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저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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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혼자만의 공간일 수 있었던 조그마한 다락방.
제대로 다리를 펴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수납창고만한 다락은, 소녀에게는 더 없이 편안하고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그 곳에서 소녀는 미래의 꿈을 상상하고 혼자만의 독서에 심취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 그 소녀가 한창 빠져 있었던 것이 셜혹홈즈 시리즈, 뤼팡 시리즈였다. 얇은 문고본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시리즈물이 어찌나 긴장되고 흥미로웠던지, 마치 스스로 탐정이나 된 양 함께 사건을 풀어가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러봤지만 그게 가당티나 했나. 늘 마지막 반전에 와와~~감탄만 했었다.

나에게 탐정물은 그런 애잔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장르다.
하지만 역시나 시대는 변하고 추리소설은 더 이상 탐정놀이만으로 인기를 끌지 못한다. 모든 것을 꽤뚫는 해결사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수수께끼를 풀고, 범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모든 정황을 실토해버리는 상황은 작위적이고 현실성없다고 까다로운 독자들에게 점점 외면 당하고 있다. 좀 더 스릴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사건과 캐릭터. 비틀어진 현실세계에 대한 반영, 더 이상 해피엔딩이 아닌 반전, 또는 톡톡 튀는 새로운 설정과 재미 등. 지금의 추리소설은 복잡미묘하게 여러부분이 얽혀있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내 시야가 이제는 다락이 아닌 좀 더 넒은 세상으로 펼쳐졌기에 이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비웃듯 탐정의 세계는 언제까지나 건재할지도 모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는  비극적인 사건과 수수께끼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뜨거운 인간성을 느낄 수 있어 좋아한다. 그들은 단순히 악인도 선인도 아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이며, 그렇기에 원치않는 많은 비극들과 맞닿게 된다. 작가는 사건의 발생과 그 해결과 결말에 달려가는 듯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느껴져 그의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는 탐정세계는 어떨까? 많은 독자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소설이라는 건 얼핏 알고 있었다. 솔직히 책장 사이에서 이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일부러 찾았을 일도 없었을거다. 전작 <명탐정의 규칙>을 읽어보지 않아 망설여졌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자 생각하고 뽑아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에필로그를 읽고 나름 기대감을 안고 책장을 계속 넘겼다. 하지만...읽으수록 '어? 이거뭐지?' '.....장난하냐?' 조금씩 배신감이 밀려들어왔다. 과거 봐왔던 탐정물(그는 이 소설에서 본격 추리라고 명했지...)의 패턴을 보란듯이 나열해 놓았다. 마치 작가가 의도적으로 대놓고 적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밀실 살인이니 폐쇄된 산장이니...거기다 이건 그냥 탐정소설마을이다. 그 속의 인물들만 모르고 있다. 하지만 후반에 접어들면서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명탐정의 저주>를 쓴 1996년을 기점으로 본격 추리의 상투성을 모두 배제하고 추리소설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는 기사가 있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본격 추리 소설에 마지막을 고하는 자전적 소설인 셈이었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며 “명탐정 따위의 우스운 캐릭터는 이쯤에서 죽어 줘야겠어”라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그. 그는 시대가 변하는 걸 한발 앞서 깨닫고 자신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글 속에서 "리얼리티,현대적 감각,사회성 이 세가지를 큰 축으로 삼고 싶어요.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추리 소설계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트릭이라든지 범인 알아맞추기 따위로는 어렵습니다."라고 직접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본격 추리를 사랑했고 그 세대 사람들처럼 그 속에 추억을 잔득 가지고 있었던 것일테다. 이 소설은 그가 가진 본격 추리에 대한 애증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그 마을에서의 마지막 시간...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까?


간단한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소설가는 어느날 도서관에서 길을 잃고 어떤 세계로 이끌려간다. 그곳에서 자신은 덴카이치라는 탐정으로 알려져있고, 그 역시 이상하게도 자신이 탐정으로서 해결해온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마을의 시장을 만나 도굴당한 마을의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된다. 그는 도굴품과 연관된 사람들을 한명씩 만나기로 하는데 번번히 그와의 약속장소에서 차례차례 죽음을 당한다. 사라진 도굴품은 마을의 비밀을 풀 열쇠임에 틀림없고 그 비밀은 마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된 것인데...사건의 관련자들과 모두 모인 별장에서의 밤. 차례차례 의문의 살인을 당하고, 결국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덴카이치는 마지막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선다. 그리고 오래 전 숨겨왔던 마을의 진실이 밝혀진다.


소설의 마지막,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 이어진다.
[꽤 오래전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 그것이 행복이었다. 그 세계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관심없었다. 나 자신이 기분 좋게 놀 수 있는 곳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감정을 잊어버린 게 언제부터인지 생각해 보았다. 너무도 아득한 옛날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모래 사장에 성을 쌓고 있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눈 같은 건 개의치 않는다. 그 아이의 성은 그 아이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나는 지난날 내가 만들었던 몇 개의 모래성을 떠올렸다. 슬프게도 나는 그 성들을 모조리 내 발로 밟아 무너뜨렸다. 그때 내가 내뱉은 말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 형편없는 것들, 이 유치한 것들, 이 비현실적인 것들, 이 부자연스러운 것들...." 그렇게 고함쳤다. 나는 내 스스로 애써 만든 성을 마치 과거의 수치인 양 느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까지도 모두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이야기 자체의 긴장도나 구성에서는 실망한 소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소설이었다. 급변하는 시대, 변해가는 건 패션과 기술, 기계들 뿐만이 아니다. 문학 또한, 아니 문학이야 말로 시대의 흐름에 한 발 앞서 걷지않는다면 도태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딘지 모색하고 협상할 줄 아는 작가이기에 지금의 자리에 설 있을 수 있는 것일테다. 또 다른 면에서 많은 것을 배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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