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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덧글답니다 ^^; 확인차....(확인을 하게 될런지, 전혀 새로운 답변을 듣게 될런지 모르지만)
제가 몇개의 문장을 적고, 그것이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나온 것인지 인식론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인지 적어볼께요.
디오스 광고를 보고
내러티브-디오스의 광고에는 붉은색 냉장고, 딸기 여배우의 붉은 색 립스틱이 등장하며, 여배우는 냉장고 옆에서 무척 행복해 보인다.
인과론적-디오스의 잡지광고의 카피에는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좋아함'을 받아야하는, 그래야 '행복해 진다'라는 남성적인 이데올로기가 강조되어 있다.
위의 예에서는 내러티브의 관점과 인식론적 관점을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었는데요....
영화 '엘리펀트'를 보고
1. 내러티브-무차별 살상을 하기 전 두 소년은 샤워중 키스를 한다.
2. 내러티브-게이인 두 소년은 살상의 막이 오르기 전 키스를 한다.
3. 인과론적-두 소년이 살상전 키스를 했기 때문에 그들은 게이이다.
4. 인과론적-무차별 살상전 두 소년의 키스를 동성애적 코드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모든 서술을 인과론적 관점, 혹은 내러티브의 관점으로 생각해 본다는 것에 무리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생각중...
제가 보기에는 2번 문장과 3번 문장은 바라보는 관점만 다르지(이 점이 무지 중요하지만), 내용은 같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내러티브와 인과론은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일 뿐, 비슷한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머릿속에 또 제 꼬리를 문 한 마리의 도마뱀이 출연했습니다. 내러티브는 인과론을 담고 있고, 인과론은 내러티브를 담고 있고... 아니야.... 1,2번이 내러티브가 아닌가? 방식을 말하고 있다기에는 무린가? 아~~ 모르겠다. 머리 안돌아가는 아침에 수업준비 안하고 뭐하고 있지? 그래도 답글 부탁드립니다.^^;    -내 질문-

아~~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도 같고.... 내러티브는 하나의 이야기(전개방식)이라고 했는데, 저는 그 내러티브를 이루는 구성요소(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중 하나를 문장으로 하나 '띡' 써놓고는 그것을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를 거론한 것 같아요.(특히 영화 '엘리펀트'를 예로 들었을 때)
내러티브와 내러티브 차원의 해석은 다른 것이겠지요. 그 전개방식에 흥미를 가지고 영화를 바라보는 것....
예를 하나 든다면...(와~~ 오늘 참 예도 많이 든다^^)
영화 '엘리펀트'를 보고.
미국을 대단히 놀랍게 할 살상극이다. 하지만 그 살상은 예고도, 심지어 작은 기척도 없이 일어난다. 외모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학생. 다이어트를 하는 치어리더들. 왕따를 당하는 학생. 학교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는 학생. 씨알도 안먹히는 고리타분한 말솜씨와 권위주의적인 교장. 모두 우리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날씨는 또 얼마나 화창한가. 따스한 봄날씨이다. 그곳에 형제는 총을 매고 들어가는 것이다. 관객들은 평범함이 총부리 아래에서 무참히 쓰러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데 영화속 당사자들은 태연하게 총알을 대상이 보이는 대로 날려댄다. 마치 그것이 일상인 것처럼...... 평범인 것처럼......    -어리버리 또 내 글-

디오스의 예; 연출자는 소비 욕구를 자아내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음(전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종의 전략(행복해 하는 여자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나름대로의 전개 방식(내러티브; 붉은색 냉장고, 딸기 여배우의 붉은 색 립스틱)을 설정한다

엘리펀트의 예; 3과 4는 인식론적 관점에 해당하는 예가 맞음. 1과 2는 그 자체로 인식론도 내러티브도 아니다. 영화 감독이 1이나 2와 같은 장면을 구성한 것은 나름대로의 의도가 전제되어 있는데, 그러한 의도와 관련해서 1과 2를 설정한 것을 해석하는 것이 내러티브다. 예를 들면, 감독이 '무차별 살상에 임하는 사람의 심리를 암시하기 위해 장면 1을 설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장면 1은 살상자의 심리를 드러내는 내러티브가 된다.

정리하면, 사람들의 매트릭스에 대한 관심은 인식론적 관심과 내러티브적 관심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가상과 실재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후자는 가상과 실재와는 무관하게 가상과 실재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가?(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틀이 무엇이고, 가상과 실제의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으며, 어떤 구성과 어떤 설정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석되어지는지 등에 대한 감독의 선입견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 관심을 갖는 것으로 구분된다.   -교수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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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_jazzy 2004-09-13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알겠다. 아~~ 개운하다.
 

내러티브라는 용어가 유행한다. 이야기? 아니면 사건의 전말과 국면을 실감나게 전개(이야기)하는 것 정도로 번역이 될 수 있다. 난데없어 보이는 내러티브를 꺼내 든 이유는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해석할 때, 기존에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매트릭스의 주제를 가상과 실재의 혼란 즉, 무엇인 실재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실재라는 진실을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한다.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빌리자면, 사막의 진실(the truth of the desert)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매트릭스를 인식론(무엇인 참인지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굳이 매트릭스에 기대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사실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매트릭스를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음의 예를 들어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어떤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는 아무런 반응(흥미, 의미의 부여, 의심 등)을 유발하지 못한다. 이미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구의 세계에서 반응은 없다. 반응은 진실에 대한 유혹에서 비롯된다. 매트릭스가 관객들의 반응을 유발하는 것은 그 속에 진실을 추구하려는 인간 심리를 자극하는 혼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사막의 진실이지."라고. 이들은 매트릭스를 인식론의 관점, 그것도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에 비해 내러티브의 관점에서는 이야기의 내용(인식론의 관점)보다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앞의 예를 빌자면, 설사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전개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짓말에 반응하게 된다. 아니 역으로 말하면, 실제 우리는 많은 경우에 거짓말인줄 알고 있는 경우에도 그 말에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이는 거짓말이 말해지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반응은 내용이 아니라 방식에 관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매트릭스가 관객의 반응을 유발하는 이유는 가상과 실재라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가상과 실재가 다루어지는 방식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일상을 반성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친구, 가족, 동료 등)들에 대해 지금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남편은 이런 저런 사람이야. 그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이러저러한 것이야. 어제 일어난 일은 이러저러하지. 등 등" 마치 사실을 알고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잠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사실이라고 알고 말하는 것들은 관련된 몇몇의 파편을 자신의 믿음과 경험에 의존해서 스스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 또한 이러하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는 실제로 만들어진(재구성) 수많은 개인적 집단적 세계가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다. 매트릭스에서 인공 지능(컴퓨터)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세계가 오히려 우리가 실재라고 믿고 있는 현실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예측이 가능하다.

우리는 실재라는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가상)와 진실(실재)이 말해지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 내러티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질문이 곧 내러티브다"라고.      -지도교수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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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혼자서 무지 헷갈려 하고 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는 내용과 방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돌고 있습니다. 고리가 한군데서 탁 풀렸으면 좋겠는데 명확하게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는 질문이 내러티브인 이유는 그 질문이 위의 글에 마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질문이기 때문인가요?
또! 저에게 매트릭스는 가상의 너머에 실재가 있다고 말하는 영화로 읽힙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기호들이 춤추는 허구라고 보는 저에게는 그 매트릭스의 (내용)이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 매트릭스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허구와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인가요?  -내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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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님께;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는 질문은(질문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 즉, 내용에 관심을 갖는 질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내러티브를 부정하는 질문으로 볼 수 있다(그래서 혼란을 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차적으로 이 질문은 내러티브를 주장하는 글을 대하는 불특정인들이 글을 마주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즉, 일종의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질문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러티브는 다른 것(예를 들면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은 이유가 내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내러티브에도 들어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녁님의 혼란스러움은 의미(내용)에 정초하는 관점에서 빌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상(글)을 의미의 관점에서 대하는 것은 일종의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 사람의 내러티브를 읽게 해준다. 따라서 저녁님의 혼란은 의미의 진위 또는 명석에 관심을 갖는 내러티브의 단상을 보여준다.

또한 저녁님의 ' 매트릭스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허구와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매트릭스를 해석하는 전형으로 보인다. 이렇게 매트릭스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접근이 적극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매트릭스에서 인식의 문제를 다루어가는 방식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질 수도(가질 필요도) 있으며, 그 순간 우리는 내러티브에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내러티브의 세계에서는 진위(내용)보다는 방식(구성)이 전경이 되어, 다른 의미(내용적 의미가 아니라 메타적 의미)을 구현한다. 같은 방식으로, 앤 셜리님의 관찰자 선택을 의미(내용; 왜 그러한 선택을?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현상(원글과 덧글의 직물짜기 과정)에 대해 어느 순간 자신이 반응하는 방식을 보여 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지도교수님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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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체코-프라하>

왜 평소에 잘 하지 않았던 '기대'라는 것을 했던 것일까?

여행 5일째, 거의 모든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불편함도, 멋진 건축물도, 괜시레 친구에게 내는 투정과 짜증도...... 멋지고, 한적하거나 복잡한 거리는 나의 오감에 부딪치나 스며들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지친 몸을 왠지 모를 의무감에 끌고 나가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극찬을 하던 건축물들도, 낭만도, 시인 최영미가 느낀 '우울'도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관광객들의 그 활기찬 모습, 덩달아 따라오는 복잡함과 더러움을 느꼈을 뿐이다.

여행객들로부터 극찬과 최악의 평가가 동시에 나오는 도시 프라하. 극찬은 멋진 건물들과 싼 물가에서, 최악의 평가는 잔인하도록 서러웠던 현대사에서 나온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가난했던 지난 세월을 우리는 기차역의 오줌냄새에서 느낄 수 있었다. 독일의 청결함에 그새 익숙해져있었던 우리에게 낯선풍경으로 다가왔다. 코인락커는 도난 사고가 빈번하기 때문에 여행 전부터 사용하지 말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터였다. 구걸하는 사람들의 행색마저 독일의 걸인과 차이가 났다.

그렇다. 나의 눈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과거가 남긴 화려한 유적을 읽는 재주는 별로 신통치 않지만, 그 곳에서 그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프라하를 읽었다. 지나가다 슬쩍 본 화려한 차림의 중학생처럼 풋풋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위험스러워 보이는...... 아~~ 지금의 나를 프라하에 투영해서 보는 것일까....

이렇게 우울한 글을 올리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나날들


 

 

 

 

 

 

 

 

 

 

 

 

맥주 먹고...


 

 

 

 

 

 

 

 

 

 

 

또 먹고


 

 

 

 

 

 

 

 

 

 

 

 

 

 

 

 

 

 

 


 

 

 

 

 

 

 

 

 

 

 

 

 

 

 

 

 

 

 

와인도 먹고...

이 게으름뱅이가 걸음좀 걸었다고 피곤했는지 한두잔에 술기운을 느끼기도 했지만 줄기차게 먹어댔지...
 
이 외에도 아이스크림, 피자가 맛있었던 여행....
 
 
 결국 하루만 따로 다녀보자는 나의 제안을 이해하고 배려해준 친구. 너무 고마웠다.
또!! 내 심통도 받아주고,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 나도 모르는새 찍어주었다. 사진을 뽑고보니 새삼 고맙더군.....

 
 
 
 
 
 
 
 
 
 
 
 
 
 
 
 
 
 
 
 
 
 
 
 
 
 
 
 
 
 
 
 
 
 
 
 
 
 
 
 
 
 
위 장문의 글을 쓴 장소인 체코.... 그곳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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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의 2쯤 읽었나?

공부하러 간 도서실에서 시간없어 반납하지 못한 책을 잠시 붙들고 있었는데

그만 그 소설책만 읽다가 밤 10시를 맞고 말았지 뭐야.

그나마 다 읽지도 못해서 너무 서운...

에잇! 사서 읽어야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다시 찾아 온 사람. 그 장소 파리.

자신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 장소,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 자신과 여행하는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 괴로움으로 들린다.  이 책을 다 읽고도 그런 목소리로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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