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 작품이 한데 묶여 있어 평을 하는 게 만만찮다'라는 생각이 들 만한 단편 모음집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독서 경력이 워낙 미천해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한때는 판타지를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 정도로 여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판타지가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의 현실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판타지들이 보여준 세계가 자못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 작품집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한용운의 <복종>이 연상되는) <자유의 감옥>, 악의 근원을 대중의 망각에서 찾은 <교외의 집>, 삶의 평안을 위해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망각한 사람들을 회의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 <미스라임의 동굴>, 좀더 진지한 버전의 <연금술사> 정도로 여겨지는 <긴 여행의 목표> <길잡이의 전설>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유쾌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등장하는 <조금 작지만 괜찮아>, 무언가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사람들의 냉소를 표현하려는 듯이 보이는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까지. 어쩌면 판타지는 삶과 사회의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수단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에 구애받지 않고 상상력과 기지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장르가 판타지니까 말이다.

 

판타지여서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 대개 (넓은 의미의 정치와 좁은 의미의 정치를 모두 아우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글들은 재미없기 마련이다.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 정답을 좀더 정답답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글이 재미있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지 않을까. 엔데도 참 올바른 생각만 하는 사람 같다. 글에서 그런 냄새가 솔솔 풍긴다. 그런데 글이 재미있다. 어려운 일인데 훌륭하게도 잘 해냈다. 오랜만에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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