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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 ㅣ 최인훈 전집 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독고준'은 회색인이다. 그의 성 독고를 거꾸로 하면 고독이다. 그는 이 남한의 땅에 일가친척 하나 없다. 월남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월남한 매부는 딴 사람의 남편이 되었다. 그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이 죽어 자유롭게 된 니체처럼 가족이 없어 자유롭게 된 독고준. 그러나 그는 구속되어 있다. 돈에, 사상에, 대중에 구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혼란하다.
갈팡질팡 회색인,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북한 출신으로 남한에 산다. 적대적인 두 지역에 존재기반을 다 갖추고 있으면 회색주의에 물들기 쉽다. 인지적으로 부조화를 싫어하는 탓이다. 어린 시절 정치적 왕따의 기억은 그의 정체를 드러내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 또 다른 회색의 증거로 여자관계다. '김순임'과 '이유정', 신실한 기독교인 김순임에게 정욕을 느끼고 전위 화가인 이유정에게 이성(理性)를 느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의 처녀상은 어린시절 방공호의 나나와 대북방송 아나운서이다. 방공호의 나나는 김순임으로 대북방송 아나운서는 이유정과 대치된다.
독고준에게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는 전후 지식인을 볼 수 있다. 독고준의 안티로서 선명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김학과 현호성이 있다. '김학'은 혁명을 주장하고 '현호성'은 기득권을 대표한다. 도식화하면 김학은 대중과 일인일표의 정치를 현호성은 개인과 일주일표의 경제를 상징한다. 회색인 독고준은 사고는 김학에게 물질은 현호성에게 신세진다. 강력한 두 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이 최인훈이 그리는 회색 지식인이다. 8장 국파촌옹(國破村翁) 황선생의 일갈이 소설의 엑기스다. 스토리텔링은 무시하는 것이 소설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