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 철학적 신학 시리즈 1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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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손목시계가 수명을 다한 듯 시침과 분침, 초침이 멈춰있는 것을 보고 수리해서 살려내겠다는 생각으로 시계를 뜯은 적이 있습니다. 시계의 뚜껑을 열고 금세 괜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닫는 데는 단 5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톱니바퀴와 어지럽게 연결된 작은 기계장치들을 보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한 것이죠. 시계 수리공도 아닌 내가 그 복잡한 시계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뚜껑을 연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렇듯 시계 수리는 시계를 만든 사람이나 시계의 구조를 잘 아는 전문 수리공의 영역임을 깨달았던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시켜주는 책 한 권을 만납니다. 조국 교회의 몇 안 되는 탁월한 기독교 지성으로서 안양 열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남준'목사님의 저작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입니다.

이 세상이 정밀한 인과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한 우연성에 기인한 산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세상을 매우 편의적으로 보는 시각일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구상된 결과물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이러저런한 유기적 조합을 통해 탄생된 것이라는 무신론적 주장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분명한 목적과 목표에 의해 구상되고 창조되었음에 대한 신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연구와 사유의 총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도덕의지로써 인간을 다스리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선악 간의 모든 일을 판단하시며 인간이 지성과 의지로써 창조목적에 이바지하며 살도록 통치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고 부릅니다. 본문 中

 

저자인 김남준 목사님은 책을 통해 우선 통치의 근거가 되는 세계의 창조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본체적 영원으로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 자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초시간적인 아심을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세상에 대한 구상이 당신의 계획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 하나님은 굳이 세상을 창조하시려고 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천지창조의 목적을 기술하는 3장에서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심에도 그 충만하심을 창조세계를 통하여 증대하시려는 성향을 가지고 계십니다."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또한 "자신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를 통해 자신을 확장하시며 드러내시고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과 교통하시려는 속성의 결과로서 세상을 지으셨다는 것이죠.

저자는 이렇게 천지창조의 목적을 기술한 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을 이룹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인 '영광'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애매모호했던 영광의 개념을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가 가지는 본체적 영광,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가 주는 신성의 효과로서의 발산적 영광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인간을 비롯한 지성적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드러나는 효과적 영광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창조된 피조물들 특별히 하나님 당신을 닮은 지성적 존재인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덕적 의지로써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꼽는 이 책의 백미는 6장에 등장하는 도덕적 통치의 수단으로서의 '계시'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과 의지를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인데 양식에 따라서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나뉘고 접근성에 따라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됩니다. 특별히 계시와 오성을 설명하는 파트는 초대교회 위대한 교부이며 성학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인간 지성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숙고의 작업을 이뤄냅니다. 김남준 목사님께서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신 아우구스티누스와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장이기도 하죠. 저자는 인간의 지성을 오성과 이성으로 설명합니다. 오성(인텔레겐티아)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어떠한 사물과 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능력으로서 판단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 이성은 오성과의 좁은 의미의 관계에서 볼 때 주어진 지식을 갖고 추론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어내는 힘으로써 표현됩니다. 즉 오성은 직관(인튜이투스)에 관여하고 이성은 추론(라치오키나치오)에 관여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성령의 조명(일루미나치오)이라는 개념입니다. 조명은 바로 인간의 오성을 비추는 빛입니다. 즉, 타락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지성이 가진 능력만으로는 하나님과 신적 세계에 관련된 일들을 직관하거나 추론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조명이라는 거룩한 빛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 대한 신령한 지식들을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성령의 조명하심의 도움을 받아 오성의 변증작용(디아렉티케)과 이성의 추론작용(라치오키나치오)을 통해 계시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신자가 자신의 지성을 부단히도 갈고닦아 날카롭게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맹목적으로 "믿습니다!" 만을 연호하는 맹신적 믿음의 위험성과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른 신자라면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부지런히 성경과 묵직한 신학, 신앙 저작들을 읽어내며 동시에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고전, 역사, 철학서들을 멀리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이 계시를 이해함으로써 두 범주의 지식을 갖게 됨을 설명합니다. 즉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믿음의 규칙'(레귤라에 크레덴디)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생활의 교훈'(프리셉따 비벤디)이 그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통해 온전한 계시를 이해한 신자라면 두 가지의 지식을 갖고 생활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말씀과 삶이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이 따르는 개신교 신앙이 탁상공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실제적 영역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더 간략히 압축한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러한 신자의 삶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추구하는 목적이고 목표이며 신자는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이 땅의 가시적 시간 세계 안에 온전히 구현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만이 바로 하나님의 '효과적 영광'의 표현인 것입니다.

복잡한 시계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시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시계 수리공 밖에 없습니다. 복잡다단한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이죠.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춥기만 합니다. 들끓는 탐욕과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파괴하기에만 급급합니다. 바른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음의 규칙과 삶의 교훈을 실제적인 삶의 지평 속에 온전히 풀어낼 수 있는 신자들이 많아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자신의 삶으로 실현하고자 몸부림치는 신자들이 많아진다면 춥고 어두운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밝아지고 따뜻해지리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죠.

용어 자체가 생소한 다수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 등장하기에 사실 일반적인 신자들이 쉽게 접근해서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고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인 김남준 목사님도 책의 서문에서 이러한 부분을 염려하여 책을 읽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 말 다 했죠! 그러나 바른 신자의 삶을 추구한다면 분명 이 책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명저입니다. 공부하듯 옆에 노트를 끼고 앉아서 차근차근 읽어보십시오!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와 복잡한 개념들이 이내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지만 진득함과 인내로서 저자가 전해주는 진리의 정수를 조금씩 빨아들일 때의 그 지적 희열은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었을 때 대충 믿는 무식한 신앙의 안일함이 가져다주는 말초적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희로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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