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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TO. 스밀레
안녕? 스밀레!
내일 아침 9시까지 출근 아닌 출근을 해야하는 나지만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널 만나는 순간 그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 결국 밤을 새 너와 너의 연인과 친구 이야기 모두를 조심스럽게 훔쳐보았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적이 있었나? 누군가에게 성을 느껴 본적이 있었나?’
네가 던진 이 질문을 접하는 순간 사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더라. 그래서 어쩜 너에 관한 이야기를 놓을 수 없었을지 몰라.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이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내게도 답을 알려줘!’ 라는 심정으로 내 이야기를 그렇게 쫓아갔던 거야!
네가 소설 쓰기에 너의 모든 오감을 열어두었기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누군가에서 성욕을 느낄 수도 없었다고 했지? 맞아, 대학교에 들어와 모든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이쪽과 저쪽에 있는 날 구분하기 힘들었을 때 내게 찾아온 첫 번째 연애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 어느 한곳으로 나의 모든 감정과 느낌들, 생각들을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던 그때 난 어쩜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닌 의무적인 연애 시작했었던 것 같고(그 애가 알면 난 벌받을 거야, 그치? 아니, 어쩜 그 애도 나나 스밀레 너 같을지도 모르겠구나),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사실 그땐 죽고 못 살았지만! )
그런데 내 삶의 결과 내 사고의 무늬가 조금씩 또렷해질 무렵부터 너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지도, 연애에 대한 설레임도, 성욕이라는 것도 모두 사라져 버리더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유쾌하고 따뜻한 것인지, 얼마나 기분 좋은 경험인지 알지만 네가 소설 쓰기에서 그런 사랑의 감정을 무엇보다 강력하게 느꼈듯이 어쩜 나도 다른 무엇에선가 다른 남성과의 사랑이 아닌 삶에 묻어나는 보다 강력한 사랑의 감정을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 같아. ‘연애보다 그때 내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던, 나를 휘청거릴 만큼 강력하게 묶어두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지금은 무엇인가?’ 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 사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더라. 왜냐구? 조금 우습겠지만 그때 내게 연애보다 비록 소극적인 수준이었지만 노동운동이 더 우선이었고, 지금은 너와 조금은 다른 종류의 글읽기와 글쓰기가 나를 사로잡고 있는 듯해. 그리고 어느 순간 취업전선에 뛰어든 전사를 위한 준비물들이 날 휘돌아 감싸 버릴테지?
자신을 삼켜버릴 듯한 그런 강력한 감정들, 욕구들이 다른 이성에 대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사실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사실 너처럼 이성에 대한 사랑없음, 성욕없음에 가끔 내가 비정상일까? 남, 녀간의 사랑이 필수 불가결한 것일까? 남성에게 떨림이나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레즈비언일까? 뭐 그런 생각들로 지금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은게 사실이야. 하지만 너를 통해 그리고 너를 둘러싼 뮤와 당신의 남자 친구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고 소통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어서 몸은 조금 졸리지만 사실 마음만은 너무 개운하다!
그리고 네게 한가지 더! 사람에 따라 뮤처럼 이쪽과 저쪽을 공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굳이 그것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모두 가진 척하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내게 가르쳐주어서 너무 고마워! 네가 이쪽에 있는 뮤에게 저쪽에 있는 뮤가 되어달라고 강요하지 않고 너 스스로 저쪽에 있는 뮤를 만나로 간 것을 보고(난 그리스에서의 너의 실종이 저쪽에 있는 뮤를 만나로 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맞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상대방의 다른 모습까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사실 삶에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 이쪽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는 동안에도 상대의 일부분은 이미 저쪽으로 흘러 가버릴 수 도 있는데 우리는 항상 이쪽에 있는 모습이 상대의 전부일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짓거나, 저쪽에 있는 상대의 일부를 억지로 이쪽에 끌어 당겨올 것을 강요할 때가 많잖아. 내가 대하는 상대에게도 나를 상대로 생각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말이야. 너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저쪽에 있는 완전히 다른 상대의 일부를 만나보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이쪽과 저쪽에 동시에 존재하는 상대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을 때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생각도 다시금 하게 되었어.
첫 편지인데 너무 내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았군! 사실 네게 어떻게 저쪽에 있는 뮤를 만나로 갈 수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 내 남자 친구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너무 궁금하다, 스밀레! 네 애기가 꼭 내 애기 같아서 뒷 이야기가 사실 너무 궁금해!
조만간 새로운 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길 바라며...
추신
지금 네가 그 남자 친구와 사귀고 있다면 나도 곧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만약 뮤와 사귄다면 나.. 어쩌냐? 대략 난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