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자유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2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김찬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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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인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는가? 교회를 다니다보면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우리는 로보트와 같이 명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서는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매우 철학적이고 난해한 저서이지만 <신앙감정론>,<원죄론>과 더불어 3대 주저로 뽑히는 가장 돋보이는 저작이다. 본서는 인간의 의지가 가지는 자유에 대한 거대한 지적 담론이다. 에드워즈가 살았던 당시 18세기 미국 뉴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알미니안주의의 거센 사상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는 인간의 책임과 선택에 대해 더 큰 비중과 관심을 기울이는 알미니안주의가 이야기하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한 부패한 교리에 대해 맞서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 그분의 거룩함이 훼손될 수 밖에 없는 사상적 위기 속에서 에드워즈는 그의 평생에 걸친 지성적 훈련의 총체를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거룩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쏟아부어 탄생시키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본서 <의지의 자유>이다.

본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주제와 관련된 용어들의 정의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펼쳐지는 내용들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을 숙지하도록 돕는다. 가령 의지의 본성, 결정, 필연성, 불가능성, 불능, 우연성 등과 같은 용어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보통 우리가 사전적으로 알게 되는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 바탕 안에서 설명되어지고 있기에 독자들의 집중력과 이해력이 요구되어지는 대목이다. 2부에서는 그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의지의 자유가 가능한가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고, 3부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지의 자유가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필수적인지에 대한 고찰이며 마지막 4부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던지는 여러가지 사상적 추론의 근거에 대한 고찰을 담는다.

본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자주 등장하는 용어 몇가지를 알아보면 이렇다. 의지는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기능, 능력, 마음의 원리를 말한다. 자유는 의지의 결정대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힘을 말한다. 의지작용행위는 선택행위, 선택과 동일한 의미로서 마음의 기울어짐이나 경향으로서 중립은 없다. 즉 마음이 보기에 가장 강력한 동기가 의지를 결정한다.

 

알미니안주의는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의지는 중립성을 가지며 필연성을 배제하고, 우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어떠한 의지적인 행위들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그 의지의 행위는 어떠한 위부의 원인에 영향받지 않은 채로 행해진다는 것이며 완전한 우연과 자기결정에 의지의 자유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자신을 칼빈주의라고 불러도 자신은 괘념치 않는다 라고 말했듯이 칼빈주의는 의지의 자유에 대해 인간의 의지가 기우는 경향성으로 설명하고, 필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어떠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이 필연적으로 좋아하는 행위 또는 자신의 마음이 기우는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보인다는 점이며 이것이 바로 의지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도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으로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지의 중립성을 주셨기에 인간 의지의 작용을 미리 아실 수 없으시고 그렇기에 우연성에 기인하여 선택하시고 작용하신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 행위에 대해 확실히 예지하고 계시며 우연성이 아닌 도덕적 필연성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선택하시고 이끌어가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온전한 거룩함과 탁월한 지혜, 우주적 주권을 가지신 상태로 확실한 예지에 바탕하여 필연적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선택하시고 작용하신다는 것이다.

내용의 방대함과 매우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길을 잃어버린채 출입구를 찾아 다시 뒤로 돌아간 적이 수차례 있었다. 이후 '헨델과 그레텔' 동화에 나오는 빵부스러기를 길에 떨어뜨려서 이정표 삼으려고 했던 그 심정 그대로 옆에 그냥 노트 한권을 두고 책을 읽으며 난해한 용어들과 문장들을 적어놓고 본문 내용들과 대조해가며 깊은 지성의 바다 속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을 보냈다. 결코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지만 책이 가지는 가치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함을 느낀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의지의 자유가 중립성과 우연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창세기의 인간 원죄 교리를 양보해야하는 엄청난 신학적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따 먹게 된 의지는 중립성을 가지기에 선악과를 따먹은 이 도덕적 행위는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 벌어진 일임으로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원죄의 책임이 없다라는 의미가 된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에게 원죄의 근원, 죄악을 만들고 인간이 타락하도록 방임하신 분이라는 오명을 덧씌우게 되는 신성모독적 결론으로 귀결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그분의 우주적 주권과 탁월한 지혜를 가지시고, 도덕적 필연성에 기반하여 가장 아름답고 선한 선택과 결과를 도출하신다는 에드워즈의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이라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교리가 공격받게 될 것이며 나아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일방적 은혜보다는 인간의 협력과 인간의 책임이 공존함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의 그 부패한 교리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인간 의지의 자유를 인정한 것인가? 에드워즈가 말하는 의지의 자유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를 말한다. 온 우주적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그 광대하고 독보적인 주권 속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갖고 누린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지금 영국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프리미어리거 축구 선수 손흥민이 10살짜리 초등학교 축구 선수와 일대일 한판 대결을 펼친다고 가정할 때 초등 축구 선수는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볼을 드리블하고 손흥민 선수를 제친 후 골문으로 돌진해서 슛을 쏠 수 있는 자유와 의지가 있다. 그러나 결국 전체적인 축구 경기의 틀 안에서 볼 때 그 경기의 결과는 10살짜리 초등 축구 선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프리미어리거 손흥민 선수에 의해서 컨트롤 되어짐을 의심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 또한 이렇다.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과 주권 속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 의욕에 대해서 이미 예지하고 계시며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섭리, 경륜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경영해 가신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큰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함에 의해 드라이브되는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안에서 누리는 의지의 자유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며 안전한 자유이기에 그렇다.

에드워즈는 두번의 대각성 운동을 경험했으며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본주의적 사상의 거센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수호해야만 할 매우 중요한 시대적 사명을 자각했다. 인간의 원죄를 부인한 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안주의 등의 신학적 오류와 부패한 교리에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 삶의 지성적 노력을 쏟아부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세권의 책 중 한권인 <의지의 자유>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나님이 주신 차갑고 날카로운 이성과 예리한 지성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목회자의 따뜻한 심성은 그의 신학과 철학적 주장이 피상적인 하나의 지식의 체계를 자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증거이다. 수 많은 사역일정 속에서도 하루 13시간을 공부하는 철저한 지성적 노력과 치열한 준비가 없었다면 아마 당대에 몰아닥쳤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사조를 거슬러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죽을 것만 같았고,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던 <신앙감정론>은 본서에 비해 이해도 쉬웠고, 술술 읽혔던 기억이 있는 데 사실 본서는 그에 비하면 몇배는 어려운 책이다. 워낙 에드워즈가 신학이나 철학적 사고에 능통했던 비범한 인물이었고, 지금까지도 신학자들은 물론 일반 철학계에서도 에드워즈의 논의를 관심갖고 연구한다고 하니 뭐 다른 할말이 더 필요하겠냐만서도 그렇기에 나와 같은 범인의 사고와 이해력으로는 사실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책 중 한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발견하게 되는 사실 한가지는 지금의 조국 교회와의 연결선상에서 에드워즈의 논제들을 관련짓지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70~80년대 양적으로 큰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 개신교가 어느 순간 주춤하며 양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질적으로도 목회자들의 부패와 타락, 교회의 세속화와 혼합주의의 만연 등으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요즘 우리는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사상적 혼탁함을 경험하며 그에 맞서 싸운 에드워즈의 저작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것은 비본질이 본질을 뒤집는 상황 속에서 어렵고 이해할 수 없지만 본질을 붙잡고 회복하는 것만이 한국 교회가 살수 있는 길이며 신자들의 삶이 진리의 터전 위에 서도록 돕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를 진리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 삶을 불태우며 하나님과 시대 앞에서 몸이 바스러지는 지성적 헌신을 다했던 위대한 영적 거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걸출한 수작 <의지의 자유>를 이 시대 바른 신자의 삶을 살기위해 깨어 몸부림치는 용기있는 신자들에게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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