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탁상담화 - 종교개혁자의 사적인 대화록 세계기독교고전 49
마르틴 루터 지음, 이길상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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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친분은 없지만 아는 사람 중에 만나면 매번 습관적으로 빈말을 내밷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번 만나고 헤어질 때 습관적으로 "어! 우리 언제 시간내서 밥 한번 먹어요!" 라는 말을 정말 습관적으로 했다. 처음에는 진짜 나하고 밥을 먹자고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이후 내가 스스로 깨닫게 된 사실은 그 사람이 밥 한번 먹자고 하는 말은 정말 밥을 먹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과 동일하게 그 사람식의 독특한 작별 인사법이었다는 것이다. 어찌나 황당하던지...

정말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당신과 식사하면서 교제를 하고 싶습니다 라는 말이 그 사람에게는 단지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로 둔갑한 이 웃픈 상황을 보며 느끼는 것은 밥 한번 먹읍시다! 라는 말이 가지는 그 깊은 의미를 너무나 과소평가한 듯한 그 사람의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의 경박스러움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서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는다는 의미는 "안녕히 가세요!"와 같은 가벼운 인사치레 수준을 넘는 제법 진중한 무게감을 가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혹자는 누군가와 앉아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옷을 홀딱 벗고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리얼리티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좀 과한 표현같기도 하지만 그 이면의 깊은 의미를 알면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다.

우리와 함께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즉 가족, 친지,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들과 같이 친분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모르는 사람과 겸상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 왕이 된 후 자신에게는 원수와 같았던 사울왕의 혈육 중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와서 자신과 함께 겸상하도록 지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울왕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생각하여 결정한 일이지만 원수의 손자와 겸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누군가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은 밥을 먹을 때 마음의 무장을 해제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기울이며 동시에 나의 진심 또한 이야기하게 된다. 밥을 먹으면서 독설을 퍼붓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즐겁게 밥을 먹는 사람은 없다.

오래 전 서울의 종로 낙원상가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 가면 1500원짜리 시래기 국밥을 파는 식당이 있다. 역사도 오래되어 방송에도 나왔을 정도로 명소가 된 곳이다. 주변 탑골공원의 주머니가 가벼운 노인들을 위해서 십수년째 밥값은 1500원이다. 그냥 메뉴도 없고 들어가서 앉으면 무조건 밥이 말아진 채 국밥 한그릇이 나온다. 그런데 이곳의 독특한 룰이 있다. 그것은 세월이 흔적이 느껴지는 비좁고 허름한 식당의 몇 안되는 테이블에 그냥 자리가 나면 아무나 가서 앉아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일행과 함께 갔다고 자리를 만들어 앉을 수도 없다. 자리가 나면 그냥 모르는 사람과 겸상해서 앉아 먹고 나오면 그만이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경험은 모르는 분들과 앉아서 먹어도 겸상을 한다는 인연 아닌 인연으로 "어디서 왔냐?" "무슨일로 종로에 왔냐?" 는 등의 가벼운 담소를 나누면서 먹게 되더라는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겸상을 해도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볼 때 이 겸상문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니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어요!"를 작별인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는 참으로 안타까운 인간관계의 가벼움을 드러내주는 단면이다.

이러한 밥상, 탁상 앞에서의 만남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은 진솔하고, 정직하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진실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시간들을 만들어준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지난 열흘간 나는 마음을 깊이 울리는 탁월한 저작 한권을 만났다. 그것은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탁상담화>라고 이름붙여진 책이다. 영어 원제 그대로 Table Talk, 즉 루터가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 개혁의 동지들과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면서 또는 강론을 하거나 그냥 편하게 일상의 대화를 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는 단어의 철자하나라도 놓칠까 염려하며 열심히 받아 적었다. 마치 요즘 기자들이 무엇인가 큰 사건을 인터뷰 할 때 노트북을 열어 한자라도 놓칠새라 재빠른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치듯이 말이다. 어찌나 열심히 받아적든지 한 날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루터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한 제자가 구석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받아 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장난끼가 발동한 루터가 나무수저에 오트밀죽을 듬뿍 퍼서 정신없이 적고 있는 제자의 얼굴에 들이밀면서 "이것도 받아 적으시게!" 하고 짖궂은 장난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본서의 기록된 내용들의 사실성과 정확성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이다.

책의 내용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우상숭배, 세상의 본질, 예수 그리스도, 성령, 죄. 자유의지, 율법, 기도, 세례, 성찬, 교회, 출교, 적그리스도, 연옥, 천사들, 교부들, 족장과 선지자들, 결혼과 독신 등 열거할 수 없이 많은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적 주제들 그리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일상의 삶 속에 시간을 보내며 평소 자신이 연구하고 생각했던 기독교의 진리들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낸 내용들을 받아 적어서 문서화시켰기에 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평생에 대적인 교황과 로마 카톨릭 세력이었다. 그들의 미신과 현세적 신앙, 잘못된 성직 위계제도 등 자신들의 종교를 떠받치고 있는 부패한 교리들과 로마 카톨릭 교황제도의 헛점이 여실히 공격받을 수 밖에 없는 루터의 이 대화들은 그들에게는 참으로 위험한 폭탄과 같은 위해요소였다. 그렇기에 로마 카톨릭 세력은 유럽에서 루터의 대화가 기록된 이 책을 4천권 넘게 압수하여 불태워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적 위협 속에서 당신의 진리를 보존토록 하시기 위해서 큰 은혜를 베푸신다.

그것은 1626년 독일의 한 신사가 자신의 새 집을 짓기 위해 집터를 파내려가는 도중 깊은 구덩이 속에서 린넨 천에 둘둘말려 밀랍으로 봉해져있는 문서 한권을 발견했고 그것은 바로 독일에서 루터의 탁상담화 소각령이 내려졌던 당시 그의 할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땅 속에 깊이 파묻은 것으로서 60여년이 지나 자신의 손자에게 발견된 것이었다. 이 신사는 이 책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책 마저도 소각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후 고민끝에 잉글랜드에 있는 독일어를 잘 구사하는 캡틴 헨리 벨이라는 정치가에게 위탁하여 어쩌면 이 세상에 마지막 살아남은 루터의 탁상담화를 영어로 번역하여 세상에 널리 전파하도록 부탁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담은 마지막 불씨를 꺼버리려는 교황과 로마 카톨릭 세력들로부터 지키시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본서는 2019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의 손에 들려져서 읽혀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동적인 일인지 모른다.

신학적인 교리와 신앙적인 내용들 그리고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서의 실천원리와 삶의 성경적 기준, 격려와 위로, 조언, 훈계와 같은 위대한 개혁자의 가르침이 한권에 녹아있는 보물과 같은 저작을 접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드려 진리를 위해 투쟁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함과 말할 수 없는 헌신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특별히 책의 내용 가운데 루터는 성경을 강조하는 내용을 통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교수들이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지만 순전히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사유하므로 그 내용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그는 책을 통해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상의 의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루터의 비범함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에 대해 그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회심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었기에 어쩌면 그가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에 대한 강조점을 믿음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놀라운 사실 한가지는 뒤따라 나오는 문장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상의 의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 믿음보다는 행함에 중점을 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던 루터는 믿음만이 오직 유일한 칭의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상의 의무(행위)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믿음에 기초한 행함을 경히 여기지 않는 그의 실천적인 신앙관을 엿보게 된다. 물론 루터는 야고보서의 행함을 원인적 증거로 보았기에 행함을 칭의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잠간 옆으로 밀어놓고 독자는 서슬 퍼런 중세 암흑기 속에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과 신앙과 관련된 담화를 자신의 측근들과의 시간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던 루터의 담대함과 비범함 그리고 영적 거인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약 열흘간 하마터면 지구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한줌의 재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을 위대한 저작의 페이지를 넘기는 흥분을 맛본다. 누군가가 나에게만 전해 준 비밀일기를 들춰보는 듯한 짜릿한 지적쾌감이 느껴지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본서는 독자에게 있어 위대한 종교개혁자의 지적 담론을 접하는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평범하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의 그 깊은 신앙과 지적 통증의 끝을 보게 된다. 살기등등한 로마 카톨릭 세력의 온갖 위협과 고난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에 믿음으로 응답한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탁상담화>를 통해 올 여름 비뚫어진 진리의 가늠자를 다시금 정렬하기 원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 비밀(?)문서를 기꺼운 마음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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