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여기에>가 2부로 나뉘어있는 책으로 나는 읽었다. 내가 읽은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길은 여기에>가 아니라 <빛이 있는 동안에>이다. 사실 <빛이 있는 동안에>를 또 따로 빌렸었는데 이럴 줄 알았을면 딴 책을 빌려올 것을 그랬다. 뭐, 여유는 생긴 셈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를 다른 출판사 책으로 또 한번 읽는대도 나쁠 것은 없다. 외국문학의 경우, 나는 되도록이면 여러 출판사것을 비교해서 가장 번역이 맘에 들고 매끄러운 것으로 고르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당히 성가신 고객임이 틀림없다. 지난 번에 집근처의 서점에서 <키다리 아저씨>를 살까하고 보는데 내가 염두에 두었던 베텔스만판이 없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소담것 하고 태동출판사 것을 보여줬는데 난 아무래도 베텔스만이 가장 맘에 들어 결국 사지 못하고 말았었다.
살짝 비교한 바에 의하면 오늘 내가 읽은 <빛이 있는동안에>보다 따로 빌려온 범우사판 <빛이 있는 동안에>의 번역이 더 맘에 든다. 꼼꼼하게 책을 살피는 나를 보고 어제 같이 산책을 간 내 친구는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넌 책 정말 좋아해." 그 말투는 마치 책이 나의 연인이라도 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투여서 난 당황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책...내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어떤 것인지 명확치는 않다. 책을 좋아하는 것인지.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지식을 얻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분명한 것은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거다. 그랬다면 읽진 않고 모아두기만 했겠지. 난 책이 닳고 닳도록 읽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닳게한다면 곤란한 문제고...) 하지만 그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읽는 것을 좋아하는거다. 그러면 왜 빌리지 않고 굳이 사느냐하면...그건 소유욕일까? 어차피 늘 볼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 봤을때 아무래도 소유욕과 닮아있는 듯하다.
<빛이 있는 동안에>를 읽으면서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자기중심적인 인간, 물질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사색이었다.
남의 험담을 하는 부인네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는 이야기, "오늘 재밌었어요." 남험담하는 것이 재미있다!!! 그런데 이웃들의 험담속 주인공이 자기라면 어떨까. "너무해, 섭섭해."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도 그렇게 격분한 일이라면 남도 그럴 것이 당연한데....미우라는 책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자기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죄가 많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남에게 뒷손가락질을 받을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딴은 그럴것이다. 왜냐하면, 전술 한 것처럼 우리들은 항상 척도를 두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하는 일은 아주 나쁘다." "내가 하는 일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이 두개의 저울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중심'인 것이다. 자기중심의 척도로 매사를 저울질하는 한 자기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석은 "자기가 하는일은 그리 나쁘지 않다."라는 척도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라는 척도를 지니고 있는사람도 있는 것이다.....>
<...."도둑과 남의 욕을 하는것과 어느쪽의 죄가 더 큰가."라는 문제다. 우리교회의 목사는 어느날 설교때, "남의 욕을 하는 죄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귀중한 물건을 도난당해도 그것은 "값비싼 것인데 아깝군." "기념으로 아무개한테 얻은 것인데 섭섭하군."이정도로 아픔이 진정될 것이다. 도둑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그리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남에게 욕을 먹고 죽은 노인의 이야기와 소년소녀의 이야기는 자주들었다. "우리집 할머니는 음식에 욕심이 있어. 저렇세 늙어도 밥을 세공기나 먹어요."라고 뒷구멍으로 욕을 한 며느리의 행위를 분개하여 그 후 일절 음식을 거부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 "A양과 B군은 수상한 사이다."라는 말에 죽음으로 항의한 이야기............우리들이 별뜻도 없이 하는욕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태어나는 어린애를 정신박약아로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즉, 악의 힘이다. 도둑처럼 단순한 죄와는 다르다. 더욱 가증스럽고 검은 죄다.......적의, 시기, 증오. 우월감, 경박 기타 여러가지 생각이 욕설과 험담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세상에서 남에게 욕설을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죄많은 인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죄많음에 가슴아파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죄다." 라고 나는 썼다. 이렇게 쓰면서도 나는 내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함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역시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를 생각하며 나의 오만함에 슬퍼졌다. 나는 지식을 얻기를 좋아한다. 사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토론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어떤가. 내가 하는 토론은 나라를 위한 것인가, 주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위한것인가.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겸손할 수 있다면 칭찬받지 않아도 좋다. 여기서조차도 나는 나의 가진 지식을 동원해 "어거스틴은 신앙의 요체를 첫째도 둘째도 겸손이라 했다."할 수도 있는거고 그냥 겸손은 중요하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말하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나의 지식의 자랑인가 진정 강조함인가? 나의 말함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진정 오만한 자인지 모른다.
미우라의 자유에 대한 생각도 정말 주님께서 주신 지혜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 자유도 있지만 용서할 자유도 있다. 하루를 게으르게 지낼 자유도 있지만 근면하게 지낼 자유도 있다. 처자가 있는 사람을 사랑할 자유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남편을 배반할 자유도 있지만 배반하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의 생리는 매일 이러한 자유속에 있으며 그 어느것을 선택하는가는 완전히 우리들의 자유인 것이다. 인간이 지녀야할 자유란 어느 것을 올바르게 선택하는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성욕에서도 금전욕에서도 명예욕에서도 완전히 자유가 못된다면 우리들은 즉시 사랑의 포로, 육욕의 포로, 금전의 포로, 명예욕의 포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포로에게는 전연 자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혼자서는 전혀 자유를 누릴수 없는 존재임이 확연하다. 자유하다고?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절로 움직이는 눈, 손, 입술..."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었는데...."후회하는 인간들....인간의 인간적인 모습이란 결국 그런것이다.
소위 기분풀이라고 하는 무의미한 것들에 대한 고찰도 나와있었다.
<어느 청년은 매일 매일이 몹시도 즐겁다고 한다. 매일 직장에서 퇴근시에는 공놀이 실내 경기를 즐긴다고 한다. 이것이 즐겁다고 한다. 나는 물어보았다. "허무하다고 생각해 본일은 없습니까?" "예 조금도."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어깨에 병을 얻었다. 즐기는 공놀이를 못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는 몹시 섭섭해 했다. "너무도 심심하여 매일이 허무하기만 합니다." 나는 그것이 인생의 진상이고 참된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허무한 인생을 실내 공놀이로 잊고 있었음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서 공놀이가 제거되자 무엇이 남았는가. 허무만이 남은 것이다..............또, 파스칼은 이렇게도 말했다. 기분풀이는 확실히 우리들의 처참한 상태를 위로는 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또, 우리들의 처참함을 최대의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우리들의 진실한 반성을 방해하고 우리들을 우리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멸망시켜 버리기 때문이다ㅡ라고.>
무의미와 허무...이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예전에 말한바가 있듯이 그림을 그렸던 과거가 있었다. 하루라도 안그리면 손에 가시가 돋힐수도 있을만큼 매일매일 계속해서 그렸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그러나 어느날 그리지 않게 되었다. 무엇인가? 그리지 않아도 나는 살 수 있었다. 너무도 태연스럽게 살수 있었다. 오히려 나는 그리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웠다. 그렇게 그려왔던 과거가 허무할 만큼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주님, 제가 그려왔던 과거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제게 어떤 미래가 있기에 과거에 그렇게 그려대도록 놔두셨습니까? 차라리 그림이 아닌 드럼이나 기타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면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 쓰였을텐데 왜 이렇게 그리지 않고도 아무렇지도 않을만큼 허무한 과거를 놔두셨습니까? 제가 만화부에서 활동하는것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 주님의 계획에 뭔가 중대한 역할이 있었던 겁니까?"
나의 욕심으로 시작할 일은 언제나 끝이 허무하곤 했다. 그랬던 과거조차 쓰이고는 있지만 내가 이렇게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가는 또 생각할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하는 모든일이 다 실수고 무의미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결국 쓸곳에 쓰실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이글을 마지막으로 내가 죽는다해도 내 임무이고 내게 맡겨진 뜻이었다면 천국행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이런 예를 들어본 기억이 있다. 세상에 시계가 처음 만들어 졌을적 그것은 만든사람밖엔 사용방법을 몰랐을 것이다라는. 하물며 인간일까. 인간은 모두가 다르다. 모두가 사용방법도 사용할 곳도 다르다. 이런 인간이니까 이런 인간 하나하나 다 만든 분한테 물어볼 도리밖에 없다. 그게 싫어서 열심히 헤메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방법을 찾겠다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존재의미란 스스로 찾는다고 찾다가 괜한 시간낭비한 사람의 표본이 아닌가도 싶다. 철학자의 모습이 우스울때가 가끔있다. 존재의미니 목적이니 하고 열심히 찾는다고 찾는다. 그리고 찾는 그 방법을 정립한다고 정립한다. 결국은 방법은 정립하고 답은 못찾고 죽는다. 후대에 다른 사람이 그 방법대로 답을 찾아본다고 찾는다. 그러나 이를 어쩔것인가. 인간은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르므로 방법도 답도 다 다르다. 아무리 많은 철학을 공부한다해도 선대의 답도 자신의 답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존재의미를 아는 이는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고 사상가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의미부터 찾아야할 것이다. 나의 존재의미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이집트 왕자>에서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