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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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개봉한 영화 중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신앙의 힘으로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교도소를 찾아간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며 평안한 표정을 짓는 살인자의 고백을 듣고 혼란스러움에 빠져 혼절한다. 피해자의 엄마로서 자신이 먼저 살인자를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살인자는 피해자의 용서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인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기에 죄를 사함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은 살인자를 용서한 신(神)을 향해 복수하는 인간의 삶을 살겠다며 무섭게 절규하고, 그녀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만 간다. 영화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보이는 살인자에 대해 용서할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겨 버린 한 인간의 무너져가는 삶의 궤적을 차분하게 따라가며 절제된 영상의 힘을 보여줌으로서 국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용서받을 자격은 무엇이고, 용서할 권리는 또 누구에게 있는가? 에 관한 딜레마적 질문을 책 한권 전체를 통해 던지는 저작 한권을 만난다. 마치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 <밀양>의 확장판과 같은 느낌의 책. 제 2차 세계대전 유럽 곳곳에서 자행된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믿기지않는 야만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은 저자 '시몬 비젠탈'은 종전 후 '유대역사기록센터'를 통해 무려 1100여명에 달하는 나치 전범들을 색출하고 추격하여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인물이다. 자신의 아내를 제외한 일가친척 89명이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비극적 가정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그는 본서를 통해 자신이 렘베르크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들을 담담한 필치로 기록한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나치 군인들에게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기력이 있으면 강제 노동을 위해 짐승과 같이 부려먹었고, 병들거나 기력이 다하면 가차없이 사형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비젠탈 또한 이러한 비극적 운명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자신의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러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수용소 바깥 외부 작업장으로 작업지원을 나가는 근무조에 뽑히게 된 비젠탈과 그의 동료들이 도착한 곳은 군 야전병원으로 개조한 예전 비젠탈이 다니던 모교였다. 그곳에서 어느 간호사에게 호출된 비젠탈은 그녀를 따라 건물 내 격리되어 있는 마치 임종실과 같은 분위기의 방으로 안내받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반 송장이 되어 죽어가는 한 사람과 잊을 수 없는 조우를 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나치 중에서도 악명 높은 히틀러 친위대인 SS의 대원이었던 카를이라는 군인이다.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SS대원들은 대부분이 노인과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200여명 정도 되는 한무리의 유대인들을 집 한채에 몰아넣고, 집안 가득 석유통을 배치한 후 그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삽시간에 집은 불바다로 변했고, 아비규환의 현장 속 건물의 2층에서 어느 젊은 부부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의 눈을 감기고 1층으로 몸을 던진다. 불길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쳐 나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SS대원들은 미리 설치한 기관총을 무자비하게 난사하여 사살하고야 만다. 인간이 인두겁을 쓰고 같은 인간에게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잔혹한 광기의 현장 속에 SS대원 카를 또한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카를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지금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이제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속에서 이제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인지하고, 유대인 한명에게 자신이 SS대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악마적 만행을 고백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려는 마지막 힘겨운 몸짓을 시도한다.

비젠탈의 손을 움켜 쥔 SS대원 카를은 자신이 무자비하게 죽인 유대인들을 대신해 비젠탈에게 용서를 구하며 죽어가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간청을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침묵만을 남겨둔 채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책의 1부 말미에 저자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결코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매우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것인가?"

이어지는 책의 2부는 심포지엄으로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세계 각국의 석학들이 보내 온 비젠탈이 경험한 이 용서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대답으로 구성되어있다. 죽어가는 SS대원의 용서와 참회에 대해 용서했어야 했다는 반응과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죄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이런 극명한 반응이 예상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흑백을 가리듯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성격의 주제, 질문이 아니기에 독자는 책의 원저 제목인 1부 해바라기를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야만 하는 윤리적 사고와 철학적 사유의 작업 속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2부 심포지엄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지성인들의 저마다의 의견은 다양하다. 그러나 저자 시몬 비젠탈은 바로 지금 이 책을 집어들어 읽고 있는 독자로서 우리의 생각과 대답을 요구한다.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퍼부어대는 질문 속에 출입구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 미로와 같은 사고 체계의 혼선을 경험한다. 자! 당신 같으면 SS대원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비젠탈은 자신의 일가친척 모두가 나치에 의해 끌려가서 희생을 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불행의 원흉은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나치 독일인들이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 민족을 대학살의 지옥 속으로 밀어넣은 이 짐승, 괴물같은 인간 SS대원은 용서의 손을 내민다.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가르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심지어는 그 죄악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렇기에 기독교적 가르침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정답은 이미 정해진 것인가? 나 또한 한명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에 나는 본서를 읽어내려가는 1주일 이상의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한없는 용서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그러나 나의 이성이 동의하지 않기에 내 신앙의 진실성 여부까지 의심될 정도로 혼란스러움을 경험한다.

이러한 어지러움 상념 속에서 어서 너의 의견을 피력하라고 말하는 저자 시몬 비젠탈의 종용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면서 나는 책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용서에 관한 바른 관점의 퍼즐 조각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할 권리가 비젠탈에게 있느냐의 문제이다. SS대원 카를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집단을 대표하는 불특정 유대인 한명을 불러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유대인 집단의 대표로 뽑힌(?)비젠탈은 그의 죄악상을 전해듣고 600만 유대인, 아니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기관총을 맞거나 불에 타죽은 200여명의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카를을 용서해야하는 처지에 놓인것이다. 그러나 비젠탈에게는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에게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직접 용서해주는 것이다. 비젠탈은 그의 죄악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는 있을지언정 죽임 당한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가해자인 카를을 용서할 어떠한 권리도 없으며 오히려 그가 카를를 용서했더라면 그것은 죽임당한 수 많은 동족에 대한 배신이며 교만하고 오만스런 행동이었을 것이다.

서평의 서두에서 꺼낸 영화 <밀양>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신애가 아직 용서하지 않은 그 살인자에 대한 용서의 기회와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긴 채 절규하는 모습을 본다. 그렇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참회를 할 때 성립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미 죽어 없고, 가해자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2부 심포지엄의 대다수 지성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한 비젠탈의 결정을 지지한다.

초창기 미국의 인디언 대학살,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 세르비아-보스니아 인종청소, 중국의 티벳 대학살, 태평양 전쟁 일본군의 관동 대학살, 난징 대학살, 버마 대학살, 필리핀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 종족 분쟁. 중세 이전 사건들을 제외하고서도 근대 이후에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전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한국은 어떠한가? 수많은 일제의 잔인한 만행들과 6.25 전쟁, 제주 4.3, 광주 5.18까지...

10여년 전 몇개월 간 제주도에서 지낸 적이 있다. 제주도민들에게도 깡촌이라 불리는 작은 시골 바닷가 마을 근처에 머무르던 당시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가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 고즈넉함의 장소 속 구멍가게에는 어린 시절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던 각종 불량식품이 가득했다. 추억과 감성 소환을 위해 자주 찾았던 이 구멍가게의 주인은 연세가 지긋한 꼬부랑 할머니셨는데 낯선 젊은이들인 우리 일행을 볼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육지것' 들이라는 볼멘소리를 연거푸 내밷으신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머물렀던 그 지역이 제주 4.3 사건이 벌어진 비극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먹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부모가 어린자식이 친척이 친구가 육지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에게 있어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그 지울 수 없는 증오와 고통스러운 기억이 우리를 부르는 육지것들이라는 호칭 속에 묻어나왔기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죄인이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죄인은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평생을 납작 엎드려 사죄하는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는 첫번째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 언급한 수 많은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와 국민들이 아픔을 준 상대 국가와 민족들에 대해서 진심어린 용서와 참회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여전히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에만 급급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도리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인면수심의 모습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 책은 용서의 자격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리고 용서할 권리 또한 아무에게나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한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저자 시몬 비젠탈은 내게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라고 되묻는다. 적어도 내게 용서의 행위 자체는 아름답다. 그러나 모든 용서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말하고 싶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참회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고통을 안긴 피해자의 마음과 영혼을 향해야 한다. 피해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평생을 참회하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납작 엎드리는 삶을 살아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구하는 용서, 그가 받은 용서는 모두 거짓이며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개신교 신자로서 영혼의 떨림을 맛보게 하는 책 한권으로 1주일여의 시간동안 책장을 넘기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분명 생명을 내건 한없는 용서를 말씀하셨건만 아직 나의 신앙과 경건의 깊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없음을 확인하며 쓸쓸히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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