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 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왔나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집은 굶어죽지 않고 먹고 살만한 평범한 가정이고 나는 큰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적절한 곳에 잘 쓰여지고 있고 욕심을 좀 줄인다면 깆고 싶은 것도 그렇게 많지 않다. 

생활에 있어서나 그 밖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집은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괴로웠던 과거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것은 일종의 상처이다. 사실은 별것 아닌데도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지금에 와서 그것이 흉터로 남았다든가 곪았다든가 하고 말하고 싶은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다.  어떤상태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닌지...나는 솔직히 걱정이 된다. 내가 무언가에 빠져 허무한데도 허무함을 못느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확실히 치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내겐 있는가? 사실은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진 않은데도 요즘 많은 책을 읽어선지 기분이나 생각의 상태가 묘한것 같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몇번이고 강조해도 모자랄 만큼 나는 믿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외적인 형식에 매달려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지는 않는지...오늘 큐티를 하면서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의 목적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라는 확신이 있는가? 내가 형식에 매달린 것은 아닌가?

나는 과거 인간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오히려 인간은 신경쓰지도 않는 주의였기 때문에 CCC에 들어와서 때로 인간을 바라보는 그러니까 교제하고 배려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지난 여름 때까지 만해도 그랬다. 교회에서 연합수련회를 갔다. 나와 같이 간 사람은 단 두명. 그애들이 내가 은혜받는 데 방해가 될순 없었다. 그애들은 나와 한몸이었으니까.  그애들의 태도나 생활에 신경을 쓰고 배려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는데 있어서 혹시 부담되진 않을까라고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사실은 별로 배려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서로 그러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너무 친했으니까 부담을 주든 때로 피해라고 할 만한 일을 주는 한이 있어도 우린 별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기도 시간에는 혹시 애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갈까 싶어 기도해주는 적은 있어도 나자신의 은혜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 기도할 시간이 충분했다. 나의 죄, 나의 믿음, 나의 미래, 나의 생각.....

이제 곧 CCC에서 주최하는 개강수련회가 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돈이 없다. 그것은 이유도 안된다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가능한 일이다. 내가 망설이는 것은 내마음의 준비인 것이다. 순장님에게 "많이들  가나요?"라고 여쭤보았다. 순장님은 사람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고 가라고 하셨다. 절대 동감한다. 우리 순장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나는 많이들 간다면 내가 안가고 싶다. 나는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싶다. 물론 은혜를 나누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나의 변화도 그 나눔에서 온 것이 많았다. 하지만 수련회에 가서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날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체들은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하지만 어느정도의 친밀함을 가졌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어디까지 배려해야하고 어디까지가 부담인거지? 어디까지 다가가는 거지? 신경쓰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잔뜩있다. 게다가 주변에서의 일만해도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혹시 내게 화난 것이라도 있나? 혹시 무슨 미안한 일이 있는걸까?  내가 잘 못한건가? 날 싫어하나? 내게 너무 신경쓰는 것은 아닌가? 이사람이 왜 이렇게 하는 거지? 예전에는 혼자생각하고 혼자 판단해서 척척척하고 신속히 끝내버리면 더이상 신경안써도 되는데. 부담일수도 있다. 의논이라는 게 있다. 나눈다는 게 있다. 어떠한 행동과 말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역시 너혼자 다해라는 것은 아닐거다. 알고 있다. 알고 있고 잘 생각해서 어느정도가 적정선인지, 이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왜 이렇게 한건지 판단할 수 있을만하다. 그러나 그렇게 잘 생각하다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할 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단체 생활이란 아직도 너무 어렵다.

나는 자존감이 낮은 것 같다. 나 자신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상황에 따라 생각하는 게 변하는 건 어떤인간이든 매 한가지이지만 나는 더 그런 것 같다.  어떤 친구에게는 나자신을 대부분 드러내고 있지만 동아리 안에서 가끔 나는 내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다. 내 모든 것을 자신있게 드러낼 수 없다. 그렇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때로 부러워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들도 드러낼 수없는 자신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없는 자존감이고 드러낼수 없는 자신이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하나님, 저를 부끄럽게 마소서. 저를 도망치게 하지 마소서. 제가 도망칠 길은 막으시고 바로 제 곁에 버티고 서셔서 함께 가자, 내가 지켜주리라, 내가 보호하리라하고 말씀하소서. 도망치고 숨는 어리석음이 아닌 지혜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가슴을 펴고 주의 자녀다운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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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uk 2004-02-07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얼마나 단체에 민감한가 하면 모르는 사람이나 익숙치 않은 사람과 밥먹으면 체할 정도다. ㅡㅡ정말이지, 걱정되는 민감함이다. 환경이 바뀌면 소화도 안된다. 금식 수련회때는 그런 염려는 없어서 자신있게 갈 수 있었다.
 

<길은 여기에>가 2부로 나뉘어있는 책으로 나는 읽었다. 내가 읽은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길은 여기에>가 아니라 <빛이 있는 동안에>이다. 사실 <빛이 있는 동안에>를 또 따로 빌렸었는데 이럴 줄 알았을면 딴 책을 빌려올 것을 그랬다. 뭐, 여유는 생긴 셈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를 다른 출판사 책으로 또 한번 읽는대도 나쁠 것은 없다. 외국문학의 경우, 나는 되도록이면 여러 출판사것을 비교해서 가장 번역이 맘에 들고 매끄러운 것으로 고르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당히 성가신 고객임이 틀림없다. 지난 번에 집근처의 서점에서 <키다리 아저씨>를 살까하고 보는데 내가 염두에 두었던 베텔스만판이 없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소담것 하고 태동출판사 것을 보여줬는데 난 아무래도 베텔스만이 가장 맘에 들어 결국 사지 못하고 말았었다.

살짝 비교한 바에 의하면 오늘 내가 읽은 <빛이 있는동안에>보다 따로 빌려온 범우사판 <빛이 있는 동안에>의 번역이 더 맘에 든다. 꼼꼼하게 책을 살피는 나를 보고 어제 같이 산책을 간 내 친구는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넌 책 정말 좋아해." 그 말투는 마치 책이 나의 연인이라도 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투여서 난 당황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책...내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어떤 것인지 명확치는 않다. 책을 좋아하는 것인지.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지식을 얻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분명한 것은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거다. 그랬다면 읽진 않고 모아두기만 했겠지. 난 책이 닳고 닳도록 읽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닳게한다면 곤란한 문제고...) 하지만 그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읽는 것을 좋아하는거다. 그러면 왜 빌리지 않고 굳이 사느냐하면...그건 소유욕일까? 어차피 늘 볼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 봤을때 아무래도 소유욕과 닮아있는 듯하다.

<빛이 있는 동안에>를 읽으면서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자기중심적인 인간, 물질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사색이었다.

남의 험담을 하는 부인네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는 이야기, "오늘 재밌었어요."  남험담하는 것이 재미있다!!! 그런데 이웃들의 험담속 주인공이 자기라면 어떨까. "너무해, 섭섭해."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도 그렇게 격분한 일이라면 남도 그럴 것이 당연한데....미우라는 책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자기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죄가 많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남에게 뒷손가락질을 받을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딴은 그럴것이다. 왜냐하면, 전술 한 것처럼 우리들은 항상 척도를 두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하는 일은 아주 나쁘다." "내가 하는 일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이 두개의 저울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중심'인 것이다. 자기중심의 척도로 매사를 저울질하는 한 자기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석은 "자기가 하는일은 그리 나쁘지 않다."라는 척도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라는 척도를 지니고 있는사람도 있는 것이다.....>

<...."도둑과 남의 욕을 하는것과 어느쪽의 죄가 더 큰가."라는 문제다. 우리교회의 목사는 어느날 설교때, "남의 욕을 하는 죄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귀중한 물건을 도난당해도 그것은 "값비싼 것인데 아깝군." "기념으로 아무개한테 얻은 것인데 섭섭하군."이정도로 아픔이 진정될 것이다. 도둑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그리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남에게 욕을 먹고 죽은 노인의 이야기와 소년소녀의 이야기는 자주들었다. "우리집 할머니는 음식에 욕심이 있어. 저렇세 늙어도 밥을 세공기나 먹어요."라고 뒷구멍으로 욕을 한 며느리의 행위를 분개하여 그 후 일절 음식을 거부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 "A양과 B군은 수상한 사이다."라는 말에 죽음으로 항의한 이야기............우리들이 별뜻도 없이 하는욕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태어나는 어린애를 정신박약아로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즉, 악의 힘이다. 도둑처럼 단순한 죄와는 다르다. 더욱 가증스럽고 검은 죄다.......적의, 시기, 증오. 우월감, 경박 기타 여러가지 생각이 욕설과 험담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세상에서 남에게 욕설을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죄많은 인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죄많음에 가슴아파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죄다." 라고 나는 썼다. 이렇게 쓰면서도 나는 내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함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역시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를 생각하며 나의 오만함에 슬퍼졌다. 나는 지식을 얻기를 좋아한다. 사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토론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어떤가. 내가 하는 토론은 나라를 위한 것인가, 주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위한것인가.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겸손할 수 있다면 칭찬받지 않아도 좋다. 여기서조차도 나는 나의 가진 지식을 동원해 "어거스틴은 신앙의 요체를 첫째도 둘째도 겸손이라 했다."할 수도 있는거고 그냥 겸손은 중요하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말하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나의 지식의 자랑인가 진정 강조함인가? 나의 말함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진정 오만한 자인지 모른다.

미우라의 자유에 대한 생각도 정말 주님께서 주신 지혜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 자유도 있지만 용서할 자유도 있다. 하루를 게으르게 지낼 자유도 있지만 근면하게 지낼 자유도 있다. 처자가 있는 사람을 사랑할 자유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남편을  배반할 자유도 있지만 배반하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의 생리는 매일 이러한 자유속에 있으며 그 어느것을 선택하는가는 완전히 우리들의 자유인 것이다. 인간이 지녀야할 자유란 어느 것을 올바르게 선택하는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성욕에서도 금전욕에서도 명예욕에서도 완전히 자유가 못된다면 우리들은 즉시 사랑의 포로, 육욕의 포로, 금전의 포로, 명예욕의 포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포로에게는 전연 자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혼자서는 전혀 자유를 누릴수 없는 존재임이 확연하다. 자유하다고?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절로 움직이는 눈, 손, 입술..."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었는데...."후회하는 인간들....인간의 인간적인 모습이란 결국 그런것이다.

소위 기분풀이라고 하는 무의미한 것들에 대한 고찰도 나와있었다.

<어느 청년은 매일 매일이 몹시도 즐겁다고 한다. 매일 직장에서 퇴근시에는 공놀이 실내 경기를 즐긴다고 한다. 이것이 즐겁다고 한다. 나는 물어보았다. "허무하다고 생각해 본일은 없습니까?" "예 조금도."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어깨에 병을 얻었다. 즐기는 공놀이를 못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는 몹시 섭섭해 했다. "너무도 심심하여 매일이 허무하기만 합니다." 나는 그것이 인생의 진상이고 참된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허무한 인생을 실내 공놀이로 잊고 있었음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서 공놀이가 제거되자 무엇이 남았는가. 허무만이 남은 것이다..............또, 파스칼은 이렇게도 말했다. 기분풀이는 확실히 우리들의 처참한 상태를 위로는 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또, 우리들의 처참함을 최대의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우리들의 진실한 반성을 방해하고 우리들을 우리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멸망시켜 버리기 때문이다ㅡ라고.>

무의미와 허무...이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예전에 말한바가 있듯이 그림을 그렸던 과거가 있었다. 하루라도 안그리면 손에 가시가 돋힐수도 있을만큼 매일매일 계속해서 그렸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그러나 어느날 그리지 않게 되었다. 무엇인가? 그리지 않아도 나는 살 수 있었다. 너무도 태연스럽게 살수 있었다. 오히려 나는 그리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웠다. 그렇게 그려왔던 과거가 허무할 만큼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주님, 제가 그려왔던 과거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제게 어떤 미래가 있기에 과거에 그렇게 그려대도록 놔두셨습니까? 차라리 그림이 아닌 드럼이나 기타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면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 쓰였을텐데 왜 이렇게 그리지 않고도 아무렇지도 않을만큼 허무한 과거를 놔두셨습니까? 제가 만화부에서 활동하는것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 주님의 계획에 뭔가 중대한 역할이 있었던 겁니까?"

나의 욕심으로 시작할 일은 언제나 끝이 허무하곤 했다. 그랬던 과거조차 쓰이고는 있지만 내가 이렇게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가는 또 생각할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하는 모든일이 다 실수고 무의미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결국 쓸곳에 쓰실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이글을 마지막으로 내가 죽는다해도 내 임무이고 내게 맡겨진 뜻이었다면 천국행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이런 예를 들어본 기억이 있다. 세상에 시계가 처음 만들어 졌을적 그것은 만든사람밖엔 사용방법을 몰랐을 것이다라는. 하물며 인간일까. 인간은 모두가 다르다. 모두가 사용방법도 사용할 곳도 다르다. 이런 인간이니까 이런 인간 하나하나 다 만든 분한테 물어볼 도리밖에 없다. 그게 싫어서 열심히 헤메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방법을 찾겠다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존재의미란 스스로 찾는다고 찾다가 괜한 시간낭비한 사람의 표본이 아닌가도 싶다. 철학자의 모습이 우스울때가 가끔있다. 존재의미니 목적이니 하고 열심히 찾는다고 찾는다. 그리고 찾는 그 방법을 정립한다고 정립한다. 결국은 방법은 정립하고 답은 못찾고 죽는다. 후대에 다른 사람이 그 방법대로 답을 찾아본다고 찾는다. 그러나 이를 어쩔것인가. 인간은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르므로 방법도 답도 다 다르다. 아무리 많은 철학을 공부한다해도 선대의 답도 자신의 답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존재의미를 아는 이는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고 사상가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의미부터 찾아야할 것이다. 나의 존재의미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이집트 왕자>에서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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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운동하기전부터 졸립더니 오늘은 산책 중에도 졸았다. 오늘 산책은 특별히 친구와 함께였는데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사줘서 그때부턴 안졸렸다. 근데 지금 또 졸립다. 왜 이런지 알수 없다.ㅡㅡZzz

눈에 뭐가 났길래 안과를 갔다. 근데 집근처에 아무리 찾아도 안과가 없었다. 2시간정도를 헤매서 겨우 좀 멀긴하지만 그래도 결국 안과를 찾아갔는데 큰이상은 없었다. 선생님하시는 말씀이 다래끼의 전단계라고 할수 있단다. 분비선이 막혔다고 한다. 왜 막힌거지...? 내가 피곤했나 보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하긴 하는일 없이도 눈이 피로할 만하다. 컴퓨터도 맨날켜고...책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마구 읽어제낀다. 뭐, 할 줄 아는게 책읽기 밖에 없으니...ㅡㅡ 눈이 피로할 만하다. 눈을 좀 쉬게 해줘야겠다.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 난 알고 있다. 하긴 모든 지체는 다 소중하다. 너무 소중해서 한군데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몸보다 중요한건 마음이고 그보다 중요한건 영혼인것 같다.

오늘은 눈을 위해서 평소보다 일찍 자야겠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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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펄펄 내려 쌓이고 있다. 또 얼마 내리다 그치겠지 싶었는데 이불 안 널기를 잘 한것 같다.

 오늘은 학교에 갔었다. 시간표책자도 가져오고(인터넷으로 볼수도 있긴하지만...)책도 빌리고...도서관에서 알바하는 언니도 만났다. 언니가 밥을 사줘서 배빵빵하게 먹었다.^^ 원래 난 양이 적어서 이렇게 많이 먹은 것은 오랜만이다. 밥을 적게 달라고 해서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소화가 덜된것 같은듯...;;그래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

시간표는 다 짜두었다. 이번에 복수전공을 할거라서 아동벤처학과것을 많이 들었다. 그래봤자 3과목이긴 하지만 그것도 우습게 3과목다 목요일에 몰렸다. 3학년것도 듣기로 했다. 3학년때는 2학년 것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월요일은 사회복지법제를 듣는데 이게 젤 어려울 것 같다. 선입관인가?ㅡㅡ 성공하는 리더들의 7가지 법칙도 있었다. 1-2교시로 듣는 것은 이것 뿐이고 나머지는 다 3교시 이후로 들으려고 한다. 이번에는 이렇게 미리 준비해서 듣고 싶은 것을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대되는 것은 아동미술이라는 아동벤처학과 전공인데 미술에 관심이 있었던 나였던지라 좀 기대가 된다. 재밌을 것 같다.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3권 빌렸다. 미우라 아야꼬의  <길은 여기에>,<빛이 있는 동안에>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완역판이다. 난 완역판이라는 것에 항상 매력을 느껴왔다. 정식으로 정신분석을 접해보는 것은 처음인데 신간책꽂이에서 이책을 발견해 낸 것은 참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은...프로이트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심리학의 기초학문이니 공부해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빌린 책들은 23일에 갖다 줘야 한다. 빌려 보고 싶은 책들이 많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읽어보고 있던 <안녕, 기요시코>를 덮고 <길은 여기에>를 책받침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읽기 시작하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나를 확 사로잡았다. 미우라가 이런 작가였던가. 놀랍게 생각했다.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같은 책인데 난 <빙점>보다 흥미롭게 읽었다.하마터면 또 한꺼번에  확 읽어버릴뻔했다. 안되지, 안돼하고 음미하며 읽어야겠다는 다짐하에 억지로 책을 덮었다. 아마도 이책....안 사고는 못배길 듯하다.ㅡㅡ 3장까지 밖에 안 읽었는데 벌써 팬이 되어가는 중이다.

오늘 하루도 너무 감사한날~^^너무나 많은 행운이 있는날...아름다운 눈이 내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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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uk 2004-02-06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은 여기에>는 2부로 나눠져 있다. 그중에 1부는 <빛이 있는 동안에>로 따로 나오고 2부는 <길은 여기에>라고 불린다. 책을 왜 이렇게 구성해 놨는지...?ㅡㅡ그러니까 난 오늘 <길은 여기에>1부인 <빛이 있는 동안에>를 다 읽었다. 이에 관해서는 저녁에 일기로 쓰고자 한다.
 

성경에 화를 더디 내는 자는 복이있다고 했다. 화를 내지 않을 수록 좋다는 걸 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다. 화를 낸다고 해도 화가 난것처럼 보이지 않는게 더 흔할거다. 소심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편이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상처받는것만큼이나 상처주는 게 싫다. 나의 짧은 생각과 어리석음으로 상처를 줄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까운 사이가 되면 화도 내게 된다. 솔직하게, 서로의 감정을 교류한다. 심리학과 인간관계를 배우면서 알았는데 그건 당연한 것이다. 친할 수록 더 다정하고 친절한게 아니라 서로의 깊은 감정, 곧 분노와 미움까지도 교류한다는 걸 알겠다. 실제로 화난 모습은 그 사람의 본성을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친한사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본성을 드러내겠는가?

난 내가 화낼때의 모습이 어떤가 잘 모르겠다. 예전에 내가 나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할때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마구 자해를 하기도 했다. 쥐어뜯고 한다기보다 명색(?)의 태권도인(?) 답게(ㅡㅡ;;) 정권으로 벽치기, 샌드백 두들기기 등등....가끔 손에 붕대를 감고 등교하는 바람에 싸운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ㅡㅡ 정말이지 난 좀 거친아이였다. 그렇게 할 수 없을때는 손등을 물어뜯기도 했다. 때론 시퍼런 멍이 들 정도였다. 정말이지, 난 신경질적인 아이였나 보다.ㅡㅡ 지금은 모두 없어진 버릇이다. 별로 화낼일이 없다. 화나는 것도 없고...가끔 화났을 때는 몰래 숨어서 운다. 내 성격이 정말 좋은 쪽으로 변한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또 어떤때는 드러나게 화내고 싶을 때가 있다. 거의 항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다고나 할까. 그럴때는 말을 안한다. 입을 열지 않는다. 본척만척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루도 안지나서 풀어진다. 이럴때는 참 나지만 속도 좋다.ㅡㅡ하지만 때론 절대 용서할 수 없는게 있다. 미안하다는 말로도 안되는...또 내가 용서한 것만으로는 안되는 것도 있다. 참 그럴땐 착찹하다. 용서한다는것은...때로 쉬운일이 아니다. 화내는 것 또한 그렇다. 난 반드시 화내야 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있을수 있다. 하나님을 욕하는것 용서할수 없다. 부모님을 욕하는 것도 용서할 수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친다면 용서할 수 있을것 같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사람을 내가 용서하지 않을 순 없는거니까.

다이어리 뒤쪽에 이런 것을 써놨다. 내 나름대로의 화내는 원칙이다.

1. 욕하지 않는다.

2.인신공격하지 않는다.

3.폭력을 쓰지 않는다.

4. 정중하게 (존댓말을 쓰면 좋다.)말한다.

5.화내기 전에 짧게 기도하고 화가났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한다.

내가 이 규칙들을 잘 지킬 수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욕하지 않고 폭력안쓰고 정중하게 말하기는 자신있는데 나머지는 화가 난 나머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해버린다면 어떡하지?ㅡㅡ^ 되도록 규칙을 상관하지 않을정도로 화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화내는 것은 혹은 싸우는 것은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가고 친해져가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화내고 싸움으로 해서 떠나고 헤어질것이라면 인격과 인간관계를 버리는 것밖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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