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시선 121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어떤 것을 배우듯(설령 그들이 편견에 절어 있더라도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적어도 할 수 있다) 20대에 바라보는 서른살을 노래하는 책들은 어떤 해답을 미리 보여줄 것만 같아서 궁금하다.

94년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난 고3이었고, 그때는 별 관심도 없었던 이 책을 이제 20대 후반에 들어와 읽으면서 왜 그때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었는지 알 것도 같다. 당시로서는 과감하게 성적인 이미지를 시에 도용하였다는 것도 이슈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방송인같은 여자들이 자신의 자랑으로 도배를 하면서 오히려 우습게 여겨지는 여성에세이들 보다 그녀의 시에서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삶을 향한 거침없는 자유를 맛볼 수 있다.

본 적도 없고 그렇기에 상상할 수도 없는 낯선 이름의 나무와 풀과 꽃에 대해서 노래한 다른 시들보다 김용택 시인이 발문에 적었듯 최영미의 시들은 정말 서울여자스러워서 더 친근하다.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할말은 다하는 그런 서울여자 같다고나할까.

24시간 편의점을 소재로 새색시의 기다림에 대해서 물흐르듯이 넘어가고 낯선 자들과 가까이 있지만 결국 타인일 수 밖에 없기에 이해할 수 없는 지하철의 건조한 풍경을 중얼거리고 라디오 뉴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삶을 버티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녀의 시는 억지스럽게, 어렵게 쓰려고 작정한 듯한 시를 위한 시가 아니어서 쉽고 편하지만 가볍지 않다.

서른살이 되면, 나도 이렇게 정직하고 거침없이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시집에 있는 최영미의 시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

[사는 이유] -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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