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상업주의 - 정치적 소통의 문화정치학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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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과 증오보다는 소통이 필요하다

 

작년 대선의 야권 패배 이후 '멘붕'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상실감이 너무 커서 연말을 우울하게 보낸 사람들은 스스로 '레 미제라블'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선거 기간에야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열성적으로 응원하고 상대 후보를 박하게 평가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후에 당선자에게 축하는 고사하고 저주만을 늘어놓는다든가 바로 다음 번 대선을 세기 시작하는 행태는 우리의 일상이 정치에 의해 식민화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증오 상업주의>는 바로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쓰였다. 저자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한국 사회의 강경파들이 어떻게 증오를 돈과 권력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지 분석한 뒤에 중간 지대의 확대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역설한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를 강력히 지지했던 강준만 교수는 그 이유로 '증오의 종언'을 꼽은 바 있다.   

 

 

돈과 권력이 되는 증오 

 

강준만 교수는 '증오 상업주의'의 개념을 미국의 폭스 뉴스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친공화당 성향의 폭스 뉴스는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냄으로써 미국 우파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다. CNN이나 MSNBC가 양분한 진보 뉴스 시장에서 폭스 뉴스는 보수 시장을 독식한다.  

 

결과적으로 중립을 지향하는 매체들은 아무리 공정보도를 해도 시청률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좌우를 막론하고 열혈 지지자들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사실로 만들고야 만다. 저자에 의하면 폭스 뉴스는 이념적 성향보다는 기업 이익을 위해 '증오 마케팅'을 활용한다. 이것이 바로 '증오 상업주의'이다. 

 

어디 언론뿐인가. 무브 온이나 티 파티 같은 정당 외곽의 지지단체들은 처음엔 그렇지 않더라도 곧 강경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상대를 향해 날선 증오의 칼날을 겨눈다. 이런 지지단체의 영향을 받아 정당 역시 내부의 중간파, 즉 상대와의 타협을 통해 정치를 하려는 이들은 거센 비난을 받고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강경파들은 순수한 정치인으로 칭송을 받는다.  

 

그렇다. 상대를 향한 증오를 끝없이 발신하는 '증오 마케팅'은 미디어산업이든 정치이든 시민사회단체이든 두루 통한다. 증오는 돈이 되고, 권력이 된다. 중간파들은 설 자리가 없게 되고 어느 순간 강경파가 되어 증오 마케팅에 발을 걸치고픈 욕망을 느끼게 된다.     

 

 

인기 없는 중간파가 소중한 이유 

 

언론이든 정당이든 시민단체이든 중간파는 인기가 없다. 강경파에 비해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 행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상대와의 타협을 통해 정책을 조정하는 행위는 '변절'로 낙인찍힌다. 특히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고 오랫동안 좌우 갈등을 겪어온 한국의 경우 중간파에 속한다는 것은 곧 양쪽 모두에서 비난을 받거나 버려지는 것을 의미했다. 강준만 교수는 그러기에 더더욱 한국 사회에서 중간파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사안이 옳은가 그른가로 판단하고 말할 사람들이 늘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이든 민주당이든 한국의 정당은 과거에 고수했던 정책을 헌신짝처럼 버리기도 하고, 상대방의 것이라서 공격만 하던 정책을 어느 순간 선거 공약에 슬쩍 집어넣기도 한다. 물론 정당은 유권자의 인식이 바뀌면 정책도 바꿔야 한다. 표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이 유연하게 시대의 흐름에 대처하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권자마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따라 자신이 가졌던 신조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 행태는 문제라 하겠다. 이런 정치문화에서는 그랜드 비전에 따른 장기적인 국가 경영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소통을 대신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서로의 의사가 오해 없이 전달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한다. 지난 정부 때 그렇게 강조되었던 것이 소통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국민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었다는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소통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부가 오해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묻는다. 기실 이명박 정부는 국정홍보를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소통은 의견이 다르더라도 포용하는 태도를 전제로 한다. 저자는 이 태도를 '승자 독식구조'에서는 누구도 갖기 어려울 것이라 진단한다.  

 

말로는 소통하자고 하지만 실제로 소통이 이뤄지기 힘든 사회 구조 때문에 소통은 포퓰리즘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서 상대를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대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상대측을 깎아내리는 방식의 반(反)소통이 소통인 듯이 통용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의도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했던 라디오 방송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나 통하는 포퓰리즘이었지 소통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꼼수 역시 마찬가지다. 이명박정권의 반대자들에게 나꼼수는 소통의 도구였을지 모르나 여권 지지자에게는 상대에게 더욱 더 적대감을 느끼게 하는 불통의 나팔소리였을 것이다.     

 

 

증오하지 말고 타협하자  

 

강준만 교수가 증오 대신 제안하고 있는 것은 '타협'이다. 한국 정치를 인물 중심이나 정당 중심이 아니라 시스템 중심으로 재편해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어느 당이 집권당이 되든지 '승자독식'이 되지 않도록 만들면 전국민의 '정치과잉'은 줄어들 것이다. 교수나 언론인이 정치인에 줄을 대고,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는 한국식 입신양명도 근절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계와 시민사회를 막론하고 '타협'에 관대한 문화가 절실하다.  

 

우리 편은 천사고, 상대방은 악마라는 생각을 고수하는 것으로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면 여기에 속하지 않은 다수의 중간파들, 선거철의 용어로 말하자면 부동층은 정치혐오에 빠지고 피곤해진다. 정치가 썩었다고 욕하고, 매번 물갈이를 해도 새로운 정치인이 곧 기존 정치인보다 더 타락하는 이유는 타협보다 증오에 몰두하는 정치문화 때문이다.  

 

저자는 미국의 빈민운동가 솔 알린스키의 운동론에서 교훈을 얻자고 권한다. 솔 알린스키는 철저한 현실론을 바탕으로 지역을 조직화하고 기성 권력에 저항하되 필요할 경우 타협하여 진일보한 결과를 다시 시작점으로 삼자고 했다. 100을 목표로 해서 안 되면 0으로 끝내는 운동이 아니라 30에 타협하고 다시 시작하는 운동 말이다.     

 

 

민주당과 안철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조언 

 

강준만 교수는 <증오 상업주의>를 통해 대선 패배 이후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민주당이 살길도 조언한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것으로는 수권 정당의 이미지를 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것인지 국민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어야 한다.  

 

민주당은 증오를 기반으로 해서 상대 당을 공격하는 것에 당력을 집중하지 말고 정책을 개발하고 지역사회에 밀착할 수 있도록 정당을 혁신해야 한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이 말한 바 있는 '생활공동체 교회 모델'을 적용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대형교회가 지역사회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역할을 살펴보면 정당이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도 꽤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강준만 교수는 이 책의 말미에 안 전 교수를 위한 장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안 전 교수가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비난이 그에게 집중될 것인데 안 전 교수는 이에 '증오'로 화답하지 말고,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되면 '증오'를 기반한 기존의 정치문화를 일신할 수도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에게 마음속의 증오를 거두자고 권하면서, 유네스코 헌장 서문에 삽입된 미국 시인 아키발드 맥레시의 명문을 들려준다.  

 

"전쟁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방어선이 구축되어야 할 곳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물론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증오는 사회를 망칠 수 있다는 이 책의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현실적 의문은 남는다. 증오를 무기로 늘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어온 세력이 과연 열린 자세로 타협의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바뀌면 저들도 바뀔까. 저자의 바람대로 침묵하는 다수가 증오를 버린 새 정치에 화답하여 새 시대를 꽃피우기를 필자도 열렬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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