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아야세 마루의 단편집 [치자나무]에는 떠나간 연인을 대신해, 그의 일부이자 마지막 선물인 한쪽 팔과 함께 사는 여자(치자나무), 운명이라 믿었던 사랑이 한낱 몸속에 기생하는 벌레로 인한 환상이었을을 알게 된 부부(꽃벌레),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꽃밭처럼 닿을 수 없는 것만 사랑하고 마는 두 남녀(사랑의 스커트), 남자와 여가자 낮과 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랑하면서도 서로에게 너무 먼 존재가 되어버린 부부(짐승들), 평생을 가족에게 헌신하다 공허함과 권태로움으로 이민자 소년과의 아슬아슬한 '인형 놀이'에 빠져드는 중년 부인(얇은 천), 남편이 불륜 상대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이혼을 감행하고 홀로서기에 나선 아내(가자와 여주), 종족 보존을 위해 산란을 마치고 죽음을 맞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홀로 독신으로 남아 치구들의 삶과 죽음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여자(산의 동창회). 이들의 각기 다른 삶과 사랑에 대한 총 7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지만 기괴하고 기발한 설정에 거부감을 느낄 사람도 분명히 있을 듯 하다. 가볍고 간질간질하게 볼 사랑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 그로데스크하고 공포감마저 드는 사랑의 이야기야 말로 우리 인생 속 사랑이라는 녀석의 민낯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짧은 페이지 속 이야기가 이토록 묵직하고 철학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만큼의 묵직한 설정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치자나무> 속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 일부분만으로도 만족하며 삶을 유지하는 여자와 남편의 모든것은 오로지 나의 소유라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편과 불륜녀에게 분노하지만 결국 남편의 신체를 돌려받기 위해 자신의 팔을 내어주는 아내의 심정은 무엇일까. 증오와 복수마저도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욕과 집착. 그 역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당신은 믿고 싶지 않지?그렇게 그로데스크하고 지독한 일이 설마 나에게 일어날 리가 없다고,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난 이제껏 수없이 봐왔어. 부조리와 폭력은 어떤 인간의 인생에나 아주 똑같이, 가볍게 나타나. 나와 당신에게는 그게 오늘이었던 것뿐이야.

[치자나무] 꽃벌레 중

흔히들 콩깍지가 씌였다고 표현한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내 모든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함께 미래를 꿈꾸고...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우린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수한 것만 보려하지만 실제의 삶 속은 그렇지 않다. <꽃벌레>에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들이 몸 속에 기생하는 벌레로 인한 환상이라는 그 설정만 빼고 보면 이 이야기 역시 삶과 아주 닮아 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서로의 유효기간이 일치하지 않다는 것...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비애이고 감내해야 할 고통일 것이다.

안다는 건 무엇일까. 공원을, 마을을, 공장을, 시스템을 알고는 있지만 나는 낮의 세계를 모른다. 모르는 채 사랑하고, 모르는 채 멀어져서, 안개가 깔린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처음 만난 남편과 둘이서 어두운 길을 걸었을 때 느꼈던, 처음으로 세계와 올바로 손잡은 듯한 행복감은 피부에 스며들어 잊을 수 없었다.

[치자나무] 짐슬등 중

서로를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가 동일해질 수는 없다. 하지만 잠시 잡았던 그 손에서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나를 기댈 수 있다면 어쩌면 그와는 나의 세계를 조금 공유해보는 것도 좋지않을까하고 선택하는 게 결혼이 아닐까? 서로가 모르는 세계 속에서 우린 추악하고 나약한 또 다른 존재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때로는 나를 감추고 숨겨야만 유지되는 사랑...그 역시도 존재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과연 모든 걸 보여주는 게 진정한 사랑일까?

책 후반부의 단편들은 중년여성의 삶의 모습을 통해 사랑의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 역시 아이를 낳고 나란 존재가 잊혀지고 있는 일상 속에 지내다 보니 많이 공감이 가고 이해되는 이야기였다. <얇은 천>에서 오로지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아온 주부의 공허함...하지만 이 주부의 아슬아슬한 일탈이 짜릿하지만은 않다. 그 일탈 속에서도 그녀는 그 작고 보드라운 존재를 보호하고 아껴주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녀는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그녀를 필요로 해주길 바란것이 아닐까? 존재의 의미...사랑은 어찌보면 내가 그 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가지와 여주>의 주인공은 남편이 불륜녀와 교통사고로 사망해 버렸지만 이혼까지 감행한 것이리라. 남편이 이미 죽고 없는데 이혼을 굳이 꼭 해야만하나....하겠지만 그 본연의 의미는 다를 것이다. 진정한 홀로서기란 그런 것이다.

책의 마지막 단편 <산의 동창회>에서는 이 수많은 비틀린 사랑의 모습들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종족을 이어가는 우리의 삶... 그 속에 숨겨진 희생과 고통을 기발한 설정으로 담아냈다. 교미와 산란을 더 없이 숭고하고 행복한 삶이라 하는 세상 속에서 독신을 주장하고 그 모든 모습을 기록하는 고독한 주인공의 모습 또한 우리가 인정해주어야 할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짦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아름답고 설레는 사랑의 감정, 추악하고 일그러진 소유욕과 집착,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서 오는 공허함과 부조리, 사랑하지 않는 듯 하지만 자신의 삶과 주위 모든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의 자세....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어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초반 기괴한 설정속에서 잠깐의 당혹감만 이겨낸다면 아주 훌륭한 작품과 만났다는 걸 알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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