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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0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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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유론을 저술한 존 스튜어트 밀과 그의 사상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밀의 사상은 시기에 비해 여성에 대해 오픈되어 있었는데, 그가 오랜 시간 교제했던 해리엇 테일러라는 여성의 영향이었다. 그는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활동을 하며, 급진적 정치 사상을 토대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사람이라고 한다.

밀은 동인도회사와 인도 정부간 교섭 업무를 맡기도 하고, 공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대학 학장으로 재임하거나 자유당 소속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866년에는 영국 헌정사상 최초로 의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고, 비례대표제와 보통 선거권 도입 등 의회와 선거 제도의 개혁을 촉구했으며, 노동조합과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밀의 사상

1. 공리주의

쾌락의 질을 구분해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형태의 쾌락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행복과 만족을 구별해서, 행복이 만족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하면서 도덕적 규범과 의무를 질적으로 더 높고 고귀한 성격을 지니는 행복 추구와 연결시켰다.

2. 경제적 민주주의

자본주의적 기업들을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으로 대체하는 것 같은 방식의 경제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3. 정치적 민주주의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와 개화되고 유능한 통치자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원칙을 옹호했다. 그는 대중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긴 하지만, 특히 지방자치 차원에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러한 무능력은 결국에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4. 여성의 해방

혼인한 당사자들 간의 평등은 인류의 일상 생활을, 도덕을 계발해나가는 학교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인류는 오직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로 살아가는 사회에서만 진정한 도덕적인 정서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에서 가족은 독재를 배우는 학교이고, 독재의 악덕을 길러내는 곳이다. 밀은 평등만이 미덕들과 능력을 계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래부터는 자유론의 기본적 개념과 사상에 대해 정리하는 동시에 내 개인의 생각을 memo로 덧붙이는 방식으로 서술했다.

자유론의 기본적 개념과 사상

1.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근거로서의 “효용”

인간이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최대의 효용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 자신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모든 재능을 완전히 꽃피워서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발전을 최대한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 인류라는 것도 결국에는 개개인의 집합이기 때문에, 개인이 최대의 성장을 이루어내는 환경을 조성해줄 때에만 가장 발전할 수 있다.

memo. 개개인이 최대로 성장하여 집단도 성장한다는 건 정말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개인이 성장하는 집단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물론 성장을 수치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소속원 모두가 만족하는 집단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란 삐걱거리는 개인들마저도 무작위하게 존재하는 집합인데 개개인이 모두 만족하면서 집단을 유지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자유를 해치는 이에 대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너무 세세한 지점을 고려해가야하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기는 하다. 수많은 조직의 형태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2.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것으로서의 자유

밀은 개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이유를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모든 개개인에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와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없이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자유들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절대로 틀릴 수 없다” (infallibility)를 전제하는 것이고, 그것은 독단이자 독선이며, 독재다.

3. 사회적 행위가 아닌 모든 개인의 행위에 주어져야 하는 자유

밀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판단할 때에 오직 “직접적인” 영향만을 따지고, “간접적인” 영향을 따져서는 안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행동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인 경우에는, 전자의 자유가 후자보다 우선한다.

4. 인간 자신과 인류 발전을 이끌 원동력으로서의 개개인의 “개성”

밀은 모든 개인에게 자유가 허용될 때에만 개개인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개성"이 온전히 발현되고, 이 무수한 개성들이 의견의 표현과 토론을 통해 함께 어우러질 때만이 개개인과 인류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고 봤다. 사회나 국가는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목표로 설정해서, 시민들과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걸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독선의 요소가 자리잡고 있어 결국 개인과 사회와 나라의 발전은 가로막히게 된다. "개성"은 겉보기에는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개성이 극대화 될 때에만 개인과 사회는 역동적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

memo. 나는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식보다는 독선을 견제하는 장치를 만들면서 나아가는 게 사회를 이끄는 방식 중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memo. 현대에 이르러 과연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개인의 의견 표명이란 존재할까?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 이라는 전제는 너무 나이브한 것 같다.

memo. 물론 사람의 개성을 증진시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과연 그게 능력 발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일까? 경쟁사회 속 한국이으로서 문장만으로 벌써 지친 기분이 든다. 인간은 개인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결국 전체적인 생활양식에서는 사회가 말하는 것을 따른다. 그런 식으로 사회의 약속은 정해지고 사회는 안정적으로 굴러간다. 타인을 무작정 따라하는 것은 과연 몰개성이나 평범한 것으로만 치부될 수 있을까? 우리는 평균을 잃은 사회에 살고 있다. 끝없이 평범해지기를 바라고 평균이기를 바란다. 양극단과 점극화된 요즘이 밀의 개성과 맞다면 우리 사회는 왜 발전한다는 양상을 보이지 않는 걸까? 그건 극단으로 치닫는 각자의 의견들이 “개성”이 아니기 때문일까?

5.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원리로서의 “해악”

개인의 행동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때에 그 행동을 제한하는 원리는 “해악”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사회적 해악이 되는데, 이러한 해악을 방치하게 되면, 사회 전체의 효용이 훼손되고 발전은 저해된다. 따라서 사회나 정부는 적절한 개입을 통해 그러한 해악을 규제함으로써, 사람들과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memo. 밀의 의견 중에 중국에서 아편 수입을 금지한 것에 대해 사회가 개입해서 특정 물건을 구입하기 불가능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면서 생산자나 판매자의 자유가 아니라 구매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이야기하는데 아편 수입에 대해서는 이미 그 시기 영국에서도 그 문제성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만큼 단순히 자유의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고 본다. 이건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밀이 말하는 “직접적인” 영향을 단/장기적 관점에서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성을 느낀다. 아편 수입을 막는 행위는 단기적으로는 구매자의 자유를 침해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구매자의 건강과 정신을 무자비하게 만들어 결국 사회 전체를 골병 들게 하는 원인이 되므로 단기적인 시선에서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충분히 그러한 논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 본다.

memo. 밀은 정부의 사전 예방 기능이 사후 처벌 기능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이며, 기본적으로 나는 정부가 사전 예방의 기능이 거의 전무하다고 본다. 정부의 사전 예방이라 함은 결국은 이미 이전에 있었던 것의 사후 처리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어난 적도 없는 일을 예방할 수 있는 정부의 정책은 사실상 거의 존재 하지 않는다. 정부에게는 사후 처리가 중점이 되어야 한다. 이미 침해된, 침해되어온 자유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6. 자유를 배워나가는 훈련으로서의 “자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지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 사회가 근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런 지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경우에도 그런 지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이제 자유가 대중화된 근대 사회에서,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 훈련은 모든 사람들이 시민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권한이 비대해진 정부는 독재의 경향을 띠게 되고, 시민이나 국민은 종속되고 자유는 제한된다. 따라서 근대 시민 사회에서 모든 시민들이 지역 사회나 국가적인 사업에서 정부의 관료들이 하는 것과 같은 자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감으로써,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시민적 자유를 지켜나가고 발전시켜나가는데 필수적이다.

자녀들에게 음식을 주어 먹여 살리기만 하고,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그 불행한 자녀들은 물론이고 사회에 대해서도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임을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부모가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국가는 가급적이면 부모의 책임 하에서 그 의무가 이행될 수 있도록 감독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국가는 모든 아동들을 교육 받게 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난 후에는, 국가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난제들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이 문제는 종파들과 정파들 간의 싸움터로 변질되어서, 교육에 쏟아야 할 시간과 노력이 교육에 관한 논쟁으로 소모되고 있기 때문에, 이 난제들은 속히 해결을 보아야 한다.

정부가 모든 아동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강제하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해도, 굳이 정부가 직접 나서서 그런 교육을 제공하려고 골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다. 자녀들을 의무적으로 교육시킬 것을 법으로 강제한 후에는, 그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교육을 시킬지는 부모에게 맡겨두고서, 가난한 계층의 학비를 일부 지원해주고, 학비를 전혀 낼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전액을 국비로 부담하는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된다.

memo. 여기에 대한 밀의 의견을 꽤 흥미롭다. 아마 부모가 없다면 그것은 국가가 의무를 다하면 될 것이다.

유럽 대륙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자산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들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들은 국가의 정당한 권한 행사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법들을 제정해서 시행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주로 해당 지역의 상황과 감정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그런 이유를 들어서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혼인은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해치는 것으로서, 비록 법적인 처벌을 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사회적인 비난과 원성을 사기에 충분한 행위이기 때문에, 국가가 거기에 개입하여 법으로 그런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7.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지적 역량”

밀은 미성년 상태의 미숙한 사회와 대중은 시민적 자유를 제대로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치”와 사회 차원의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 미숙한 사회와 대중이 성년 상태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와 통치자의 소임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것이다. 인류 사회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인 “지적 역량”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발전해왔다고 보고, 근대 사회에 이르러 인류가 성년기로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런 후에 어떤 사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합법적인 권위를 가지고서, 또는 그런 권위 없이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그는 관료 조직에 지시하고 명령할 수 밖에 없고, 관료 조직은 전혀 변하지 않고 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이전과 똑같이 돌아가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관료 조직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memo. 안정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 이전의 폐단을 답습하는 지름길이란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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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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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키7은 오랜만에 읽는 SF소설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미키17이라는 제목의 장편 영화를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알게 된 책이었지만 그 이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모르는 채 읽었고,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미키7의 저자인 에드워드 애슈턴은 미국 작가인데 한국에 따로 알려진 특별한 장편 소설은 없는 것 같다. 검색해보아도 미키7이 워낙 유명해진 건지 이 책 밖에 나오질 않았고, 단편은 주로 발표한 것 같다.




미키7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껏 죽어 본 중에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책을 끝까지 보고 난 입장에서 이 문장을 다시 보니 이후의 전개를 함축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 주의 !

이 아래로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감상을 정리했기에 스포일러에 주의가 필요하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야 하는 임무를 비롯한 여러 작업은 기계보다 인간의 몸이 훨씬 더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고, 기계로는 할 수 없는 의학 실험과 관련된 임무도 있었다. 게다가 상륙거점에서는 익스펜더블이 기계보다 교체하기 훨씬 쉬웠다.


반면 나를 하나 더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는 농산물 생산 라인이 돌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미키7의 가장 주요한 키워드를 말하라면 '익스펜더블'일 것이다. 익스펜더블은 이 소설에서 '위험한 임무를 할 때 소모품처럼 쓰이는 복제 인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 키워드를 통해 인간이 소모품으로 다뤄지기 시작할 때, 얼마나 그 가치를 추락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인간을 인간답게 여기려는 원칙을 도덕이나 윤리로서 고수하지만, 인간을 소모품으로서 다루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소모적으로 이를 대할 수 있는가.


기계보다 교체하기 쉬운 게 인간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다. 인간을 복제하는 게 기계를 다시 만드는 것보다 쉽다는 건 생명 경시적인데도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익스펜더블을, 인간은 다시 자신들과 구분하는 방식으로서 인간에서 분리한다. 인간은 항상 누군가를 분리하고 구분하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기적이다. 그런 인간이 생명을 얘기하려는 게 때론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당연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광산, 군대에 가는 사람 도 없었다.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노동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인간은 정말로 무료함을 느끼며, 기본적 삶에 대한 의미를 고민할까? 죽음과 삶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지금 상황과 이제까지의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불확실성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내 기술자들이 떠들던 불멸을 적어도 반은 믿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미키3가 죽고 나면 몇 시간 후 미키4가 재생 탱크에서 나올 것이고,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두 버전 모두 나라고 생각했다.



기술의 입장에서 육체가 동일하다면 동일성은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의 기억과 지금의 ‘나’라고 여겨지는 것이 선명히 구분된다면 거기서부터 이미 단절은 발생한 것 같다. 연속이라 볼 수 없다.



나샤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중략)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는 슬픔 또한 반복되면 무뎌질까? 아니면 미키 또는 나샤처럼 그 순간마다 별개처럼 느끼며 매번 감정을 새로이 갱신할까. 그리 생각하면 감정이란 정말 무뎌지는 것일까? 늘 같은 양의 감정을 느낀다면 우리는 왜 그걸 무뎌진단 표현을 할까? SNS에서 봤던 글처럼 과거의 크기가 그대로여도 우리가 성장하기 때문일까? 감정도 같은 것일까?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내 삶이 엉망진창이기 때문이야. 숙취에 시달리는 느낌으로 보존액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잠에서 깰 때마다, 나한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아는데,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기억이 안 나. (하략)”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한 채 다시 눈을 뜨면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쯤 되고 보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베르토와 내가 애초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은 덕분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완벽한 친구란 있을 수 없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점들을 이유로 사람들을 내친다면 그들이 가져다줄 기쁨과 행복 역시 누릴 수 없게 된다.


베르토와도 마찬가지다. 다만 베르토는 밥값 때문에 치사하게 구는 대신 가끔 내가 구덩이에 빠져도 얼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할 뿐이다. 베르토는 그런 사람이다. 받아들이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모든 일이 한결 쉬워진다.



미키는 관용적인 사람인 것 같다. 자신에게도 까다롭지 않으니 타인에게도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자신에게 대해 희박한 관심을 가지는 만큼 타인과의 관계에도 큰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본인이 본인의 삶에 대해 집착하지 않기에, 상대의 단점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 크게 느끼지 않는 걸 수도 있다. 미키는 벤과 제 지갑을 저울질했다고 했지만 결국 벤에게서 미키가 얻는 장점은 묘사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베르토에 대해서도 그랬다. 미키가 누군가에게서 얻는 장점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임무를 맡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에요. 당신이 바로 테세우스의 배라고요. 사실 우리 모두 그렇죠. 지금 내 몸을 이루는 세포 중에서 10년 전에도 존재했거나 몸의 일부였던 세포는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 지어져요. 한 번에 한 부분씩 수리되는 셈이죠. 당신이 이 임무를 맡게 된다면 당신은 한꺼번에 새로 지어지는 셈이에요. 하지만 결국 똑같지 않나요? 익스펜더블이 재생 탱크에서 나오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천천히 진행될 일을 한 번에 처리하는 셈이에요.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진짜 죽은 게 아니에요. 비정상적으로 빠른 리모델링을 할 뿐이죠."



이 이야기는 이론적으로 보면 언뜻 논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빠져 있다. 세포가 조금씩 바뀌어 나갈 때에도, 배가 수리되는 과정에서도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을 압축시키는 순간 이미 달라진다.




그 몇 마디 말에 따져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나는 죽기 전까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또는 업로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죽는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고, 아무도 내 의사를 묻지 않았으면서 으레 내가 이 임무를 맡으리라고 가정하는 것도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사실은 그녀 말이 맞았다. 나는 이 일을 해야만 했다. 젬마는 필드 생성기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세히 이야기했고, 망가진 부분을 교체하지 않으면 이 우주선이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미키의 상충적인 부분이 잘 드러나는 문단이라 생각한다. 미키는 자신이 죽은 거란 걸 인지만 하고,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이 죽음으로 가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단 사실에는 또 신경 쓰고 있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만 실감은 안 나고 한편 제 자신의 죽음보다 타인의 죽음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도 어? 설마? 진짜? 하고 실감을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죽음을 예감하는 건 자연스러운 걸까? 아니면 수많은 인간이 그러하듯 갑작스레 맞이하는 죽음이 더 자연스러운 걸까? 죽음이 당연하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형태나 순간은 왜 늘 다른 것일까? 죽음 그 자체는 평등하면서 왜 방식에서 차이를 가는 것일까?


생명도 죽음도 공평하지 않다. 생명과 죽음 그 자체가 동일하다 해서 그 이후와 둘러싼 것들이 다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걸 만들어낸 것도 인간 또는 생명체 그들이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우리는 왜 비참한 삶이나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채 존재하는가.


삶이나 죽음에는 왜 고통이 있어야 할까? 고통은 삶에도 죽음에도 불멸에도 모두 존재한다. 그 이유는 뭘까? 벗어날 방법은 정녕 부처가 말하듯 해탈 뿐일까?


내 친구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고통에의 초월이고, 안락사와 같은 죽음은 고통에서의 도피라고 그랬다. 그리고 죽기까지의 고통이 있는 이유는 고통에는 역치가 없고, 이는 고통이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생존을 도모하라는 생명체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 안락사는? 그건 약물이다. 약물은 고통의 역치를 반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것이니까 그렇다고 그랬다. 그렇다면 왜 고통이 심해질수록 도파민이 나오나? 그건 쇼크사를 방지하기 위한 게 아닐까? 그것 또한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고통을 경감하는 도파민이 나오라고 뇌가 으악 나 죽어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가장 이상적인 원재료는 당연히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필요하다는 건 오래 픽션의 소재이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기괴하게 느껴지는 게 이제는 좀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탄생이 인간 없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인간을 희생해서 인간을 만든다는 걸 무서워하는 건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느껴진다. 자연계에서 어떤 곤충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에게도 종종 일어나지만 흔하지는 않다. 뭔가 생존에 대한 욕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존재의 부재를 더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인간은 왜 유독 그런 게 심한 걸까?




매니코바는 자신에게 잘 대해 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바이오 프린터에 던져 넣어 그의 분신으로 만든 다음 무기를 쥐여 주고 가장 가까운 이웃 공동체를 습격했다. 살아남은 공동체들이 힘을 모아 그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 그때 이미 매니코바는 행성에서 절대다수가 되어 있었다.



매니코바는 자아가 비대한 인물이었을까? 그가 자신의 복제를 계속해서 만들어 행성을 차지하려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자신같은 인간만 세상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 만한 행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하나를 잿더미로 만든다면 유니언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도 파홈을 비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매니코바를 비난했고, 그 후 유니언 대부분 지역에서 중복된 익스펜더블은 아동 납치범이나 잔혹한 연쇄살인범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파괴는 참 쉬운 해결책이다. 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넌 네가 불멸이라고 생각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뭐라고?"


“이런 이야기를 내가 왜 하냐면, 네가 미키 반스가 맞는지, 아니면 그의 껍데기를 쓴 다른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그래.”

“말했잖아, 모르겠다고. (중략) 즉, 나로서는 확실히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이지.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그래도 네가 미드가르드의 미키 반스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건 아니지?”

“응, 모르겠어.”

캣은 답이 없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정적 속에 앉아 있었다.




캣의 등장과 이야기 내에서의 부상은 내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별 생각없던 캐릭터였다. 어느새 그는 세븐의 옆자리를 파고들었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의 비밀도 알아챘다. 그가 불멸에 관심을 크게 갖게 된 것도 물론 세븐과 함께 살아남으면서 동료를 잃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캣은 젬마가 말하던 불멸을 믿었다. 미키가 불멸에 대해 어중간한 답을 했을 때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설명을 잘 못한다 언급한 것이 그 증거이다. 미키의 대답보다는 자신이 믿는 걸 믿는다. 그는 죽음의 공포로 맛본 이후 죽음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세븐이 뭐든 받아들이는 성격인 탓에 지금까지 살아온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캣의 욕망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미키의 중복 문제를 덮어주려한 것은 세븐에 대한 일말의 애정 탓이었을리라 예상되는데, 세븐이 캣에게 제멋대로 했던 기대가 무너져 자포자기 삼아 에잇과 나샤를 받아들인 걸 들켰을 때, 캣은 이 또한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상략) 지금 우리를 봐. 내 삶은 지난 6주에 불과하고, 네 삶은 지난 며칠에 불과해. (중략) 나인은 내가 아니니까. 나인은 그냥 내 침대에서 자고 내 배급 카드를 사용해 배를 채우고 내 물건들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일 뿐이야."


에잇은 고개를 저었다. “(상략) 그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상, 사람들이 그를 나라고 생각하는 이상, 그는 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고, 그럼 그는 나야. 네가 지금 하는 생각,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익스펜더블이 중복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거야."


나는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 “익스펜더블 중복을 허락하지 않는건 앨런 매니코바가 우주를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시든지."



세븐의 말에 납득을 하면서도 에잇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존재는 둘일 수 없다. 그저 이름을 공유하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 생각하더라도 다른 지점이 생긴다면 거기서 이미 고유한 지점은 망가진 것이라 본다. 이미 이전에 말했듯 ‘시간’에 차이가 존재하면 고유성은 망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미키7의 엔딩은 초반부부터 촘촘하게 깔아뒀던 복선 회수를 하면서 끝이 난다. 세븐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 여러 죽음들, 그리고 세븐과 에잇의 결말까지.


내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과 가장 어울리는 인용 부분은 아마 여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긴장 풀어, 미키. 잠이나 좀 자.”




무언가를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죽음이든 삶이든 이어가기 어렵다. 나샤와 미키를 보면서 강렬하게 그 생각이 들었다. 미키는 무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창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고, 나샤는 연인의 죽음에 매번 슬퍼하면서도 그것을 마주하는 의외로 강한 인물들이다. 그건 생각없거나 나태하다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황이나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한 태도나 삶의 방식으로도 느껴진다. 어쩌면 그게 개척지민으로서 더 어울리는 낙관적 삶의 태도, 방식일 수도 있겠다. 그곳은 안정적인 곳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미키처럼 세계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작정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이 익스펜더블의 중복이 허용되지 않게 된 사건과 무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븐도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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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는 세계 십 대와 사회를 연결하다 2
최진우 지음, 도아마 그림 / 리마인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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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환경연합에서 <숲이라는 세계> 서평단을 모집하길래 신청했다가 선정이 되었다.

환경에 관심이 많아진 시점이라 좋은 책을 받아 읽을 수 있게 되어 즐겁게 독서했다.

원래 1월 9일에 받을 수 있었는데, 책이 등기로 발송되는 바람에 다음날인 1월 10일에 수령했다.





녹색의 시원스럽고 귀여운 일러스트가 들어간 표지와 한 손에 들기 좋은 A5 정도 되는 앙증맞은 크기의 책인데다 페이지 수도 144페이지로 그리 두껍지 않아서 왼쪽 상단에 적힌 대로 '십 대와 사회를 연결하기' 좋은 책이란 생각이 여러모로 들었다.




<숲이라는 세계>, 이 책에는 '생물다양성'이란 단어가 참 많이 나온다. 책에서는 '지구상의 생물종,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 생물이 지닌 유전자의 다양성을 모두 포함하는 말'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숲은 어떤 생태계보다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장소'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산'이 '숲'보다는 좀 더 가까운 단어같다. 내가 가진 '숲'의 이미지는 평평한 지대에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느낌인데 우리나라에서 그런 곳을 보기란 어렵다보니 '숲'보다는 '산'으로 나무가 있는 곳이 대변되는 느낌이고, 그래서인지 내게는 숲이 그리 가까운 장소이자 단어는 아니었다.

<숲이라는 세계>에서 또 자주 언급하는 단어는 '탄소중립'이다. 탄소중립은 내가 요즘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서 갖게 된 관심이지만 기후위기가 실제 내 생활에서 은은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환경적으로도 관심이 생겼다. 전세계적으로 탄소중립을 위해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정작 탄소중립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 탄소중립이란 '대기 중에 있는 온실가스 농도가 증가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 활동에 의한 배출량을 감소 시키고, 흡수량을 증대하여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탄소 '배출량'이 0이 되더라도 탄소를 흡수해야 하는 '숲의 보호와 복원'이 없다면 대기 중 탄소 농도가 증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나는 '생물다양성', '탄소중립' 이 두 가지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대표하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숲이나 산, 나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숲이나 산에서 불낼 일을 하지 않으며', '산에 나무를 많이 심기'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저 나무를 심거나 산불을 내지 않거나 나무를 훼손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숲에 사는 나무의 종류를 다양하게 하고, 다양한 생물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숲을 만들어 생태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또한 도시에서도 숲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로수를 보는 우리의 시선과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나무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나무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나무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걸 나는 이 책을 보고서야 어? 하고 깨닫게 됐다.

나무의 권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류의 책들에서 항상 느꼈던 아쉬움으로는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에 대한 제시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요 독자인 십 대도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제안하고 있어서 참 좋았다. 바로 '가로수 시민조사단'이다. 도심에 있는 가로수를 조사해 트리맵을 만드는 것인데 '전국가로수연대 트리맵'이나 '우리동네 가로수지도'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혼자서도 참여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검색을 해보니 이 활동은 서울환경연합과 저자가 실제로 주도하여 하고 있는 활동이기도 했다. 이런 지점에서 환경에 관심이 생긴 사람이 바로 접근해볼 수 있는 활동을 소개해주어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당장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숲'은 멀게 느껴지지만 '가로수'는 늘 볼 수 있는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락은 41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없다> 였다. 여태 나무를 '식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무의 '삶'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으로 모든 대상을 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서는 전문용어를 쉽게 전달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느껴졌지만 일부 단어들은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그에 대한 예시를 주거나 초반에 좀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십 대를 대상으로 '숲'이나 '나무'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들, 특히 '한국의 숲' 챕터에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좋았다.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지역과 문화를 나누었고, 인문지리가 발전했다는 이야기나 60년대 우리나라 민둥산의 녹화사업에는 동남아시아 열대림의 훼손이 따랐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는 생각할 지점까지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나무의 권리나 삶, 생태감수성, 숲과 산의 보호와 보전에 대한 경제적인 접근과 같은 새로운 시각도 알 수 있었던 데다 숲과 나무를 보호하고 지켜나가는 실천적인 방법 등을 다양하게 제시해주어서 숲에 대해 가볍게 접근해보기 좋은 책이었다.

특히 '기후위기와 숲' 챕터에서는 요즘 같은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숲'을 중심에 두고 어떤 것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어떤 것을 논의해야 하며, 어떤 것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지를 조금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낯으로 이야기해주는 어른을 만난 것 같아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144페이지라는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귀여운 일러스트가 내용을 마냥 묵직하지 않게 느끼게 해주어, 이제 막 환경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생긴 나같은 이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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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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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 글은 불편하다. 읽으면 너무 잘 읽히고 생각도 공감가는 지점이 있고 그래서 무언가 불편하다. 닮은 지점이 많아서 더 그런 것 같다. 그의 삶은 나와 다른데 이상하게 그가 나와 닮아있는 게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의 삶에 대해 궁금한 지점이 많았다. 거기에 대해 충분히 해소시켜주는 책이었다. 그의 삶을 따라 가다 보면 그를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불편한 책을 읽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정리하니 7가지의 소제목이 나왔다. 해당되는 소제목마다 인상 깊었던 구절과 감상을 기록한다.


1. 불편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우리에게 주어진 독서 시간은 물리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도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들춰내기 전까지 세계의 신비는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우리를 먹고살게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하며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 삶은 너무나도 아쉽다. 우리는 노동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즐기고 여행하고 놀라워하기 위해 온 것일 테니까.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챕터가 이 책의 가장 처음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주 적절하다. 채사장은 이 챕터를 통해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 또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채사장의 책이 불편하다며 피하고 싶었던 나를 저격해서 이 책으로 끌고 들어온다. 계속해서 ‘편하다’는 이유로 표류하는 삶을 택할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을 바라는 나 같은 사람들의 심중을 꿰뚫는 통쾌한 저격이다.

2. 자기만의 세계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친 사람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여행의 장단점과 주의사항을 말해줘봤자 소용없다. 스스로 밟아가야 한다. 직접 경험하고 실패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여행을 시작한 사람은 여행이 끝날 무렵에 자신이 처음 들었던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너무나도 맑은 정신 속에서 나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나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그것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인생 전체를 조망한 느낌. 아름다운 자연 속에 너무도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는 완벽한 순간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신이 준비해놓은 가장 완벽한 순간임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살아간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삶을 구차하게 끌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지금의 계단에 머무를지, 아니면 한 걸음 더 오를지.

나는 실패가 유독 싫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 애썼고, 타인에게 전하곤 했다. 이제야 그 과정이 필연적이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말하기를 꺼려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늘 그렇듯 오지랖과 조언의 경계는 흐리다.

나의 작은 세계로 충분했던 시절에, 나 또한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유사하게도 거대한 자연은 작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는 존재인 걸까.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일까. 이것을 설계라 느끼는 순간이 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의 충만함 이후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했다. 나 또한 완벽한 하나의 진리를 찾고 있었기에 스스로가 세상은 단순하게 보고 복잡성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관점의 전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면 이 모든 것은 명쾌해질 터인데 찾기를 포기하고 관점을 바꾸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한심하게 느껴졌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의 진리가 있을 거라는 믿음은 포기하질 못했다. 이 수많은 세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들을 더는 외면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단순한 진리조차 개인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으로 우기기에 우리가 보아야 하는 관점들이 너무 많아졌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은 지금에 와서 복잡해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랬음에도 나의 작은 세계에서는 360도로 시선을 아무리 돌려보아도 좁은 시야가 전부였기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는 걸.

3. 이상적인 인간

이상에 가깝다 X 이상을 품은 인간 O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 병장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의 가지를 뻗었다. 자신의 시간을 포기할 만큼 군대라는 집단이 그렇게 윤리적인 집단이 아님을 생각했고, 한국의 군대문화가 만들어낸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생각했으며, 국수주의와 애국주의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는가를 생각했다. 안 병장을 만나면 이런 것들을 말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 모든 이유와 무관하게 옳다. 그는 자기 삶의 입법자이고, 자기 삶의 대지를 걸어가는 자가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자의 평가는 이상적인 인간에게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대부분의 인간은 환경을 버텨내거나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애쓴다. 적응해내는 게 8할이라면 적응하지 못해 버티거나 튕겨나가고 마는 게 1.9할 정도가 될 것이다. 남은 0.1할은 그러면? 환경을 나에게 맞추는 사람이다. 이들은 ‘이상을 품은 인간’이다. 이들은 환경을 자신의 이상에 맞춰 바꾸어 나간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바꾼 환경은 처음에는 이미 환경에 적응한 8할의 거센 저항을 받지만 이들에게 감화된 인간들과 함께 구체적이고 확연한 변화가 된다. 이런 식으로 사회는, 환경은 변화해온 것은 아닐까. 그들이 ‘이상적인 인간’으로 불려도 되는 의미가 있다면 여기에 있다.

4. 사람은 변한다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내면의 성숙은 고결한 방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선입견. 그것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절반의 배움이 있다. 고결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세계에서의 경험들. 부당함에 굴복하고, 부조리에 타협하고, 옳은 주장을 꺾고, 스스로의 초라함에 몸부림칠 때에만 얻게 되는 그런 배움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세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타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내가 분을 삭이며 말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 누나가 대답했다. “그래, 사람들은 변하지 않지. 그런데 우리 동생은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

어떤 사람이든 자기만의 울타리를 부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울타리 자체가 아주 넓어 그 순간이 와도 그 안에서 겪은 것들로 손쉽게 "아! 보수해야 하는구나!" 하는 사람도 있지만 좁은 울타리로 인해 그 안에서 겪은 게 적은 사람은 부당함, 부조리, 초라함, 한심함 같은 것들을 마주하고 부수고 더 넓은 울타리를 세워야 함을 또, 그 경계를 지정해야 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겪는 시점에 따라 책에서 말하는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해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물론 좁은 울타리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좁고, 넓은 울타리도 또한 그렇다. 울타리 자체의 재질이나 소재도 쉬이 바뀌는 일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은 변한다.

5. 삶을 수용한다는 것

그 순간이 가장 완벽한 순간임을. 더 이상 그렇게 행복한 순간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살아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삶을 구차하게 끌고 간다는 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 싶다. 너무 오래 끌어가고 있다. 당시의 나는 한없이 나약해져 있었다.

삶에서 발생한 고통을 그저 받아들이라고요? 아뇨. 그건 너무 무책임한 말이에요. 자신에게 발생한 상실과 고통을 수용하라는 충고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눈감으라는 비겁하고 나약한 제안이에요.

직접적인 저항도 필요하지만, 주어진 삶의 고통을 인내하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말 힘든 일 같은 건 없다.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충분한 시간과 집중할 수 있는 여건.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든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힘들지 않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주어질 때 발생한다. 정신은 분산되고 신경은 예민해진다. 간신히 처리하던 일들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도미노처럼 일들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모든 일에서 문제가 연쇄적으로 터진다.

어느 순간 모든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자연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 나 또한 느껴본 적이 있는 감상이라 조금 어색했다. 인생을 굴곡있는 선으로 계속 표현해야 한다면 그 선이 고점을 찍는 한순간 이후로는 다시는 그 고점보다 높은 순간이 오지 않을 거라고 느끼는 내 자신이 있다.

노력은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고, 반드시 보답받을 이유도 없다.

참 공감이 간다. 연쇄적으로 문제가 터지면 힘들어진다.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모든 걸 리셋하고 싶다. 현대인 중에 리셋증후군을 겪지 않는 이가 있기나 할까?

6. 죽음에 대하여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투영물이다. 내 외부에 실재하는 절대적 심판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행위를 평가하는 건 사실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이었는지도 모른다. 삶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안에 삶이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포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는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식적인 견해를 넘어서게 해준다. 둘째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로서의 나의 의미를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죽음은 삶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나에서 벗어나는 것이 죽음이라 여겼다. 그게 내가 육체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자 죽음까지도 나의 삶이고, 내 마음에 있는 것이었구나 싶어졌다.

7. 나는 나다

세상과 단절된 나의 작은 공간에서 나는 회복되어갔다. 그것은 마치 차라투스트라의 동굴과도 같았다.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비워낸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의 내면을 다시 채워나가는 공간. 물론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잔이 채워지면 다시 비워내야 한다.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고정적이지 않다. 나는 나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의 영역을 넓히되 그 속이 채워지면 다시 비워내며 나를 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나를 넓힐 기회도 생긴다. 채우고 비우며 나를 드러내야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나라는 걸, 내가 모르던 나조차 나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결국 모든 건 내 안에 있고 내가 마주하는 외부의 것들조차 나에서 비롯되어 나로 귀결된다는 걸. 환경이 나를 옭아매는 듯 해도 그걸 받아들이거나 바꿀 의지는 나에게 있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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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바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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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었다. 읽으면서 꽤 정적인 분위기를 느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의 출판연도가 1986년이었다. 아무리 고립된 산 속의 산장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놀 거리가 없고 아날로그적일 이유가 있단 말인가라든가 의아하던 지점들이 단숨에 해소되었다.

책의 시작점은 단순한 편이다. 여행 중이던 오빠가 자살을 했다는 산장에 그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은 여동생과 그 친구과 함께 방문하면서다. 소설의 앞쪽에 이들이 어떻게 산장에 합류하게 되는지, 또 여동생이 친구에게 동행을 설득하는 과정이 제법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그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앞부분이 캐릭터의 언행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단락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호흡 분배에 경탄할 수 밖에 없다.

이 작가의 작품을 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종종 읽을 때마다 세심한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을 느끼고는 한다. 그의 추리소설은 상황이나 트릭보다도 거기에 처해진 캐릭터들의 숨결 덕분에 더 치밀하고 생동감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마더구스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마더구스의 해석에의 차이가 주는 맛도 있다.

에필로그까지 여운이 남는다는 점에서 참 좋았다. 고립된 장소이기에 추리의 맛을 더하기 위해서라도 인물이 꽤 많이 등장하는 편인데도 인물들이 어느 쪽에 크게 쏠리지 않고 다양하게 조명받는다는 점과 탐정의 역할이 스무스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작품이 연작으로 나왔다면 아주 흥미로운 콤비물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을 알지는 못해서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혹시 연작이 있을까?

아직 찾아보지 못한 시점에서 연작이 아니라는 가정을 하고 생각해보면, 출판연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거란 예측도 든다. 아마 그런 이유로 등장했던 또, 행적을 보인 캐릭터로 추정되는 인물도 있어서 그렇다.

그래도 순식간에 몰입해서 이 산장의 쌓인 눈이 녹기를 바라게 되는 차갑지만 따뜻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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