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남들처럼 괴롭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혹한의 눈보라 속에 미소를 지으며 죽음의 잠에 빠져들려는 조난자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했다. 죽음은 평온하고 다정하며 삶은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가득하다. 어느 쪽을 선택할 거냐고 할 때 스스로 고통에 몸을 맡기려는 짓은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가. 그 누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을 의지가 약한 패배자라고 손가락질하며 나무랄 수 있을까.
지금 난 내가 늘 원했던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대부분 내 이름조차 모르는 곳에서의 삶, 그래서 얼마간 내 마음 내키는대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삶. 그런 상황이 되면 행복감, 희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 등이 찾아오리라 생각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 P126
그 겨울이 천천히 지나고 찾아온 봄. 내게는 길고 긴 시간이었다. 지은에게는 아닐 것이다. 알면서도 바라고 있다. 그만 잊어버리기를. 틈만 나면 베란다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 눈으로 보는 십일층 아래 저 아득히 먼 땅이 문득 가깝게 느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나에게도 몇 번이고 그런 순간이 있었다. 뛰어내리면 안아줄 것처럼 저 땅이 나를 반기는 순간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