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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야말로 카프카였다.
그간 도시적이면서도, 실존의 고민을 놓치지 않는, 20세기말의 고리끼 같은 행보를 걸어 왔던 하루끼가
살짝도 아닌, 휙 몸을 틀어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보인 것이다.
결론은, 비틀다 만 그의 방향타는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아닌
판타지의 옷을 빌려 입은 21세기초의 랭보를 낳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1권까지는 훌륭했다. 물론 일본에서 출간될 때는 단권이었던 것 같으니, 권 구분은 의미가 없을 테고,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이는 카프카 군과 나카타 상의 오딧세이가 어느덧 접점을 찾아가고, 무언가 실마리를 보이는 듯한 부분까지 그렇다는 말이겠다.
아마, 하루끼는 그런 걸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불분명한 것, 정의하지 않은 것, 의미가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것의 불안정성, 그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형식까지 내용과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이 되겠지만, 이번 경우는
내용과 주제를 너무도 그대로 옮긴 듯한 어정쩡한 형식은
'경계'와 '운명' '시간성'에 대한 사유, 혹은 인과적인 룰에 지배되고 있는 지금의 사회에 대한 성찰, 이라는 어찌 보면 거창하지만, 어찌 보면 단순할 수도 있는 주제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그 주제를 살려내는 데 일조하기보다는, 더 밋밋하게 만드는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 비극이 훌륭한 것은, 본격 문학, 흔히 얘기하는 마스터피스 격의 작품들이 훌륭한 것은, 그 극한의 치열함과 실존의 아슬아슬함을, 수사학이 아니라, 삶으로, 몸으로 느낄 수 있게, 고민할 수 있게 이야기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류를 표방하고자 했던 것 같은 <해변의 카프카>는, 적어도 내 경우에는, 더 고민을 지속하게도, 깊이 들어가게도, 혹은 앙금으로 남아 있게도 하지 못했다.
줄곧 고민이 들었다.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늘어지는 이야기, 반복되는 묘사, 혹시 이야기가 그냥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과 불안감...(물론 한꺼번에 쭉 읽지 않은 탓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적어도, 책에서 진한 고딕으로 표시한 추상적 어휘들의 의미들처럼, 형이상학의 세계를 이 땅으로 끌어내려 보려는 하루끼의 의도가 결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건 진한 고딕이라는 형식적 한계처럼, 그저 '나는 그렇게 정의하고자 한다'는 지극한 자아도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어떠한 울림도, 문학적 떨림도 전해 주지 못했다.
이 작품이 과연 장르의 공식을 더 충실하게 따라가거나, 혹은 일정 정도는 비틀되, 어쨌든 이야기의 구체성을 더 획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은 계속 들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하루끼는 그러지 않았을까. 자신은 당연히 남들과 다른 작품을 쓴다고.
하지만, 미스터리, 판타지의 아주 얇은 외피만 두르고, 실존적 고민과 비극을 남발하는 이야기는 지나친 반복과 변죽만 울리는 형상화, 분위기 연출의 극대화로, 두르지 아니함만 못한 결과를 낳은 듯하다.
또한 장르적 공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이야기의 구체성만 조금 더 획득했더라면, 플롯의 정합성만 조금만 더 획득했더라면 아쉬움은 더 크다.
솔직히, 나카타상이 어릴 적 경험했던 초현실적인 현상이 무엇인지, 사에키 상이 입구를 열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였던 것인지, 카프카의 아버지는 그 중 어떤 경계에 있었던 것인지 등이 좀 더 명확했다면 더 재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시시콜콜하게 가르쳐 주는 것은 유치한 짓이라고 비웃는 듯, 이 작품은 모두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카프카, 오시마, 사에키가 늘어놓는 사변이 더 유치하게 느껴지는 것을.
어쨌든 마무리를 짓자면, 여러 모로 아쉬운 작품이다.
그간 하루끼 초기작과 최근 오래간만에 읽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좋게 봤던 독자로서, 나름 지지자로서(최근 일련의 지긋한 평론가들이 과대평가된 작가라면 평가절하를 요구하고 있는 시점에),
이상하게 나와는 맞닿지 않는 의욕과잉이, 하루끼의 새로운 시도에 흠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로서는,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인 오시마와 카프카, 그리고 묘한 지점에 놓여 있는 최고의 캐릭터 커플인 나카타와 호시노, 또한 스테레오이면서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사에키, 사쿠라...
이렇게 멋진 캐릭터들을 창조해 놓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다.
더구나 초반의 절묘한 이야기 흐름까지 생각한다면 더 아쉬운 것이다.
그러기에 한 번 더 기대해 보련다.
같이 샀던 <어둠의 저편>이 어떠한 모습을 보일지.
그래도 난 여전히 '하루끼는 과대평가되었다'고 평가절하하는 저 높으신 국내 평론가들보다 하루끼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