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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86
윤의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어디서 전해듣게 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삶 속 깊이 파고 들어와 있는 전설, 어릴 적 TV에서 방영되던 [전설의 고향]을 이불을 덮고서도 조금씩 엿보며 어깨를 움추리게 만들었던 두려움의 근원은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 이전에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억울한 죽음, 무고한 죽음, 안타까운 죽음, 오해를 남긴 죽음 등 모든 죽음들은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공포를 준다. 아무리 사는 것이 거지같아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죽음은 살아있는 인간들에게는 떨쳐버리고 싶고 의식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세계이다.
이 시집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집 가운데 한 권이다. 윤의섭이라는 시인을 알기 이전에 정말 단순하게도 제목 때문에 (말괄량이 삐삐가 어쨌다는 거야,하는 생각에) 집어 들게 되었지만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어조로 시종일관 주변에 널린 죽음들에 대해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는 그의 시에 깜짝 놀라버렸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웃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웃기게 들리듯 관심없다는 듯 흘리는 이야기 속 저변에 깔린 죽음이라는 주제 때문에 읽는 이들이 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렇다고해서 비관론자들을 부추기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현재에도 계속되는 삶 속에서 찾고 있어 삶의 일부로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다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윤의섭의 시 한편이다.
[남사박] - 윤의섭
집에서 한 이리쯤 떨어진
남사박 저수지에서는 해마다 한 명씩 꼭꼭 익사했다
물 속으로 꼭꼭 숨은 뒤에 산 모습으론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해엔 시체조차 건져내지 못했고
검푸른 물 속에선 무얼 먹는지
커다란 잉어가 지긋이 배 깔고 산다는데.
어릴 적 저수지에서 헤엄치고 놀던 마을 사람들은,
물풀을 물귀신으로 믿고
섬찟 놀라 쥐가 나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은
친구들 문드러진 살국물을 조금씩은 다들 먹었고
벼농사 밭농사가 밑천이니
매년 그 물을 논 밭에 대어 왔다
익사한 사람들의 무덤은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들 무덤 사이에 놓여져
가려지기도 쉽지 않다 특별한 사망 원인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그들을 찾는 술래도 없다
조용한, 아주 조용한 무덤이다
마을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인 만큼 개발도 퇴화도 더뎠다
마을은 자급자족했다
조용한, 무덤처럼 조용한 땅
남사박에선 예로부터 나물이 많이 났고
즐겨 먹는 먹거리이기도 했다
산에도 저수지 근처에도 무덤 사이 사이에도
나물은 근근이 끼니 때울 때 무척 요긴했었다
남새밭, 이름 그대로 남사박은
무얼 먹고 자꾸 돋는지 시퍼런 나물이 매년 씨도 마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