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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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작 <칼의 노래>는 한국 문학계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김훈'작가의 문학적 위상과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다. 십여 년 전 <칼의 노래>를 통해서 김훈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의 짧고 날카롭게 쳐내는 단말마적 문장과 어휘 앞에서 기가 질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글이 춤을 춘다는 의미를 아는가? 김훈을 만나기 전에는 나도 몰랐다. 그의 글은 생명력이 있다. 푸르게 날 선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무녀와 같이 마치 살아 꿈틀대는 한 마리의 짐승과 같다. 또한 낮게 깔린 아침 안개와 같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광풍과 같이 달려들어 독자의 심성을 닦달한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몇 번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평온하지만 조바심이 나는 이유다.

<칼의 노래>에 이어 이번에는 <현의 노래>다. 제목에서부터 약간의 싱크를 느끼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독자의 기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삼한 시대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이 주인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금과 소리의 자취를 가야국의 성쇠라는 큰 틀 안에 담았다.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부족 연맹체로 명맥을 유지했던 가야의 역사적 수명은 질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탄생한 가야의 소리는 가야가 역사에서 사라진 지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후대의 손끝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작가는 가야국의 행보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픽션화했다. 책은 가야의 순장 제도와 쇠(金), 금(琴)과 소리의 역학을 오묘하게 조화시켰다. 가야금의 창시자인 우륵 외에 허구적 인물인 가야의 대장장이 '야로'를 통해 쇠와 금을 문학적으로 대비한다. 야로를 통해 만들어진 병장기는 사람을 죽이는 살상의 도구다. 야로가 말하는 쇠(金)란 본시 주인이 없다. 쇠로 만들어진 병장기는 사람을 알아보지 않고 들린 자의 손에 의해 사용될 뿐이다. 반면 우륵의 금(琴)과 그것에서 울리는 소리는 듣는 자의 마음을 달래고 들뜬 감정을 가라앉히는 생(生)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우륵이 말하는 소리 또한 주인이 없다. 소리는 제각각의 길이 있음으로 소리로서 흩어지기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새로움과 낯섦이 공존한다. 그렇기에 금(琴)의 소리는 쇠(金)의 병장기와 달리 금(琴)을 잡은 자의 손에 의해서 시원(始原)의 소리를 낼 수 없다.

가야가 멸망으로 치닫는 소설의 흐름 속에 등장하는 깊은 비애는 바로 순장의 현장에서 극대화된다. 왕의 죽음과 함께 다수의 생목숨들을 생장(生葬) 시켜버리는 순장은 앞으로 다가올 가야의 멸절을 예견케하는 문학적 장치로서 일종의 복선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소설의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여 순장의 비참함을 묘사하고 있을까? 왕의 사체는 오천근이 넘는 덩이 쇠판에 눕는다. 병장기로서 죽음을 부르는 쇠(金)가 순장에서는 왕의 죽음을 맞이한다. 애꿎은 생목숨들이 왕을 둘러싸고 함께 묻히게 되면 비로서 순장의 마지막 절정은 금(琴)에게 맡겨진다. 금(琴)의 소리는 생장되어 여전히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의 남은 생을 달랜다. 작가는 순장이라는 생(生)과 사(死)가 만나는 비극의 현장 속에서 죽음으로 대변되는 쇠(金)와 생명으로 대변되는 금(琴)을 소환한다. 즉, 각기 다른 이미지를 한 장소에서 중첩시키고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병장기의 재료인 쇠(金)를 금(琴)과 대비함으로써 금(琴)과 소리가 가진 의미의 중요성을 도드라지게 부각시킨다. 작가의 문학적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다. 우륵의 소리를 청한 신라의 진흥왕은 가야의 소리를 신라의 소리로 받고자 한다. 그리고 세 명의 신라 관원들이 우륵으로부터 금(琴)과 소리, 춤을 배운다. 죽음을 앞둔 우륵은 자신의 소리를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젊은 신라 관원들에게 자신의 금(琴)을 내어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의 나라가 삼한을 다 부수어서 차지한다 해도 그 열두 줄의 울림을 모두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늘 새롭고 낯설지 않겠느냐. p314

가야의 여러 고을이 가진 고유의 소리를 열심히 연습하여 기량을 연마하면 주법은 따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소리 안에 담긴 가야의 정신만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다는 의미다. 책을 덮으며 소리는 주인이 없지만 주인이 있음을 발견한다. 우륵이 말하는 소리는 허공 속에 사그라지는 불꽃과 같다. 무형의 공간 속 침묵과 정적의 흐름을 가르는 소리가 가진 숨결은 부드럽지만 매섭다. 혼을 잠재우고 넋을 달래며 날랜 기운을 가라앉힌다. 잔잔한 강물과 같이 흐르다가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갑작스럽고 광포하게 휘몰아간다. 우륵이 가진 소리는 이처럼 주인을 모르는 짐승을 걷어키우듯 소리를 접한 신라 관원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작가의 글들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그가 글을 쓰기 전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소재에 대해 깊은 숙고와 사유의 시간들을 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다소 시건방진 생각을 해본다. 세월과 함께 만나는 작품의 소재는 작가의 연륜과 어우러져 한편의 훌륭한 문학적 재료로 재탄생한다. <칼의 노래>에서는 눈이 녹은 현충사를 찾아가 이순신의 칼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해가 질 무렵 돌아왔다. <현의 노래>에서는 관람객이 없는 국립국악원 악기박물관을 찾아 악기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혼자서 밥을 사 먹곤 했다.

작가는 영혼을 울리는 한편의 글을 위해 통과의례와 같이 작품의 소재가 될 그것과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 일종의 의식을 치른다. 그 고독과 홀로 있음의 시간을 통하여 영겁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그리고 내면의 울림으로 무형의 대상과 교감하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반향을 그에 몸에 오롯이 받아낸다. 이것은 나와 같은 범인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문장과 글을 배태시키는 일종의 지난한 출산 과정이다. 내려받은 영혼을 글의 심부에 담아내기에 마른 장작과 같이 죽은 어휘와 문장이 생기를 얻고 비로소 호흡한다.

책은 빈 공간을 허용치 않는다. 문장 속 여백과 여백의 사이 공간을 짧게 쳐낸 듯한 김훈 특유의 글 사위가 오금을 저리게 한다. 봄날 마른 겨를 키질하듯 중구난방 제각기 흩어져있는 어휘의 무질서 속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걸러내는 것과 같이 문장의 곁가지를 걷어낸다. 한 곳으로 소급되어 정제된 글을 댓돌 위 짚신처럼 가지런히 정렬하는 것도 작가의 섬세함에서 비롯된다. 질서를 부여한 어휘와 문장을 완성도 있게 치댄다. 지향하는 바가 각기 다른 어휘와 문장이 조화롭게 어울리며 결코 투박하지 않은 이유는 작가가 세월을 통해서 얻은 그만의 내공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항상 탐독하며 느끼는 점은 작가의 글이 매우 회화적이라는 사실이다. 글을 읽는지 그림을 보는지 구분이 난해하다. 활자를 그림 그리듯 그려내는 문장 구사력은 이미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 그렇기에 건드리면 금세 터질 것만 같이 물오른 꽃봉오리와 같이 그의 글은 이미 충분히 농익었다. 글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한판 거하게 춤사위를 벌이듯 글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작가의 문학적 천재성을 확인하게 되는 또 하나의 명작이다.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신들린 듯한 문장과 어휘가 내뿜는 아우라에 압도당한다. <칼의 노래>와 더불어 그의 글은 미쳤다!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 내가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며 당신의 글을 나의 심상으로 게걸스레 탐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끼치도록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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