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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테나 1 - 날조된 고대 그리스 1785~1985, 서양 고전 문명의 아프리카.아시아적 뿌리 ㅣ 블랙 아테나 1
마틴 버낼 지음, 오흥식 옮김 / 소나무 / 2006년 1월
평점 :
뒤늦게 날아오지만, 꼭 돌아오고야 마는 편지와 같은 질문들이 있다. 언젠가 한번쯤 품고 있었던 궁금증들이었지만 풀지 못했던(못할) 숙제들과 같은 그런 질문들 말이다. <블랙아테나>의 존재가 나에게 그러한 존재였다. 올해 초 번역되어 나온 이 책의 존재는, 나의 지적 관심이 아직 서양문명의 근원이라는 그리스문명에까지 이르지 못했기에 나의 서재를 훑는 손안에서는 먼 것이었지만, 책의 주제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블랙아테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선행저작을 이미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이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랜 양가감정의 기원과 경탄, 갈등과 그 왜곡 양상들을 중동에 대한 시선들의 변화를 중심으로 문헌학적으로 분석한 그 책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논쟁적이라는 수준을 뛰어넘어 '구제될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오염된' 용어로 치부될 정도로 크나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력은 아직도 유효하다. 서구학계의 동양학 담론을 크게 틀지운 것이 70년대의 <오리엔탈리즘>이었다면 <블랙아테나>는 그 큰 자장안에서 새로운 담론의 파열음을 낸 저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못지 않은 파열음이라고 평하는 것은 이 작품이 서구인의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성의 도를 뛰어넘어 서구인의 의식과 학문의 기원에 대헤 근원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브루노 스넬이 지은 <정신의 발견>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서구 사상의 그리스적 근원'이다. 이와 같이 이제까지 누구도 서구사상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헬레니즘(그리스 정신)의 존재와 그 근원대해 의문을 품어 본 적은 없다. 몇몇 예외라면 조지 제임스의 <도난당한 고전>(1954)이 있겠지만, 버낼의 책만큼 근본적으로 서양 고전 문명의 근원이라는 그리스문명의 뿌리를 아프리카와 아시아적 근원으로 상정한 사람은 없었다.
이 저작의 내용이 알고 싶다면 6백여피이지 본문 중 마지막에 결론부분의 5페이지 남짓의 분량만 읽으면 된다. 그 내용을 숙지하고 서론만 잘 읽어내려가면 버낼이 전개한 이 방대한 책의 대략의 아이디어를 알았다고 말할 수준은 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버낼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머리말에 저자가 '책에 담긴 기본적인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10여년이 걸렸다'고 밝힌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가 밟아온 논증의 절차와 절차과정의 치밀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료의 방대함이다. 이 책은 올해 3권이 출간될 예정이며 4권까지 집필될 에정이라고 하니 책에 대한 논증의 결과는 아직 유보적이라고 한발 양보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책에 대한 요지는 생략한다하더라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연구에 임하는 저자의 방법론이다. 저자는 '지적 학술적 발전은 사회 정치적 발전과 더불어 관찰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연구에 임하고 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문명이 과연 자발적으로 발생한 문명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문헌에 천착하고 있다. 방대한 문헌을 섭렵할수록 그가 발견한 것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고대 이집트문명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며, 그리스가 원주민(유럽인)과 식민자(아프리카인 및 셈족)의 혼합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저자는 문헌학적으로 '고대모델'이라고 부르는데, 중요한 것은 19세기 전반까지 이 고대모델은 고대 그리스인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유럽인들까지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고대모델이 변화를 하게 된 것은 학문적 '내재적' 결함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18~9세기 낭만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이 유럽의 순수한 유년기로 그리스를 상정했다는 사회정치적인 외재적 이유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아리안 모델에 의해 폐기된 것이었다.
저자는 '그리스와 이집트를 연계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매우 뿌리깊은 문화적 억압이 존재' 할 정도로 문헌학적 자료들이 이미 이러한 고대모델을 폐기하거나 은폐하는 등의 오염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소위 역사에서 가정하는 객관적 자료라는 것이 그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저자가 제기한 연구 방법이 고대 이집트어, 고대 셈족어, 고대 그리스어의 상관관계를 새로이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세 나라의 언어 사이의 단순한 상관성이 아니라, 서구문명의 기원이라는 그리스문명이 실은 세 나라의 활달한 문명의 교호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자신의 논지를 훌륭히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저자의 언어 비교 연구는 문헌학적 사료들이 이미 오염되었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아리안 모델은 언어가 한 민족의 고유한 정신의 근본적 표현이라는 낭만주의적 믿음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언어를 학문 분과의 핵심에 위치'시킨다는 점을 역이용한 것이다. 저자는 연구를 시작할때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어려움들을 오히려 역이용해 이중적으로 아리안모델을 공략하는 전략을 쓴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전략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관계에 대한 관한 근대 유럽학계의 왜곡에 대한 역사적 전개를 주 내용으로 하는 1권보다는 뒤로 갈수록 보다 실증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 갈 것 같다.
이 책은 서양의 사상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에게 교과서적으로 제공되었고 숙지되었던 학문들의 배후에 어떤 정치경제적 기원들이 있었는지를 똑바로 응시하라는 주문을 걸듯이 말이다. 이는 사실 각 시대별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제공하기에는 벅찬 통찰들이다. 그것은 전문가들의 시각들을 두루 고찰한 통시적 시각을 가진 대가들만이 우리에게 던져줄 수 있는 역사적 혜안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버낼의 해박한 세계사적 박식함에서 연유하는 디테일한 역사적 통찰들을 얻을 수 있는 부수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메시아주의가 외국인에 의한 군사적 정복에 의해 생겼다던지, 훔볼트의 언어 진보관이 세계사 국면을 설명하려는 동시대 헤겔에 의해 적용되었다거나, 교양개념이 프랑스 혁명의 파고를 잠재우려한 반동적 독일 민족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통찰들은 역사적 사실의 지루한 서술이 판을 치는 여타의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역사적 통찰이다. 대가의 등에 올라타 세계사를 내려다보는 쏠쏠한 재미 역시 놓치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