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은수연 지음 / 이매진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사회 도처에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이 유령은 신문에서, 방송에서, 트위터에서 언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다. 울어라, 그러나 현실을 긍정하라고 설파하는 이 유령의 이름은 '힐링'이다. 어느 스님은 트위터에 올린 140자 힐링 메시지를 책으로 내 200만부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른바 스타라는 사람들도 이 유령의 캠프로 와서 사는 게 힘들다며 눈물을 흘린다. 바야흐로 힐링 전성시대다.  

 

그러나 이렇게 힐링이 여기저기서 유령처럼 출몰하게 되면 이를 이용해서 돈을 벌어보겠다는 장사치가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런 장사치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으로서의 힐링은 '자기치유'라는 본연의 그 가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린다. 장사치들은 뻔뻔하게도 현실이 어떻든지 간에 상처 입은 개인에게 마음을 바꾸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런 설교는 역겹고, 이들에 속아 넘어가 쌈짓돈을 털어 힐링을 사는 사람들은 가엾다.

 
이렇게 하 수상한 시절에 은수연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진짜배기 힐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제목만 보고 짐작하는 것은 큰 손해다. 이 책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이가 눈물과 피를 잉크 삼아 써내려간 기록이다.

 

이 책의 지은이 이름은 은수연이지만 이 이름은 필명이다. 진짜 이름을 밝힐 수 없어서 그녀는 은수연이란 이름을 택했다. 만약 본명으로 이 책을 냈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어떤 풍파를 겪을지 몰라서 그런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저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 아버지란 인간의 직업은 목사다. 그녀를 구해줄 만한 사람은 가족 중에 없었다. 그녀는 대학 1학년 때까지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은 물론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폭력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임신중절 수술을 해야 했고, 고3 때 수능을 보기 전날에는 성폭행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 물론 이밖에도 이 책에는 책을 읽는 손을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폭력적인 일화가 가득하다.  

 

그러나 저자 은수연은 이런 절망의 기록을 핏빛으로만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참혹한 핏빛 기억을 눈물로 닦아내면서, 우리에게 진정한 치유가 무엇인지, 그 치유에 글쓰기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장엄하게 보여준다. 물론 그녀 혼자 이 모든 고통을 이겨내는 내면의 투쟁을 거듭한 것은 아니다. YMCA 청소년쉼터라든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는 분들은 저자가 고통스런 감금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치유의 글쓰기를 가르쳐 준 선생님들은 저자로 하여금 고통의 기억을 담대하게 적어나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역시 아픈 기억을 딛고 씩씩하게 일어선 것은 저자 혼자의 오롯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들었던 느낌은 매우 다채롭다. 어떻게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고통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까? 나머지 가족은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학교의 교사나 경찰은 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까? 이런 안타까운 질문을 연거푸 하면서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저자의 빛나는 통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면 왜곡된 시선을 교정하게 된 것은 이 책을 읽은 큰 보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그들은 매우 처참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고, 그 상처 때문에 미치거나 자살하는 게 아니라 상처를 딛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야 할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마지막 장에서 자신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힘든 줄 모르고 힘든 시간 잘 살아준 수연아, 너 참 고맙다. 정말!" 

 

이 고마움은 독자가 저자에게 바쳐야 마땅하다. 은수연은 빛을 만나 반짝이는 눈물을 우리에게 선사해줬기 때문이다. 이 눈물이야말로 진짜배기 힐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름
파코 로카 지음, 김현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늙는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느 날 문득 세수를 마친 후 거울 속의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듯이 늙음에 대해서 가급적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이해타산적 계산을 하든지. 이를테면 노후에 어떻게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까, 같은. 보험회사의 광고들은 준비 없이 노년을 맞이하면 얼마나 비참한지 호들갑을 떤다. 늙음은 이런 두려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페인의 만화가 파코 로카가 그리고 쓴 만화집 <주름>은 표제작인 <주름>과 <등대>로 구성되어 있다. <주름>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노인 에밀리오를 통해 늙음과 노년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권유한다. <등대>는 전설의 섬 라퓨타를 동경하는 등대지기 노인과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년병과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이 두 작품의 노인 주인공은 모두 멀쩡한 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주름>에는 그러한 사실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명확하게 제시되는 반면 <등대>에서는 놀라운 결말(surprising ending)로 드러난다.

 

<주름>의 첫 장면에서 에밀리오는 은행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지점장으로만 20년 넘게 근무한 베테랑 은행원으로서 방금 자기 앞에 앉은 고객에게 대출은 무리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고객이 좀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고객은 "대출 따위 받고 싶지 않아요! 답답해 죽겠네"라고 짜증낸다. 에밀리오는 고객을 달래려고 하지만 고객은 사실 에밀리오의 아들이다.  

 

에밀리오는 70대 노인이고 퇴직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되어 아직도 자신이 은행원인 줄로 안다. 에밀리오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상 행동을 견디지 못하고 요양원에 입원시킨다. 에밀리오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에 처음 간 날처럼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아들은 요양원 직원에게 "바빠서 자주 찾아오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에밀리오는 요양원에 먼저 들어온 미겔의 도움으로 시설에 적응해나간다. 멀쩡한 정신일 때, 에밀리오에게 요양원은 견디기 힘든 곳이다. 정신을 놓고 젊은 시절의 한때로 돌아가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노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에밀리오는 그런 노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두려워한다. 요양원의 의사는 에밀리오의 그런 불안에 의학적 진단을 추가할 뿐이다. 

 

 

'늙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이야기 둘
 

이 요양원에서 가장 멀쩡한 정신으로 사는 미겔은 자식이 없다. 미겔은 오히려 자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처지가 더 낫다고 한다. 그는 교활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요양원 노인들에게 돈을 뜯어내서 모은다. 뭔가 필요하다고 하는 노인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신이 해주겠다고 하는데 돈을 준 노인들은 그 사실을 곧 잊는다. 미겔은 돈을 모아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일까? 미겔을 교활한 노인네로 알았던 독자들은 그 쌈짓돈의 쓰임새를 보면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주름>의 결말은 매우 충격적이다. 에밀리오의 시점에서 알츠하이머병이 한 인간을 완전히 집해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물론 그 장면은 매우 슬프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주름> 다음에 나오는 <등대>라는 작품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화파인 소년병이 부상을 입고 어느 등대지기에 의해 구조된다. 등대지기는 램프를 교환하지 못해서 불을 켤 수 없는 등대처럼 늙었다. 소년병은 파시스트에게 발각되면 살해될 것이기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늙은 등대지기는 소년병에게 환상의 섬 라퓨타에 대해 들려주고 그곳에 가기 위해 배를 같이 만들자고 한다. 소년병은 늙은 등대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반한다. 라퓨타에는 전쟁도 착취도 없고 더 먼 이상향으로 가는 철도가 놓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늙은 등대지기의 이야기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곧 올 것이라는 등대의 램프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 등대를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더 좋은 위치에 이미 새 등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무런 필요도 없는 등대에서 늙은 등대지기는 혼자만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병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서는 헛된 꿈을 설파한 등대지기에게 항의하지만 바로 그때 파시스트들이 등대를 점령하러 오고, 소년병은 바로 그 라퓨타 섬으로 가기 위해 만든 배를 타고 탈출한다. 늙은 등대지기는 램프 없이 등대의 불을 밝히고 등대는 곧 화염에 휩싸인다. 파코 로카는 보르헤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등대>의 마지막 부분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의 이루지 못한 꿈이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게 해준다." 

 

 

우리의 삶은 다른 누군가의 꿈을 위해 쓰일지도... 

 

만화집 <주름>에 실린 두 작품에는 노인들의 꿈이 서글프게 나타난다. <주름>에서는 에밀리오가 만나는 요양원 노인들이 대개는 젊은 시절, 한창 아름다웠던 그 시절에 집착하면서 빛나던 한 순간을 연기한다. 이를테면 아내가 "사기꾼!"이라고 귓속말로 속삭이면 빙그레 웃음을 짓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사기꾼!"이라는 말 속에는 둘의 젊음이 가장 빛나던 순간이 집약되어 있다. 

 

<등대>에서 늙은 등대지기가 꿈꾸는 라퓨타 섬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곳에 간다는 꿈이 있어 외로운 등대지기의 하루하루는 견딜 만한 삶이 되었던 것이다. 그 꿈은 결국 죽을 운명이었던 소년병에게 새로운 삶을 준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누구도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천천히 늙어가고 있다. 젊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던 병에 걸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하나 둘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떠날 수도 있다.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 더디게 마지막 순간을 향해 흐를 때 우리는 모두 각자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에밀리오처럼 자신이 서서히 누군지도 모르게 변할 때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늙은 등대지기처럼 그런 두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혼자만의 환상을 펼쳐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더라도 그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 삶은 다른 누군가의 꿈을 위해 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파코 로카의 <주름>은 늙음과 노년을 성찰할 수 있는 귀중한 텍스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타인의 마음을 알고 싶은 욕망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 속담은 타인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지 우리에게 잘 알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율배반적으로 타인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남의 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책은 '심리학'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해서 차고 넘친다. 약간의 심리학 지식을 갖추면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면 세상 살기가 참 쉬울 것이다.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은 그런 대중심리서의 희망사항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니토는 중산층 가정에서 잘 교육 받고 자라서 도쿄대학을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직장 내에서 상사는 물론 동료나 후배들에게도 두루 인기가 많다. 심지어 그는 유부남이지만 미혼 여직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그에게는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만한 상냥한 아내가 있고, 사랑스런 딸이 있다. 주위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니토의 삶은 완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살해 동기 

 

어느 날 니토는 자신의 아내와 딸을 물에 빠뜨려 죽인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누명을 썼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확실한 목격자가 있고, DNA 분석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다. 게다가 니토는 평소와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자신이 아내와 딸을 죽였음을 실토한다.  

 

이제 사람들은 살해 의도를 궁금해 한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사람들은 니토가 뭔가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살해 동기와 이유를 알면 그런 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그러나 살해 동기에 대한 니토의 대답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이 차분하게 진술한 니토의 살해 동기를 담당 형사과장을 이렇게 전한다.  

 

"피의자 니토는 책이 늘어나 집이 비좁아지는 바람에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진술했습니다. (중략) 니토의 말로는 아내와 딸이 사라지면 그만큼 집에 공간이 생기므로 책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본문 28쪽) 

 

이게 뭔가. 고작 그런 이유로 아내와 딸을 죽인단 말인가. 사람들은 니토가 허위자백을 강요받았거나 아무렇게나 동기를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이 살해 동기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한 이 소설 속의 화자인 소설가 '나'는 니토와 그 주변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르포를 써보리라 결심한다.  

 

우리의 눈도 타인의 속마음도 불투명하다  

 

주변을 탐문하면서 '나'는 니토가 옅은 미소를 항상 입가에 달고 다니는 '좋은 사람'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을 죽여 온 연쇄살인마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도대체 니토는 왜 사소한 문제의 해결로 살인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나'는 결정적인 힌트를 얻지만 곧 미궁에 빠져버리고 만다. 미궁에서 '나'는 타인이란 존재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허위의식이 아닐까 하고 반문한다. 어째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아니 어째서 이해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일까.    

 

프로파일러나 범죄심리학자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살인범의 심리를 명쾌하게 정리해 주면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저런 인간만 피하면 되겠군.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 거야. 끔찍한 범죄는 또 다시 일어나고 우리는 경악과 이해를 반복한다.  

 

세상은 늘 불투명한데 우리는 투명한 눈으로 타인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은 냉철한 시선으로 타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를 닮아가다 - 나무를 품은 목공 장인 16인의 풍경
린다이링.잔야란 지음, 이은미 옮김 / 다빈치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 '나무 장난감'에서는 소제목 그대로 나무로 만드는 작은 장난감이나 악기 등을 만드는 장인과 그들의 생활공간을 엿볼 수 있다. 2부 '나무 의자'에서는 나무로 여러 가지 가구를 만드는 프로 목공예인과 프로를 뺨치는 아마추어가 함께 소개된다. 3부 '나무 집'에서는 목조주택을 만든 사람과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나무를 닮아가다>에는 목공예 장인 16인의 작품들과 그들의 생활공간이 선명한 도판으로 들어가 있어서 한눈에 목공예 작업에 빠져들게 된다. 두 필자의 목공예에 대한 사랑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장인들의 엄격함과 푸근함이 동시에 감지된다.  

 

목공 장인들이 전하는 삶의 지혜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고 있는 무명수(無名樹) 작업실의 리원슝(李文雄) 장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작업실 이름마저 '이름 없는 나무'라고 지었을 만큼 이름 없는 나무들을 사랑한다. 

 

"시장에서 값어치가 나가는 나무는 연필 향나무·티크·전나무·삼나무·호두나무 등 겨우 몇 종에 불과합니다. 사실 '잡목'이라고 하는 것들도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특징을 지니고 있거든요."(본문 12쪽) 

 

리원슝은 그렇게 이름 없는 나무들로 숟가락부터 장부 맞춤법을 이용한 목조주택까지를 만들고 있다.                      

 

나무를 이용해 새·집·나무 등의 작은 장난감을 만드는 라오잔(老詹)은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와 가정에 충실하지만 틈틈이 남는 시간에 목공을 한다. 타이완에서 매우 높은 인기를 누리는 목공예 작가이지만 그는 매우 겸손하다.  

 

"나는 조각을 할 줄 모르며 기교면에서는 수준 미달이다. 그저 자유롭고 싶다. 그저 나무를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다."(본문 35쪽)

 

클래식 기타를 만드는 저우중디(周仲棣)는 미국 유학 생활을 할 때 학교에서 악기 제작을 교양으로 배웠다. 그는 클래식 기타 제작에 깊이 빠져들어 에스파냐의 악기 명인 호세 로마니요스의 제자가 됐다. 현재 그는 타이완에서 으뜸가는 클래식 기타 제작자다. 그는 기타를 '숲'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기타 하나를 만드는 데 10여 종의 목재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기타를 종종 숲에 비유하곤 하지요. 앞판은 흑단, 뒤판은 로즈우드 그리고 패턴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목재를 사용해요. 나무의 원산지도 제각각이지요. 마다가스카르·알프스·히말라야·유고슬라비아·인도·브라질…."(본문 44쪽)


원목 장난감을 만들면서 어린이들에게 목공 수업을 하는 다빙(大炳)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원목공예를 배우는 것이 곧 인생을 배우는 것임을 알려준다.

 

"이 일을 30년 넘게 해온 저도 잠시 부주의하면 제 손을 때릴 수 있어요. 그러나 때가 되면 울지 않겠지요. 또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인생에서 맞고 틀린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저 자기 일에 성실하다면 그걸로 살아나갈 수 있겠지요."(본문 59쪽) 

 

동그란 과자 모양의 의자를 만드는 우이원(吳宣紋)은 나무의 촉감과 여운 그리고 땀흘려 일하는 느낌이 좋아서 원목공예를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 직업의 정직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듣고 자란 돈에 대한 가치관 때문인지, 원목공예는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만질 수 있는 것이 진실하다고 느껴거든요. 그렇지만 이 일이 돈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적어도 제가 사용할 수는 있겠지요."(본문 116쪽)

 

경목공에서부터 가구 만들기를 거쳐 이 책이 다다르는 지점은 나무로 집짓기, 즉 목조주택 만들기다. 타이완의 유명한 조경 디자이너인 랴오황우(廖煌武)가 만든 목조가옥은 공원을 방불케 한다. 이 책의 두 필자는 그 집을 '나무 사이와 연못 위, 원목의 비밀기지'라 이름 붙였다. 나무가 빼곡이 들어차고 물이 흐르고 비밀스런 공간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집. 누구라도 그곳에 살고 싶은 집이다.  

 

"연못이 있으니 새가 날아들고 반딧불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곤충들이 모여드는 걸 보면 생태환경이 갖추어졌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본문 195쪽) 

 

목공예를 하지 못하더라도 읽을 만한 이유 

 

<나무를 닮아가다>에는 위에 소개된 장인들 말고도 아주 매력적인 '나무를 닮은' 사람들이 소개돼 있다. 또한 그들의 푸근하고 아름다운 작업 공간도 선명한 도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목공예 작업은 참으로 멋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손재주가 없어서 쉽사리 목공예 작업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또한 전원 속의 목조주택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역시 지금의 형편상 꿈만 꿀 수 있지 그런 집에서 살기란 남의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정직한 사람들의 건강한 자긍심을 배울 수 있었다. 담긴 장인들의 육성에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온 이들의 남다른 긍지가 느껴졌고, 그 삶에서 나온 평범하지만 진실한 지혜가 있었다. 바로 그것이 목공예를 직접 하지 못하더라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갑과 을의 나라 - 갑을관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배해왔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갑을관계의 불평들을 추적한다

강준만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 의식을 그동안 여러 차례 비판해왔는데 이번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중소기업의 사장은 대기업 부장을 접대하고, 대기업 부장은 관련 부처의 사무관을 접대한다. 이뿐인가. 전관예우는 어떤가. 관직을 버리고 민간으로 돌아가도 이전 관직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경우는 비단 법조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정부 부처의 고위 공직자들이 퇴직 후 관련 업체의 '고문'으로 취업해서 엄청난 돈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관존민비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관존민비는 정치권과 관료에게 줄을 대는 것을 일상화시켰고, 여기에서 이른바 '갑질'은 아래로 아래로 전파된다. 작은 집단은 그보다 큰 집단에게 민이 관에 줄을 대듯이 줄을 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줄대기가 일종의 능력으로까지 취급되고 그 와중에 권력과의 인맥과 친분만으로 막대한 이익을 부당하게 챙기는 '브로커'가 나타난다.

강준만은 역대 모든 정권에서 대형 브로커 사건이 터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이유와 대안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브로커는 대개 돈줄과 연줄을 이용한다. 이미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가 필요로 하는 돈을 대고, 높은 지위를 갖고 싶는 자에게는 권력과의 연줄을 대준다. 윤상림이나 김재록 같은 대형 브로커가 써먹었던 방법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들 브로커는 이런 줄대기의 과정 중간에서 큰 이익을 남겨 먹는다.

이런 줄대기는 사실 전문적인 브로커가 아니더라도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해서 이뤄진다.  저자는 특히 지방이 수도권보다 훨씬 더 브로커의 농간에 지배된다고 역설하면서 '공모'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개인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혹은 대기업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통로는 매우 좁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일을 거드는 브로커들이 설치는 것인데, 공정하고 투명한 공모는 브로커들이 설칠 판을 걷어치울 수 있다. 그러나 이 공모가 공정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인가 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로 남아 있지 않나 싶다.

강준만의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 한국의 시위 문화를 예로 들어 갑에 대한 을의 권리 주장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이 '시위 공화국'이 된 것은 적법한 방식으로 을이 권리 주장을 하는 통로가 매우 좁고, 그 통로를 통해 권리 주장을 해도 거들떠 보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는 대형 규모로 기획되고, 강한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게 된다. 공권력은 이런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해서 과잉진압하기 일쑤고, 서로 이런 폭력사태의 책임을 떠넘긴다. 저자는 이 악순환을 이제 끝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증오의 종언과 폭넓은 사회 연대

악순환이 무한 반복되는 한국 사회의 '편 가르기'의 한가운데에 바로 갑을관계가 있다. 갑을관계의 불평등이 갑들의 '갑질'에 의해서만 이뤄질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갑을관계의 약자인 을도, 더 약자와의 관계에서는 갑이 된다. 갑을관계의 불평등은 을이 자발적으로 갑에게 복종하고, 자기보다 더 약한 사회적 존재, 말하자면 병에게 자기가 행했던 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에 심화된다. 따라서 을을 경험한 이들의 연대가 아니고서는 갑을관계의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남양유업 사태가 일어났을 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온 국민이 슈퍼갑의 지위를 이용해 을을 인간 이하로 대접한 것에 분노했다. 강준만은 이런 사안을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어리석다고 비판한다. 필자도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보수신문마저 대기업의 횡포에 강도 높은 비난을 하고 있을 무렵 민주당은 갑자기 '을을 위한 정당'을 선언한다. 그런데 정당이 어떻게 을을 위한 정당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문제를 이렇게 관념적으로 키워놓으면 해결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갑자기 '을을 위한 정당'이라고 선언하자 새누리당과 보수신문은 슬그머니 '경제민주화'로 가닥을 잡아서 미묘한 온도차를 보인다. 생활의 차원에서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관념적인 수준의 문제가 되어 논의가 헛발질을 하게 되고, 상대에 대한 경쟁의식과 증오 때문에 문제해결은 멀리 멀리 달아난다.

저자의 말마따나 보수든 진보든 이제 거대담론에 매달리지 말고 미시적으로 한국 사회의 일상적 활동에서 문제되는 것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편 가르기와 상대방의 대한 증오를 멈추어야 한다. 편 가르기와 증오는 문제 해결을 요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오의 정치가 판을 치면 개인은 사회적 연대를 포기하고 각개약진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돌파해야 한다.

증오를 멈추고 더 넓은 연대를 기획하라.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을 틀렸다. 억울하면 연대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