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찌기 영화의 지명도 때문에 영화가 궁금했는데 테잎을 구할 길이 없어서 책을 보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와 뮤지컬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을 지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결말이 더 아쉽고 더 애틋했고 더 아팠다.

대학 1학년때 서울대 남학우가 학교에 와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준수한 외모의 그 학우는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언어로 자신을 소개하여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난 후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노라고 밝혔다. 한가지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자신의 애인은 군대에 가 있다는 사실. 작년 한해 성을 바꾸고 연예계 데뷔에 성공한 아름다운 하리수 덕분에도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도 멀쩡한' 그들을 만나고 난 후에야 homosexuality 나 bisexuality 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줄이게 된다. 하지만 동성애도 사랑의 한 종류일 뿐이다. 소수자라는 이유로, 다수의 사랑의 방식에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매도될 수는 없다.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동성연애자인 몰리나 그리고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이성적인 정치범 발렌틴, 어떤 구원도 없을 것만 같은 그 공간에서 몰리나가 본 영화 이야기를 공유하는 그들에게 영화는 내일이고, 또 삶의 연장선이었다.

음식물에 넣은 독극물로 설사를 해서 침대시트를 다 더럽히고 괴로움을 겪는 발렌틴을 위해 다정하고 친절하게 도와주고,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기 위해 간부에게 거짓말을 하며 푸짐한 음식물을 받아가지고 가며 즐거워하고, 영화 이야기에서 유독 여자의 의상이나 머리 모양 등의 묘사에 탁월하고, 톡톡 튀며 삐지면서도 애교스러운 몰리나는 사랑스러운 인간, 사랑스러운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가 게이라는 이유로 동정받거나 기피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누가 분명히 들 수 있을까.

고문 때문에 몰핀을 투여받은 후 환각에 빠진 상태에서 발렌틴은 이성애자로서 사랑하고 있던 마르타를 끊임없이 부르고는 있었지만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거미 여인으로서의 몰리나와 마르타를 넘나들며, 그동안 들었던 영화이야기들과 몰리나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을 재조합해 자신만의 환상의 스토리를 완성한다. 이 부분은 정말 뮤지컬로 본 듯 장면이 눈에 선한데, 책 붙들고 마구 울었다.

기성사회의 금기에 맞서 있었던 동성애자와 정치범이었지만, 그들은 결국 이용할대로 이용당하고도 변태라는 기성사회의 잣대로 쉽게 재단되고 잔인하게 고문받아 마땅한 극악한 정치범으로 판명되어 세상의 벽에 좌절되고 나가 떨어진다. 키스를 하면 표범으로 변하는 여자의 이야기. 독일 장교를 사랑하는 프랑스 여배우 이야기. 못생긴 하녀와
상처를 입은 젊은이의 사랑이야기. 시골처녀와 비극적인 오해로 죽게되는 청년의 이야기. 좀비가 살고있던 섬으로 시집을 갔던 여자이야기. 가상무도회에서 만났던 청년을 잊지 못하는 여배우 이야기.

무언가 결핍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던 몰리나가 들려주었던 그녀에게 투영된 영화들은 내게도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사랑이야기를 읽고 내가 울 수 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