰을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하지만(그 영향으로 인해 한국에서도 <은행나무 침대>가 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설정은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강산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전생 레퍼토리는 일본만화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시대를 감안한다면 참신한 설정이었다고 해줄 수도 있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굳이 설정이 독특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참고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충분히 대단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어떤가? 줄거리도 딱히 엄청날 것은 없다. 작품 전체를 살펴보았을 때 이 사건은 결국 '전생에 외계인이었던 한 남자애가 전쟁고아였던 기억에 휘둘려서 지구를 위태롭게 만들 뻔'했다는 걸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우주 너머까지 넘어가는 설정을 갖고도 결국 뉴스거리가 될만한 대소동이 벌어진 적은 없다. 클래이맥스에서 링이 도쿄타워에서 일으키는 소란 정도가 제일 요란했달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작가의 능력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괜찮은 스토리 가지고도 죽을 쑤는,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능력이 떨어지는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중반에 조금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쾅쾅 터지는 가시적인 사건 없이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이야기를 충실히 해냈다는 점에서 스토리 전개능력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배경도 합격점, 사건도 합격점이라고 해서 이 작품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나의 지구를 지켜줘>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미덕은 사람의감성을 자극하는 왠지 모를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캐릭터들의 호소력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두가지 유형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캐릭터들을 움직이는 타입과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움직이는 타입. 딱 그렇게 갈라진 것은 아니지만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쪽인지 느껴진다. 이것은 어느 쪽이 좋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취향과 역량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중심점이다.

전자의 경우, 대개는 엄청난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그걸 알아차리게 된 주인공을위시한 캐릭터들은 어쩌구 저쩌구 이러자 저러자 자신들의 머리를 맞댈 틈도 없이 그 상황에 대항하게 된다.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배경'에 의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스케일이 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 캐릭터의 마음이나 향방보다는 사건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그 캐릭터 하나가 움직인다고 대사건의 방향이 갑자기 휙 돌아설 리는 없으니까. 일반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보통 소년만화쪽에서 보이는 경향이다.
 
그럼 후자는? 보통은 소소한 일상을 그리는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남녀간의 밀고 당기는 감정선만으로 제어하는 순정만화나 학원물, 옴니버스 스토리에서의 캐릭터들은 벌어진 사건에서 받는 중압감으로부터 훨씬 자유롭다. 캐릭터 중 한 명이 마음을 바꾸면 그만큼 이야기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자잘한데 마음씀이 많이 가는 순정만화 쪽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양쪽 다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세계에 치중한 나머지 인물을 잃을 수 있다. 즉, 사건을 이끌어가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캐릭터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 속내를 표현해주는데 소홀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사건이 아무리 흥미있어도 독자들이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는데는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맨날 친구들끼리 사각관계 오각관계로 번져서, 기껏해야 연애타령으로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급급하다. 사랑이 가장 인간의 반응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감정이기 때문일까? 후자는 캐릭터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대신에 사건의 끈을 놓쳐버리기 쉽다. 얘랑 놀았다 쟤랑 놀았다 캐릭터들끼리 시시덕거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배경설정은 남아있는데 사건은 없다. 처음과 끝을 일관된 하나의 스토리로 이을 수가 없는 지경에 빠져버려서야 황급히 끝이라는 간판을 내거는 3류 순정들이 한두개가 아니다. 독자는 캐릭터들의 감정선 교차를 따라가며 그들이 벌이는 만담쇼를 재미있게 지켜보기는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아주 맘에 드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먼지가 쌓여 잊혀져가는 스토리가 될 뿐이다.

설명이 길었지만, <나의 지구를 지켜줘>는 사건 속의 캐릭터들의 조화라는 점에 있어서는 버금가는 작품을 꼽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균형을 보여준다. 초반에 등장한 주요 캐릭터들과 주변인물만으로 이렇게 아기자기한 형태로 깔끔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간 것은 당시 내게 거의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지만 전개방향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히와타리씨의 후기에 따르면, 그녀의 캐릭터들은 가끔 전개에 반항도 하고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려고 움직일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때 자신은 보통 그 캐릭터가 원하는대로 하도록 놔두지만, 대신 누군가를 곁에 붙여 설득시키는 식으로 돌아오게 만든다고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라면 잇세이가 삐진 나머지 시온 편에 붙겠다고 했을 때와, 아리스가 하루히코와 함께 있게 된다는 말에 겁을 먹고 도망친 때 등이 있다. 하마터면 스토리가 급회전할 뻔한 이 위기를 작가가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독자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캬와 라즐로 같은 경우 본래 계획에 없던 캐릭터지만 왠지 들어갔다면서, 아마도 시온이 그런 추억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도 말했다(실제로 시온이 항상 그리게 되는 안식처의 이미지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거의 캐릭터들의 애드립으로 처리한 장면조차 있다고 한다(다이스케와 링의 대치씬). 전체적으로는 커다란 사건이 분명 존재하지만(링의 계획) 동시에 캐릭터들은 그만의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며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이 관계되어 꾸미는 음모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컨트롤하기 쉬웠을 것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덕분에 하나의 사건이 이야기로서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캐릭터들의 감정선과 행동 역시 건드리지 않은 채 성립되고 있다. 적절한 선에서 끊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녀는 자신과 타인의 간격을 확실히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자신 안에 캐릭터들의 마음을 모두 담아두고 하나하나씩 열어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다른 장르도 아니고 순정만화에서 감정선을 놓치면 그 작품은 그 날로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단하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캐릭터들의 전생이다.

잠깐 다른 만화의 예를 들어보자. 와타세 유우를 인기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유명작 <환상게임>. 중반부가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전개가 늘어지긴 했지만 상당히 멋진 작품이었다. 그러나 2부는 아무래도 군더더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1부에서 죽었던 캐릭터들이 유령이라곤 해도 할거 다 하며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젠장, 내 눈물 물어내!'라고 외치고픈 심정이었다). 몰라보게 늘은 작화실력에 눈이 즐겁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걸려서 맘편하게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그 결정적인 위화감을 내 동생의 한마디가 짚어주었다.

"아무래도 유위가 유귀와 같은 인물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

그랬다. 1부에서의 그 돈벌레 바보열혈순진소년 유귀는 어디 가고 자상하고 부드러운 미소의 어른스런 오라버니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세일러문에서의 코우 세이야가 치바 마모루로 바꿔치기된 기분이라면 이해하려나. 작가는 후기에서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라며 변명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었다. 환생 이전 모습인 유귀가 적으로 등장하기까지 하니 더더욱 둘을 비교하게 되고 사태는 점입가경. 유귀가 유위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그려졌었다면 별문제지만 그 두사람은 '전생'과 '환생'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 믿고 미주가 그 둘을 같은 사람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 이 작가는 2부에서 바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애쓴 모양이지만.... 결과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문제점은 저것이다. 환생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다. 그 사실을 표현할 수 있는가? 전생의 모습을 쫓아 사랑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전생인과 다른 인간이라고 독자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 하지만 히와타리 사키의 <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읽어나가다 보면 그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캐릭터들 사이에서 그리고 독자 안에서 녹아내린다. 진바치가 "난 아리스가 좋아"라고 하자 잇세이가 "잘해봐, 진바치! 우리들은 친구잖아?"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사실 엔쥬의 사랑은 이미 전생에서 끝난 거야. 네가 멋대로 그 유령에 잡혀버린 거지"라고 사쿠라가 말하는 장면에선 무엇이 느껴지는가. "모두 링 때문에 기억해낸 거야!!!"라고 울부짖던 아리스의 모습은 어떤가. "넌 이제 시온이 아니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눈물이 쏟아진다.

이 만화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아리스와 모쿠렌은 다른 인물이다,'라는 사실이다. 굳이 아리스만이 아니라 다른 여섯 명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별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타인이다. 하지만 그 타인의 기억이 고스란히 자신의 안에 머물러 버렸을 때, 그 사람의 자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그런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캐릭터들과 대화를 나누는 작가, 히와타리 사키는 전생물의 문제점을 부드럽게 극복했다. 바로 그리움을 자아내는 원인, 추억이라는 키워드를 이용한 것이다.


전생인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그들의 추억이 현재에 사는 이들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기에, 과거를 향한 그리움과 후회가 얽혀 있기에 다들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했건만 죄의식을 느끼고(하루히코), 연정을 느끼고(잇세이), 책임감을 느끼고(다이스케), 복수심을 느낀다(링). 참 억울하다고 느껴질 만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잘 극복해낸다. 그리고 이것이 히와타리의 성공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곱명의 환생자들에게는 하나씩 강하게 품고 있는 추억(思い)이 있다. 사쿠라에겐 엔쥬를 향한 우정(걱정)이, 진바치에겐 모쿠렌을 향한 연심이, 그리고 아리스에겐 시온과의 사랑이 남아있다. 이렇듯 각 캐릭터들에게 하나의 중심점이 있었기에 그것을 포착해서 그들에게 목적성이 확고한 행동패턴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각자의 생명력을 얻었다. 더불어, 그 추억들은 환생자들에게 있어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기에 전생과 환생은 별개의 인격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질러서 온 댓가가 아니고 하늘에서 어느날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감정이기에, 독자들 역시 '과거에 존재했던 엔쥬'와 '현재를 살아가는 잇세이'를 구분하고 자칫 착각하기 쉬운 그 둘을 별개의 객체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추억들이 차례차례 승화되면서 마침내 모두는 한덩어리가 되어, 최종문제로 남아있는 시온의 추억을 달로 떠나보내기 위해 클래이맥스로 치달아가는 것이다. 소름끼칠 정도로 정교한 구성이다. 어느 시점에서 각자의 추억이 승화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팬으로서 즐길 수 있는 묘미 중 하나다. 이 작품의 메시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추억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이 전략에서 가장 힘들게 표현된 것은 고바야시 링일 것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갑작스런 추억에 휘둘리면서도 알아서들 대처했지만, 이제 7살된 링에겐 그런 대응이 불가능했다. 그는 어린데다 그렇잖아도 무거운 시온의 기억에 짓눌려서 계속 괴로워한다. 그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서, 시온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달기지를 날려버리려 시도했지만, 동시에 시온의 기억이 요구하는 지구 조종에도 동조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클래이맥스로 가기까지, 정확히는 아리스가 눈치채기 전까지 독자들도 어디까지가 링이고 어디까지가 시온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을 걸로 생각된다. 7살짜리 꼬마가 애늙은이처럼 행동하는데 어떻게 그가 이전의 꼬맹이와 같은 인물임을, 시온이 아니라 링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링의 어머니의 딜레마도 여기에 있었다) 결국 시온의 기억은 그런 식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승화했다.

각 캐릭터에게 특정적인 추억을 부여함으로서 생명력과 사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다... 발상만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방법 면으로 봐도 히와타리의 선택은 탁월했다.

키워드를 기억하는가? 일곱 명의 과학자가 가지고 있던 키워드는 단순히 달기지 작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몇배는 큰 역할을 작품 내에서 하고 있었다. 그 키워드들은 전생인들의 추억을 시적으로 표현해 독자들의 뇌리에 심어주고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을 이미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이쿠에서 힌트를 얻은 걸지도 모르겠다.

 

<모쿠렌을 영원히 사랑한다>

교쿠란 : 모쿠렌을 향한 사랑

 

<오크 다코 사놀 히이라기>

히이라기 : 자기 이름(고지식하게리 항상 자기 이름을 암호로 사용했다는 점이 책임자 히

이라기답다)

 

<엔쥬를 돌보는 건 이제 질렸어>

슈스란 : 엔쥬를 향한 걱정섞인 우정(그리고 동경)

 

<교쿠란 곁에 있고 싶어>

엔쥬 : 교쿠란을 향한 연정

 

<꿈에도 그리던 낙원을 찾는다>

슈카이도 : 맘둘 곳 없는 그에게 있어 지구와 모쿠렌은 노스텔지어의 대상이었다

 

<자이 테스 시온>

모쿠렌 : 시온을 향한 애정

 

<빨리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어>

시온 : 고독에 지친 그의 마음을 대변(어딘가 슈카이도와 닮았다. 서로 겉모습을 바꾸어

태어났듯이 극단은 닮는 걸지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히와타리는 전생인들의 기억 역시 스토리에 끼워넣어 캐릭터에 설득력을 더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전생인들의 이야기도 이 작품의 한 축이고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일단 전생의 기억은 '배경설정'에 해당되는데 좀 무리한 건 아닌가 싶다(중반부가 늘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도 대담한 표현기법으로 지루함을 상당부분 없애고 개개인의 생명력을 북돋았다. 바로 '서로의 시점'이다.

 
똑같은 사건을 얘기하는데도 서로의 이야기는 다 다르다. 누구나가 해본 경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사건을 비추는 각자의 기억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견해가 일치하는 경우만큼 갈라지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초반에 진바치와 잇세이가 옥상에서 대화하는 장면 중, "글쎄? 슈카이도는 그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슈카이도가 그래봬도 교활한 놈이었어. 내가 기억하기론"이라는 대사가 나오는 데서 감탄했었다. 서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시점이 다르다는 문 드림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절한 대사가 있을까? 이런 식으로 작게나마 시점의 차이를 암시하는 장면을 꼼꼼히 끼워넣던 히와타리는 전생의 기억파트에서 급기야 시점에 따른 장면변화를 시도한다. 모쿠렌의 첫미팅이나, 샤워소동을 상기해보면 웃음을 터뜨릴 분이 많으실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이렇게 비치지만 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본인밖에는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변화를 생각해낼 정도로 자신과 타인과의 거리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캐릭터성을 그토록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스토리의 근본적인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모쿠렌과 시온의 사랑은, 분명히 그것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일그러져 갖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환생자들마저 휘두르는 결과를 낳았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선은각자의 시점에서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그래서 독자들은 그들의 오해에 안절부절 못하며 끝내 모쿠렌의 사망씬에서 눈물을 쏟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픔많은 사랑일지언정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모쿠렌에게 지구가 보여준 마지막 기적... 환생이 가능한 세계관 속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를 향한 희망은 서로 얽혀서 결국 시간의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래로 돌아가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토록 그리운 것'이다. 모쿠렌의 마지막 메시지 역시 시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그리움, 아무리 곱씹어봐도 질리지 않는 명대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모든 사건은 끝나고, 전생의 추억은 승화되었다. 링은 링으로, 아리스는 아리스로 살아나가는 것이다. 시온과 모쿠렌의 노스텔지어로 둘러싸인 지구에 안겨서. 시온과 모쿠렌은 죽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링과 아리스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세대를 이어 지혜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라 한다. 굳이 환생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나가는 것이다.

 


"이상하군... 태어나서 단 한번도 저녁놀 따윈 본 일이 없을텐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저녁놀을 주욱 지켜봐온 선조들의 피가 내 몸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By 마키무라 <불새 망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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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죽음을 부르는 물고기, 바나나 피쉬
바나나 피쉬 1
요시다 아키미 지음, 류임정 옮김 / 시공사(만화)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바나나 피쉬"란 만화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우연히 알게 된 모 사이트의 (현재는 역사 선생님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운영자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닉네임이 애쉬(Ash)였다. 영어 '애쉬'는 타다 남은 재란 뜻과 물푸레나무란 뜻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애쉬는 만화 "바나나 피쉬"의 애쉬 링크스였다. 전에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공중화장실과 목욕탕을 제외하고 문화의 장르 분화에서 만화처럼 확실한 성(性) 구분이 있는 것도 드물다. 아무리 잘된 순정만화라도 어지간해서 남성들이 보는 일은 드물고, 여성들이 선호하는 장르 역시 남성 만화 애호가들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만화의 이런 성별 구분 역시 모호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시다 아카미의 "바나나 피쉬"는 유니 섹스 모드의 만화다.

장르(genre)란 무엇인가? 본래 장르란 생물학에 쓰이던 용어로 종(種) 다음에 오는 ‘속(屬)’의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한다. 그것이 문학. 예술 분야로 옮겨지면서 부문, 양식, 형(型)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이 중에서 한자 "형(型)"은 '거푸집'이란 뜻에 유의해보야 하는데, 이것은 현재 사용되는 장르 영화의 중요한 속성이 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영화 문법에서 장르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것은 시나리오 문법상의 캐릭터 형성과 거의 맞먹는다. 그 이유는 바로 장르가 제품을 찍어내는 거푸집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구조)를 갖추게 되고, 상업대중문화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할리우드 영화문법은 좀더 대중적인 기호와 취향, 구미에 맞는 이야기구조를 발견해낸다. 다시 말해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구조가 무엇인지 영화자본과 제작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의 욕구와 기호에 맞는 이야기구조로 분화되어 정착한 것이 바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멜러, 액션, 서부극 등은 모두 하나의 문법 체계 안에 있으므로 관객들은 마치 캠벨 수프(Campbell Soup) 통조림 캔에 각인된 토마토, 치킨, 감자, 양송이 등등 자신의 기호에 맞는 영화 티켓을 예매하면 된다. 이것은 영화자본과 대중 사이에 체결된 일종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8금(禁)" 이하의 등급을 받은 영화에선 절대로 섹스, 살인, 강간 등이 여과없이 보여지지 않는 것처럼 장르 영화들은 각각의 문법을 통해 관객의 취향에 영합 혹은 배려함으로써 영화자본은 흥행의 안전성을 보장받고, 관객들은 취향과 선택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영화연구의 초창기엔 이런 장르영화들을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대량생산된 제품이라 하여 폄하했고, 이런 문법에 충실하지 않은 이들을 '작가주의'라 불렀다. 그러나 작가주의 비평가들은 이런 장르 영화 안에서도 작가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장르 = 신화"라고 생각하는데, 구조와 의미의 구축이란 면에서 이 둘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요시다 아카미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특이한 만화작가라 할 수 있다. "바나나피쉬"에 등장하는 인물 캐릭터는 순정만화의 그것인데 비해서 "바나나피쉬"의 내러티브는 액션 만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혼재 혹은 하이브리드는 오늘날엔 매우 흔한 것이 되었다. 사실상 이런 하이브리드적인 요소들이 도입되기 시작한 계기는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그 기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스타워즈"에서 온갖 신화들의 흔적, 장르의 흔적들을 발견해낸다. 요사이 제작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이런 장르의 이합집산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해진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고, 남성, 여성은 물론 각 장르의 취향을 가진 이들을 골고루 만족시키기 위한 상업적 고려와 계산이 뒤따른 것이다. 이는 영화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나나피쉬"는 1985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의 "별간 소녀코믹"에 연재되어 일본에선 상당한 인기를 누렸으나 국내에선 해적판 출판만 몇 번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 완간되지 못했다. 요시다 아카미의 "바나나 피쉬"가 국내에서 일반 독자들의 호응을 널리 받지 못한 것은 "바나나 피쉬"의 이런 하이브리드 경향이 대중의 코드에 아직 제대로 접속하기 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대신에 "바나나 피쉬"는 저주받은 걸작까지는 아니어도 소수의 매니아들에게 재발견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터넷상의 만화 매니아들은 자체적인 능력을 동원해 완간되지 못한 만화의 뒷부분을 번역하고, "바나나 피쉬"의 여러 면모들을 소개했다. 

"바나나 피쉬"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신종 마약의 이름이다. 만화의 도입부는 음모 영화의 도입부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 베트남전에 이른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클레멘타인을 부르며 휴식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병사가 M-16소총을 들고와 난사한다. 그의 친구 맥스 로보가 하반신을 쏘아 간신히 진정시키지만 그는 "바나나 피쉬"란 의문의 단어를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다운타운을 장악하고 있는 애쉬 링크스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우연찮은 기회에 살인 장면을 목격한 애쉬 링크스. 살해당한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소량의 약이 담긴 앰플을 넘긴다.

애쉬 링크스. 다운타운의 삵괭이들을 이끄는 리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해보이는 외모에 금발 미소년, IQ 200을 상회할 만큼 뛰어난 두뇌에 많은 량의 독서, 뛰어난 컴퓨터 조작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처음부터 그런 인물이란 것이 드러나버렸다면 이 만화는 그리 재미있지 않았을 텐데, 작가는 필요한 부분마다 조금씩 이 소년의 능력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작가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애쉬의 총 솜씨다. 사용하기 편하게(은밀히 감추거나, 뽑기 편하게) 짧게 자른 총신의 스미스&웨슨 38구경 리볼버를 귀신처럼 다룬다. (리볼버는 자동권총에 비해 방아쇠 압력이 높은 편이라 초탄 명중률이 낮고, 장탄수가 적어 사용하기엔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가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냉정하기 그지 없는 두뇌를 지닌 인물이기만 하다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거다. 그는 8살 때 강간당하고, 그때 첫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그는 아동 포르노 무비의 주인공으로 이용되며 성학대를 당한다.

이야기는 후반부로 흐를수록 코르시카 마피아와 미국 정부 당국까지 연계된 거대한 음모로 이어지고 다시 애쉬의 가정사와 연계되면서 그가 어째서 "바나나 피쉬"의 정체를 추적하게 되는지,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 "바나나 피쉬"는 내러티브가 있는 장르에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나나 피쉬"의 내러티브 자체는 매우 흔한 것이지만, 그 이야기를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애쉬가 이끌어간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상승효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동성의 친구 에이지. 요시다 아카미는 "바나나 피쉬"에 야오이적인 요소들을 대중적인 시선에 맞춰 적당한 강도로 저감시켜 등장시키고 있다.

야오이 장르의 등장은 일본에선 이미 1976년 타케미야 케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에서 동성애뿐만 아니라 근친상간까지 다루며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만만치 않다. 야오이란 "야마나시(やまなし), 오치나시(おちなし), 이미나시(いみなし)"란 말(주제없고, 소재없고, 의미없다)의 약어라고 하는데, 그 의미 자체가 매우 반문화(counter culture)적임을 알 수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란 성격에서 느슨한 형태의 사회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야오이 문화에 대한 찬반을 떠나 그 자체에  남성지배문화, 가부장적 권력 형태에 대한 저항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할렘의 여성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규방반란이라 할 수 있는 야오이는 우리나라에서 젊은 층의 여성들(1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야오이는 근친상간, 동성애, 강간 등 현실 장르 안에선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므로 체제 안의 장르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야오이의 생산은 대개 프로에 근접한, 혹은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들에 의해 생산된다. 이런 야오이의 자생성은 상대적으로 사회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와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야오이의 특성과도 잘 부합된다(야오이 문화에 대해선 나중에 좀더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어찌되었든 "바나나 피쉬"는 아동 성학대, 동성애와 "에이지"란 소울 메이트의 존재 등으로 야오이적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복잡한 이야기의 대단원을 매듭짓기엔 다소 약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또한 그만큼 적절하기 어렵다는 평을 얻을 수 있다. 동네 갱들부터 시작해서 코르시카 마피아, 차이나 마피아, CIA,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용병들과의 대결에서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남은 애쉬는 뜻밖의 일격으로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이거 스포일러인가?). 애쉬의 죽음은 그만큼 뜻밖이고,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하지만 작가 요시다 아카미는 시종일관 애쉬의 죽음에 대한 복선을 여러 군데 설치해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보면 애쉬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청춘이 불멸인 까닭은 그것이 인생의 매우 짧은 시기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요절한 청춘 스타들을 길이길이 기억하는 것이다(*일설에는 "바나나 피쉬"가 할리우드의 영화로도 만들어질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영화의 주인공은 "리버 피닉스"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기사 그가 아니라면 누가 애쉬 링크스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혜성처럼, 섬광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연민으로 말이다. 애쉬는 죽음으로 에이지의 우정(혹은 사랑)을 영원히 차지하게 된다. 액션만화의 뒷처리로, 순정만화의 뒷처리로 이보다 적절한 선택도 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바나나 피쉬"는 액션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그 본질은 순정의 문법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만화의 또다른 문법인 그림체와 칸 구분 등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액션 만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칸의 격자 구조를 탈출하듯 역동적인 연출은 이 작품에선 거의 볼 수 없고, 시종일관 차분한 프레임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액션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액션 그 자체가 아닌 캐릭터에 집중하게 된다. "바나나 피쉬"에는 할리우드 여성 감독들 "미미 레더, 캐서린 비글로"의 액션영화들에 숨겨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체취와 이면에 잠재된 여러 코드들을 따라가며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아, 끝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바나나 피쉬"는 J.D.샐린저의 작품 아홉개의 이야기(Nine Stories) 중 첫번째인 "A Perfect Day For Bananafish"에 등장하는데 바나나피쉬는 구멍에 들어갈 때는 보통 물고기처럼 날씬하지만 구멍 속에 있는 바나나를 엄청 먹어버리고 살이 쪄서 결국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라 한다. 어쨌든 바나나피쉬를 보면 죽게 된다는 이 설정을 놓고 보았을 때, "바나나 피쉬"의 "애쉬 링크스"에게 바나나 피쉬는 "에이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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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dts, 2disc) - 할인행사
마이클 베이 감독, 벤 애플렉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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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는 접해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특별히 내가 들어왔던 부정적인 평가가 진주만에 대한 내 생각의 근거가 된 것은 아니다. 내가 실제로 접한 진주만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 영화는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자 했다. 그 결과 엄청나게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스토리에 관객을 몰입시킬 수 없었으며, '재미는 없는게 길기는 더럽게 길다'(딴지일보)는 평도 받았다.

몇 가지만 생각해보자. 먼저 진주만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진주만이 여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 전에 사랑 이야기의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이에 두 친구의 우정 이야기도 그려야 했으며, 브리티쉬 항공전 이야기도 진주만 이전에 나왔다. 그리고 진주만이 끝난 이후에는 이듬해의 도쿄 공습 이야기도 들어가야 했고, 그 와중에 우리의 여주인공은 친구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정신없이 갈팡질팡한다. 그렇게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여주인공이 이해되기는 커녕 대체 몇 번이나 남자를 바꾸는 건지 어이가 없다.

아래 분의 마이 리뷰에서는 전쟁이 아니라 멜로물이라고 했는데, 이건 최근의 전쟁 영화의 기본적 추세이다. 무슨 말인즉 하니, 예전의 전쟁 영화는 전쟁 자체가 배경인 동시에 주제였다. 전쟁 속에서 인간성의 상실, 병사들이 느끼는 기본적인 공포 이런 것들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소재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최근에 발표된 전쟁 영화들에서 전쟁은 그야말로 배경에 그치고 있다. 다만 그 배경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이 전쟁 영화의 범주에 들어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블랙 호크 다운'은 단순히 전쟁 영화같지만 미군의 기본적인 정책 중 하나인 '조국은 너를 버리지 않는다'를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보다는 블랙 호크 다운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포로가 되었든 시체가 되었든 기필코 구하러 간다는 것이다. 한 명을 집에 보내기 위해 일곱 명이 사선을 넘어야 하는 정당성은 여기에 있다. 베트남전에서 버리고 온 미군 유골을 최후의 하나까지 찾아내는 그 집념은 미군 병사 개개인에게 항상 국가가 그를 보살피고 아낀다는 점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요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한국 전쟁은 배경이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배경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의 형제애, 민족 분단의 비극이 더욱 가슴 깊숙히 다가온다.

진주만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로는 '도라 도라 도라'가 있다. 이 영화의 배경과 주제는 모두 진주만 공습이다. 이 영화는 어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넣기 보다는 차라리 진주만 공습 자체에 충실했다.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을 이용한 공습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 일본, 어처구니 없이 선전포고 시간을 놓친 일본대사관의 실수, 안일한 자세로 아무 방비를 세우지 못했던 미국의 이야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화이다. 그에 비해 이 영화는 제목이 진주만이면서도 진주만을 배경으로 다른 이야기를 잘 살리지도, 그렇다고 진주만을 잘 살리지도 못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은 진주만 폭격장면이 아무리 멋있으면 뭐하겠는가. 그곳에서는 기껏해야 두 친구의 맹활약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용감한 미군 병사만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온갖 잡동사니 같은 이야깃거리를 4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에 대충 비벼넣은 후에 미국 만세라는 양념으로 마무리를 지은 잡탕 정도에 불과하다. 30분 정도의 멋진 장면은 먹음직스러운 외관 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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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Vol.1+2 박스세트 Fullscreen Edition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비 콜트레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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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시리즈는 확실히 대박을 터뜨린 책이다. 월셋방을 전전하던 가난한 이혼녀 조앤 롤링은 이제 엘리자베스 영국여왕마저 제치고 영국 제1의 여성 갑부가 되었다. 이 시리즈는 수십 개국에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의 독자를 거느린 새로운 대작으로 자리매김 했다. 인기있는 책은 영화화한다는 기본적인 법칙에 따라 이 책 또한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영화관에서 만난 해리포터는 책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느끼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책과 영화는 다른 법이다. 책에서는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는 주변 묘사도 영화에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 두 페이지를 읽을 시간 동안 - 소개하고 있을 틈이 없다. 기껏해야 몇 초, 그 시간 안에 책을 읽었을 때 받을만한 그 느낌을 보여주어야 한다. 책에서 주인공의 의도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해도 영화에서 표현하는 방법은 그와 다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러닝타임이 120분에서 길어야 180분에 끝나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책과는 다른 시간상의 제약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책의 요약본이 될 수는 없다. 요약본은 어디까지나 요약본일 뿐이다. 영화는 요약본이 아니라 그 전부여야 한다. 영화를 보고 해리포터를 이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각색이 필요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책으로도 영화로도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기본 줄거리와 중요한 장면들은 확실히 일치하지만 그 외의 장면들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거나, 아니면 내용이 바뀌어 있다. 책과 영화가 이야기와 감동을 전달하는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 책은 상상력에 의존하지만 영화는 시각과 청각에 의존 - 영화는 시간상의 제약을 받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책과 같은 완전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 포터 시리즈는 그 각색에서 실패한 작품이다.(적어도 1, 2편은 그렇다. 3편은 그런 점에서 이전의 작품에 비해 훨씬 발전했다.)

한 가지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론과 헤르미온느, 해리가 마법사 체스와 맞닥뜨리게 된다. 누군가는 체스를 두어야 하고 누군가는 말이 되어야 하는 그 상황에서 론과 헤르미온느는 주저없이 말이 된다. 말이 되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이 쉽게 나올 수 있을까? 해리를 믿기 때문에라고 해도, 그건 해리가 주인공이니까라는 치졸한 변명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라곤 기껏해야 론과 해리가 체스를 두는 한 장면 뿐이다. 책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그 전에 복선을 깔아두고 있다. 휴일 내내 호그와트에서 론과 해리가 마법사 체스를 두었고 해리는 마법사 체스에서만은 매우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책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복선으로 작용했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그 상황을 납득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사실 필사적이지도 않다)

영화는 책에 있는 모든 내용을 담고 싶어한다. 그 결과 모든 사건에 짧은 시간만 배분할 수 밖에 없었다. 해리포터(영화)에는 이야기 진행의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필요한 것은 복선이지만, 실제로 있는 것은 변명이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데? 라는 질문에 그래서 5분 전에 1분짜리 복선을 보여줬잖아 라고 얘기하는 것이 영화다.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것에 시간을 제대로 할애하지 못한 게 1편이다. 해리포터 1편은 특히나 상상하던 책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반 볼 가치가 없는 영화이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도 또 상상을 필요로 했다. 대충 훑고 지나가는 내용에서 '아 책은 이렇게 이렇게 설명했었지'라면서 말이다. 영화는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이상 그 영화는 독립적인 작품이다. 영화 자신이 책에 의존해서야 그건 독립적인 작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1편과 2편은 책에 대한 의존이 너무 심하다. 그런 까닭에 해리포터 1편과 2편을 좋은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책과 함께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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