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성공시대 1 히틀러의 성공시대 1
김태권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독재자  

 

히틀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히틀러는 독재자의 고유명사이면서 대명사다. 얌체 같은 콧수염에다가 '하이, 히틀러!' 하는 경례 동작 때문에 곧잘 희화화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사람을 일컬어 성씨와 함께 '틀러'를 붙여 별명을 삼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 대표였던 최병렬의 별명은 '최틀러'였다.  

 

요새는 <코미디 빅리그>라는 프로그램에서 장동민이 '장틀러'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좋게 얘기하면 무슨 일이든 과감하게 밀어붙이기를 잘한다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의 의견 안 듣고 뭐든지 제멋대로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히틀러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보통 그가 독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벌인 일들에 대해서는 듣고 본 바가 많지만 '듣보잡 찌질이'였던 청년은 어떻게 총리까지 될 수 있었을까? 전설처럼 그가 악마적인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사회적 힘'이 키운 괴물 

 

김태권의 교양만화 <히틀러의 성공시대 1>는 히틀러를 뛰어난 악당이 아니라 증오라는 '사회적 힘'이 키운 괴물로 그린다. 히틀러는 증오와 혼란을 먹고 자란 독버섯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좌익과 우익의 끝없는 대립, 최악의 경제난이라는 토양이 '우파 생계형' 안보강사를 일약 중요한 정치인으로 만든 것이다.  

 

<히틀러의 성공시대 1>는 히틀러와 독일 파시즘에 관한 여러 권위 있는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배치의 능력. 김태권은 '어떻게 찌질한 청년이 총리가 될 수 있었는가', '그렇게 만든 사회적 힘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주제에 집중했다.

 

히틀러라는 제대 군인이 정치인으로 성공해나갈 때, 어떤 사건이 있었고 또 어떤 인물이 그를 도왔는지 보여줌으로써 히틀러를 탈신화 하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저자 김태권의 탁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한 인간이 거대한 악을 혼자서 저지르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공범이 있든가 아니면 잠재적 협력자가 있든가 침묵하는 다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에다 역사적 우연이 겹치면 걷잡을 수 없는 피바람이 불게 된다. 극좌파와 극우파의 대립이 없었다면, 전쟁 이후 경제난이 없었다면, 우파 거물의 지원이 없었다면, 영구집권을 하려던 늙은 권력자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지금 히틀러인가? 

 

<히틀러의 성공시대>에는 히틀러가 독일의 최고 권력자가 되도록 자의든 타의든 도움을 준 여러 인물이 나온다. 그들도 히틀러가 유럽을 참화에 빠뜨릴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격렬한 좌우익 대립 속에서 좌익의 확산을 기필코 막아야 했던 우익들이 써먹고 버릴 카드로 선택한 것이 히틀러였다. 히틀러에게 능력이 있다면 바로 그렇게 버려질 운명에서 요리조리 나간 데 있다.  

 

저자 김태권은 독자들이 히틀러와 독일 파시즘에 관한 권위 있는 책들을 읽는 수고를 대신해주면서 히틀러를 탄생시킨 시대의 공기를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히틀러인가?

 

저자는 <히틀러의 성공시대>를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데, 독자들에게 이런 요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민주적이지 않은 한국의 보수세력을 나치간부처럼 그려달라, 혹은 길거리에 나와 떼를 쓰는 진보성향 시민들이야말로 나치당원으로 그려달라 등등. 바로 이런 요구에서 왜 우리 시대에 히틀러와 그의 시대에 관한 고찰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증오를 기반으로 하는 좌우의 대립과 경제적 어려움은 극단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비옥한 토양이다. 우리 편은 괜찮지만 저쪽 편은 죽어도 안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어느 순간 절대적 힘에 대한 동경으로 바뀌고 그 속에서 독재자는 잉태되는 법이다.  

 

김태권은 히틀러라는 듣보잡 찌질이 청년의 성공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극단적 대립을 지양할 것을 권한다. 따라서 이 책은 강준만 교수의 <증오 상업시대>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증오로 거둔 성공은 반드시 세상에 해를 끼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증오 상업주의 - 정치적 소통의 문화정치학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멘붕과 증오보다는 소통이 필요하다

 

작년 대선의 야권 패배 이후 '멘붕'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상실감이 너무 커서 연말을 우울하게 보낸 사람들은 스스로 '레 미제라블'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선거 기간에야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열성적으로 응원하고 상대 후보를 박하게 평가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후에 당선자에게 축하는 고사하고 저주만을 늘어놓는다든가 바로 다음 번 대선을 세기 시작하는 행태는 우리의 일상이 정치에 의해 식민화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증오 상업주의>는 바로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쓰였다. 저자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한국 사회의 강경파들이 어떻게 증오를 돈과 권력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지 분석한 뒤에 중간 지대의 확대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역설한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를 강력히 지지했던 강준만 교수는 그 이유로 '증오의 종언'을 꼽은 바 있다.   

 

 

돈과 권력이 되는 증오 

 

강준만 교수는 '증오 상업주의'의 개념을 미국의 폭스 뉴스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친공화당 성향의 폭스 뉴스는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냄으로써 미국 우파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다. CNN이나 MSNBC가 양분한 진보 뉴스 시장에서 폭스 뉴스는 보수 시장을 독식한다.  

 

결과적으로 중립을 지향하는 매체들은 아무리 공정보도를 해도 시청률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좌우를 막론하고 열혈 지지자들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사실로 만들고야 만다. 저자에 의하면 폭스 뉴스는 이념적 성향보다는 기업 이익을 위해 '증오 마케팅'을 활용한다. 이것이 바로 '증오 상업주의'이다. 

 

어디 언론뿐인가. 무브 온이나 티 파티 같은 정당 외곽의 지지단체들은 처음엔 그렇지 않더라도 곧 강경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상대를 향해 날선 증오의 칼날을 겨눈다. 이런 지지단체의 영향을 받아 정당 역시 내부의 중간파, 즉 상대와의 타협을 통해 정치를 하려는 이들은 거센 비난을 받고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강경파들은 순수한 정치인으로 칭송을 받는다.  

 

그렇다. 상대를 향한 증오를 끝없이 발신하는 '증오 마케팅'은 미디어산업이든 정치이든 시민사회단체이든 두루 통한다. 증오는 돈이 되고, 권력이 된다. 중간파들은 설 자리가 없게 되고 어느 순간 강경파가 되어 증오 마케팅에 발을 걸치고픈 욕망을 느끼게 된다.     

 

 

인기 없는 중간파가 소중한 이유 

 

언론이든 정당이든 시민단체이든 중간파는 인기가 없다. 강경파에 비해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 행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상대와의 타협을 통해 정책을 조정하는 행위는 '변절'로 낙인찍힌다. 특히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고 오랫동안 좌우 갈등을 겪어온 한국의 경우 중간파에 속한다는 것은 곧 양쪽 모두에서 비난을 받거나 버려지는 것을 의미했다. 강준만 교수는 그러기에 더더욱 한국 사회에서 중간파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사안이 옳은가 그른가로 판단하고 말할 사람들이 늘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이든 민주당이든 한국의 정당은 과거에 고수했던 정책을 헌신짝처럼 버리기도 하고, 상대방의 것이라서 공격만 하던 정책을 어느 순간 선거 공약에 슬쩍 집어넣기도 한다. 물론 정당은 유권자의 인식이 바뀌면 정책도 바꿔야 한다. 표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이 유연하게 시대의 흐름에 대처하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권자마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따라 자신이 가졌던 신조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 행태는 문제라 하겠다. 이런 정치문화에서는 그랜드 비전에 따른 장기적인 국가 경영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소통을 대신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서로의 의사가 오해 없이 전달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한다. 지난 정부 때 그렇게 강조되었던 것이 소통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국민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었다는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소통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부가 오해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묻는다. 기실 이명박 정부는 국정홍보를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소통은 의견이 다르더라도 포용하는 태도를 전제로 한다. 저자는 이 태도를 '승자 독식구조'에서는 누구도 갖기 어려울 것이라 진단한다.  

 

말로는 소통하자고 하지만 실제로 소통이 이뤄지기 힘든 사회 구조 때문에 소통은 포퓰리즘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서 상대를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대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상대측을 깎아내리는 방식의 반(反)소통이 소통인 듯이 통용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의도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했던 라디오 방송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나 통하는 포퓰리즘이었지 소통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꼼수 역시 마찬가지다. 이명박정권의 반대자들에게 나꼼수는 소통의 도구였을지 모르나 여권 지지자에게는 상대에게 더욱 더 적대감을 느끼게 하는 불통의 나팔소리였을 것이다.     

 

 

증오하지 말고 타협하자  

 

강준만 교수가 증오 대신 제안하고 있는 것은 '타협'이다. 한국 정치를 인물 중심이나 정당 중심이 아니라 시스템 중심으로 재편해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어느 당이 집권당이 되든지 '승자독식'이 되지 않도록 만들면 전국민의 '정치과잉'은 줄어들 것이다. 교수나 언론인이 정치인에 줄을 대고,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는 한국식 입신양명도 근절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계와 시민사회를 막론하고 '타협'에 관대한 문화가 절실하다.  

 

우리 편은 천사고, 상대방은 악마라는 생각을 고수하는 것으로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면 여기에 속하지 않은 다수의 중간파들, 선거철의 용어로 말하자면 부동층은 정치혐오에 빠지고 피곤해진다. 정치가 썩었다고 욕하고, 매번 물갈이를 해도 새로운 정치인이 곧 기존 정치인보다 더 타락하는 이유는 타협보다 증오에 몰두하는 정치문화 때문이다.  

 

저자는 미국의 빈민운동가 솔 알린스키의 운동론에서 교훈을 얻자고 권한다. 솔 알린스키는 철저한 현실론을 바탕으로 지역을 조직화하고 기성 권력에 저항하되 필요할 경우 타협하여 진일보한 결과를 다시 시작점으로 삼자고 했다. 100을 목표로 해서 안 되면 0으로 끝내는 운동이 아니라 30에 타협하고 다시 시작하는 운동 말이다.     

 

 

민주당과 안철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조언 

 

강준만 교수는 <증오 상업주의>를 통해 대선 패배 이후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민주당이 살길도 조언한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것으로는 수권 정당의 이미지를 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것인지 국민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어야 한다.  

 

민주당은 증오를 기반으로 해서 상대 당을 공격하는 것에 당력을 집중하지 말고 정책을 개발하고 지역사회에 밀착할 수 있도록 정당을 혁신해야 한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이 말한 바 있는 '생활공동체 교회 모델'을 적용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대형교회가 지역사회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역할을 살펴보면 정당이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도 꽤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강준만 교수는 이 책의 말미에 안 전 교수를 위한 장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안 전 교수가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비난이 그에게 집중될 것인데 안 전 교수는 이에 '증오'로 화답하지 말고,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되면 '증오'를 기반한 기존의 정치문화를 일신할 수도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에게 마음속의 증오를 거두자고 권하면서, 유네스코 헌장 서문에 삽입된 미국 시인 아키발드 맥레시의 명문을 들려준다.  

 

"전쟁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방어선이 구축되어야 할 곳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물론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증오는 사회를 망칠 수 있다는 이 책의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현실적 의문은 남는다. 증오를 무기로 늘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어온 세력이 과연 열린 자세로 타협의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바뀌면 저들도 바뀔까. 저자의 바람대로 침묵하는 다수가 증오를 버린 새 정치에 화답하여 새 시대를 꽃피우기를 필자도 열렬히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피는 용산 - 딸에게 보낸 편지
김재호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딸과 생이별한 아빠가 그린 만화


끔찍이도 아끼던 아홉 살 딸과 생이별한 아빠가 있다. 아빠는 3년 9개월간 감옥에 있었다. 아빠는 억울해서 자살을 생각했다. 딸은 아빠의 부재 때문에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학교에 가는 시간을 빼고는 늘 함께 있던 부녀였다.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었던 아빠는 딸과 아내를 떠올리며 버티기로 했다. 그리고 우울증을 앓는 딸을 위해 만화를 그려 보냈다. 그렇게 1345일간 감옥의 아빠와 바깥의 딸을 잇는 만화편지는 360쪽짜리 책이 되었다. 

 

김재호의 <꽃피는 용산>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린 만화책이다. 저자는 1984년부터 용산에 터를 잡고 진보당이라는 금은방을 운영했다. 2007년 도시정비 사업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23년간 일터이자 삶 터였던 가게가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남일당 옥상에 올라가 시위했다. 경찰은 남일당에 있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특공대를 투입한다. 이 과잉진압은 대참사를 낳는다. 그렇다. 바로 용산참사다. 이때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원 한 명이 목숨을 잃는다. 김재호는 그 아비규환의 생존자다.  

 

 

슬픔을 삭이고 삭여서 얻은 명랑함  

 

저자가 끔찍한 사건을 겪고 옥살이를 했다고 했지만, <꽃피는 용산>은 그 참혹함과 억울함을 삭여 낸 명랑함이 주조를 이룬다. 더러 용산참사와 관련된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고, 옥살이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그런 부분은 매우 적다. <꽃피는 용산>은 짧은 에피소드가 만화 한 편을 이루는 일종의 만화 콩트집인데 대부분은 초등학생인 저자의 딸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꽃피는 용산>이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저자는 노총각으로 아내를 만나 늦둥이 딸을 얻은 뒤 오순도순 살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가족과 보냈던 소소한 일상이 감옥에 있는 아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 절절한 노스탤지어와 딸에 대한 사랑이 그림이나 만화를 따로 배우지 못한 저자에게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아빠를 끔찍이 따르던 딸이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을 때, 저자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그 애타는 부정이 <꽃피는 용산> 어느 페이지를 펴보아도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용산참사가 왜 벌어졌는지, 어떻게 저자가 감옥에서 만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개괄적으로 알려준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저자가 순식간에 '폭도'가 되고 '도심 테러리스트'가 되어 감옥에 갔을 때,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준다.  

 

첫 번째 이야기 '우리가 살던 용산'은 저자가 어떻게 아내와 만나서 결혼했는지, 딸 혜연이가 태어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의 금은방이 가족에게 어떤 의미인지 가슴 뭉클하게 전한다.  

 

두 번째 이야기 '아빠의 편지'는 소제목 그대로 감옥에서 아빠가 딸에게 전하는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엄마 말씀 잘 들어라, 학교 공부 열심히 해라, 너무 살찌면 안 되니까 과식하지 말라 등등. 평범한 아빠가 딸에게 해주는 이야기들이다. 이 평범한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그가 구치소에 들어가자마자 느낀 절망감을 극복하고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딸이 면회 오면 대화를 통해, 사정이 생겨 면회를 오지 못하면 만화 편지로 부녀 사이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감옥에 있는 아빠, 우울증을 앓는 딸 

 

세 번째 이야기 '혜연이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아내에게 들은 딸의 성장기를 부재중인 아빠가 그린 것이다. 특히 이 장에 있는 '10분은 너무 짧아요'는 읽는 이를 가슴 아프게 한다. 아버지를 만나러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간 구치소에서 부녀가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이다. 그런데 남편과 상의할 일이 있던 아내는 딸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시간은 흐르고 결국 딸은 아빠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면회시간이 끝나버린다.  

 

네 번째 이야기 '아내, 그리고 혜연이 엄마'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남편이 부재한 아내의 심경을 담고 있다. 아빠가 없고, 남편이 없지만, 아내와 딸은 서로 도와가며 꿋꿋하게 살아간다. 이 장에는 딸이 우울증을 앓게 되자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엄마의 심정과 그 사실을 전해 받고 감옥 안에서 우는 아빠의 안타까움이 묘사되어 있다. 자고 일어나면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아빠가 곁에 없는 현실을 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 '세상의 모든 가족'은 저자의 가족이 아니라 가슴이 따뜻해지는 세상의 모든 가족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특히 이 장에는 '나눔'이라는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젊은 여자가 땅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줍고 있는데 한 노인이 곁에 와서 은행을 따라 줍는다. 젊은 여자는 노인이 자기보다 많이 주울세라 열을 올려서 은행을 줍는다. 그런데 은행을 다 줍자 노인이 여자에게 자신이 주운 은행을 준다. 요긴하게 필요하니까 그렇게 줍는 모양이라며. 젊은 여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만화 그리는 법을 배우지 않았지만, 김재호의 만화는 딸을 향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데다가 '나눔'에서 볼 수 있는 숨은 재능이 더해져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만화를 찾는 분이라면 권하고 싶다. 특히 남일당 옥상에 올라가 시위하던 철거민을 도심의 테러리스트, 폭도라 매도한 사람들은 꼭 <꽃피는 용산>을 읽어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차가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야 하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 냄새 :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평화 발자국 9
김수박 지음 / 보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1월 28일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불산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삼성에서는 외부로 불산이 누출되지는 않았다고 발표했지만 지난 27일 민관합동조사단은 불산의 외부 누출이 의심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고가 난 것도 문제지만, 세계 초일류기업을 표방하는 삼성이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다시 한 번 삼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삼성은 영원한 거짓말쟁이로, 무책임한 또 하나의 가족으로 남을 셈인가.  

 

삼성전자 화성공장도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삼성전자 하면 반도체요, 반도체 하면 삼성전자라고 할 정도로 반도체는 삼성의 황금알 낳는 거위라 할 수 있다. 반도체를 수출해서 삼성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바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해외에라도 나가면 삼성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뿌듯한 기분마저 들 때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할지라도 반도체 생산 공장이 사람을 병들고 죽게 만든다면 단호하게 그 공장의 가동을 중지시켜야 하지 않을까.

 

물론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은 다른 곳이 정전일 때도 전기를 공급받을 만큼 최우선적으로 보호되는 산업현장이다. 하루 생산을 멈추면 엄청난 액수의 손실이 생긴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산 누출 사고를 보아 알 수 있듯이 노후된 시설이 언제 사고로 이어질지 모르고 그 사고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른다. 더구나 이런 '사고'가 아니라 생산 과정 중에 화학물질에 노출돼 백혈병 같은 암에 걸린다면, 아니 백번 양보해서 그런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선 철저한 안전 조사를 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하지만 삼성은 예전에도 그렇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  

 

 

반도체공장의 위험을 알리는 만화 두 편 

 

반도체 산업을 흔히 청정산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수박의 만화 <사람 냄새>와 김성희의 만화 <먼지 없는 방>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이 청정산업이고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안전하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두 작품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고 황유미씨와 황민웅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두 만화에 나타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의 근로 환경은 대단히 위험하다.  

 

고 황유미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2003년에 삼성전자에 직업훈련생으로 들어와 일하다 2005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2007년 고작 스물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고 취업을 한 착한 딸이었고, 휴일이면 영화관에 가는 걸 좋아했던 평범한 젊은 여성이었다. 이 기특한 딸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런데 <사람 냄새>에 나오는 그녀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삼성의 대응은 정말 너무 졸렬한 것이었다. 삼성은 황유미 씨가 투병중일 때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하도록 했고, 여러 차례 치료비 때문에 경제적 곤궁에 빠진 가족을 돈으로 회유하려고 했다. 삼성은 치료비를 대주겠다고 속여 사직서를 받아내는가 하면 언론과 접촉하지 말라고 거액을 제시하기도 했다.  

 

황상기씨는 삼성의 거짓말에 진저리가 나서 삼성과 싸우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노동자를 도와야 할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신청을 기각하고, 이에 불복한 황상기 씨가 행정소송을 제기하자 삼성에 공문을 보내 행정소송에 도움을 달라고 한다. 세칭 '일류' 변호사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위해, 아니 그 뒤에 있는 삼성을 위해 변론을 맡았다. 그러나 2011년 6월 23일,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행정소송 1심 선고에서 법원은 고 황유미 씨의 백혈병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황상기 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후 황상기 씨는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 위해 싸우고 있다. 

 

 

이래서야 또 하나의 가족이 되겠는가? 

 
삼성이 보인 이 졸렬한 태도를 우리는 익히 듣고 보아서 잘 알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거짓말로 둘러대고, 그것이 탄로 나면 광고로 위협해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그래도 안 풀리면 막대한 돈을 들여 송사를 통해 해결하려는 태도를. 이래 가지고서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되지 못한다. 아니 평소엔 잘 해주다가 수가 틀리면 가정폭력범으로 변하는 무서운 가족이 되는 것이다.

 

김성희의 <먼지 없는 방>은 '클린 룸'이라고 불리는 반도체 생산공장의 내부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반도체 생산과정에 대한 교과서로 쓰여도 무방할 정도의 지식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반도체 생산과정은 너무 복잡하고, 단계가 굉장히 많다. 그런데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클린 룸'은 사람에게 깨끗한 방이 아니라 반도체와 그것을 만드는 기계에게 깨끗한 방이다. 독성 화학물질을 다루는 노동자는 방독면을 써야 마땅한데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만약 알게 된다 해도 방독면을 쓰고 일하면 작업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왕따'가 됐어야 한다. 제대로 된 보호장비는 바이어나 VIP만 썼다고 하니, 도대체 노동자의 건강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것 아닌가.  

 

<먼지 없는 방>의 주인공 정애정 씨 역시 1995년 고3 때 직업훈련생으로 삼성에 입사해서 청춘을 보내고 같은 공장에 근무하던 황민웅 씨를 만나 2001년에 결혼한다. 2003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행복하던 이 가족에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황민웅씨가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정애정씨는 남편이 백혈병에 걸렸을 때 이미 뱃속에 아이가 또 있었다. 정애정씨는 남편이 고통스럽게 투병하는 와중에 딸을 출산한다. 이식할 골수가 있다 해서 희망에 부풀었지만 황민웅씨는 결국 2005년 7월 23일 부인과 어린 아들딸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겪었던 일을 정애정씨 역시 겪었다. 그 이후 정애정씨 역시 삼성과 싸우는 사람이 되었다.  

 

 

삼성이 이들의 한(恨)을 풀려면 

 

황상기씨와 정애정씨는 삼성을 뭐라고 할까. 딸을 잃고 남편을 잃은 이들은 삼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들은 삼성을 '한(恨)'이라고 한다. 황상기 씨는 삼성 다니는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정애정 씨는 애사심이 누구보다 많은 사원이었고, 그녀의 남편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들에게 지금 삼성은 한이다. 이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 주어야만 삼성은 '또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거짓말 하지 말고, 진신을 은폐하지 말고, 위험을 알리고, 안전장치 마련에 최우선의 노력을 기해야 한다.    

 

반도체를 위한 '먼지 없는 방'보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노동자를 위한 '안전한 방'이 먼저다. 그렇다. 사람이 먼저다. 그렇게 되면 삼성에도 '피 묻은 돈 냄새'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머수첩 한승헌 변호사의 산민객담 3
한승헌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중에 나와 있는 유머와 관련된 책들은 표지에 소개된 문구만 요란할 뿐 실제 들여다보면 별 소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마치 그 책 한 권만 읽으면 어디 가서나 남을 웃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유혹하지만 대개의 경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를 한데 묶어서 낸 종이뭉치에 불과하다. 이런 함량미달의 유머집이 판치는 출판시장에서 삶의 신산한 체험에서 우러난 진국의 유머를 담은 책을 만나는 일은 행운에 속하고, 그런 만남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산민(山民)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수첩>은 정말 제대로 된 유머집을 찾기 어려운 한국에서 매우 드물게 나온 훌륭한 작품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독재정권 치하에서 무수히 많은 양심수를 변호하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권 변호사다. 두 번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번은,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조연급으로 스카우트"된 것이라 한다. 이 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저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지속해왔고, 국민의 정부에서는 감사원장으로 직무를 수행한 바도 있다.

 

한국에서는 저명한 사회적 인사가 유머집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신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는 아주 많다. 내곡동으로 가려다 논현동으로 돌아간 MB라든가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했던 안상수 같은 인물은 본인이 유머를 구사한다기보다는 유머의 대상이 되는 경우라 하겠다. 이에 비해서 한승헌 변호사가 구사하는 유머는 매우 격조 있으면서도 현실의 핵심을 짚는 것이어서 '유머의 정석'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유머수첩>에 나온 몇 가지 유머를 소개해본다. 70대 중반의 저자가 어느 자리에 초청받아 특강을 해야 하는데 감기 때문에 목소리가 이상하자 이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자 한 농담이 이렇다.   

 

"제 감기는 주한미군입니다. 한번 들어오더니 나갈 줄을 모르니까요." (줄임) "그렇다고 저를 무슨 반미나 미군철수론자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차를 주문할 때에도 반드시 아메리카노만 시킵니다." ― '주한미군과 아메리카노'(28쪽) 

 

2006년 가을, 저자는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을 간행하고, 윤형두 범우사 사장과 함께 지금은 건물과 터만 남은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다. 방송사에서 출간 기념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그곳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양심수가 많이 투옥되었던 곳이니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옛날의 그 서울구치소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저자는 매표소 직원에게 이런 농담을 던진다.  

 

"아니, 구치소에서 입장료를 받아요? 옛날에는 무료입장에다가 한번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의식주를 국가가 보장해 주었는데 잠깐 들여다보고 나올 사람들에게 돈을 받다니, 세상 참 나빠졌구먼." ― '구치소 입장료'(75쪽)

 

저자의 신산했던 투옥 체험이 서려 있는 곳이라 이 농담은 뼈 있는 희극적 아이러니를 담고 있어 최상급의 유머라고 하겠다.  

 

"구치소에서 입장료를 받아? 옛날엔 의식주까지 보장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인 있는 한승헌 변호사는 이 책의 한 장을 'DJ의 추억'이라 제목 짓고 그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김 전 대통령의 농담은 엄청난 고난의 시기를 넘기고 나온 것이어서 이 책에서도 백미에 해당한다.  

 

1985년 2월 8일, 전두환 정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귀국을 강행한다. 이때 미국의 국회의원, 고위관리, 학자, 인권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22명의 외국인이 동승 입국한다. 아마도 김 전 대통령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의 입국이 못마땅한 전두환 정권은 그의 귀국을 비난하며 "외국인과 함께 온 것은 사대주의적 망발"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참으로 김 전 대통령다운 재치였다. 

 

"내가 외국 사람들을 따라 다녔으면 몰라도, 외국인들이 나를 따라왔는데 왜 내가 사대주의자란 말인가?" ― '사대주의 논쟁'(192쪽) 

 

김 전 대통령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는 삶을 억누르는 죽음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최고급의 유머를 선사한다. 1980년 9월 17일 오전에 열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선고 공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예상대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 "살벌한 판"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은 아주 기막힌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런 회고담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결 선고 때 재판장의 입이 '사' 하면서 옆으로 째지면 '사형'이고, '무' 하면서 앞으로 나오면 '무기'다. 그러니까 재판장 입이 앞으로 나오기를 바랐는데, 반대로 옆으로 찢어져서 '사'자가 나오는 바람에 '사형'이 떨어지게 되었다." ― '재판장 입이 앞으로 나오면'(194쪽)

 

이 책의 5장은 '대화문화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데 이는 한 대학의 지성학 강좌의 강의 내용을 손질한 것인데,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매우 뛰어난 '유머론'이다. 진정으로 유머의 달인이 되고 싶다면 이 책부터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또 남는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 책은 '한승헌 변호사의 산민객담 3'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렇다.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집은 단권이 아니라 현재까지 세 권의 시리즈로 나와 있다. <유머산책>과 <유머기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한승헌 변호사의 산민객담' 1권과 2권도 추천한다. 그 책들을 보면 엄혹하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유머 감각도 꽤나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부기하자면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 수필은 범우사에서 발행하는 독서 잡지 <책과 인생>의 인기 연재물이었다. 행복을 바라는 독자로서 이 연재가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