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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이름 모를 작가의 신간, 알라딘 이달의 주목 도서. 이것이 이 책의 첫 만남이었다. 달까지 가자고 해서 SF 소설인가 했지만 그게 아니라 주식, 비트코인과 비슷한 소재로 주인공이 일확천금하여 떼부자가 되는 내용이란다. '뭐 요즘 다들 그런 것 하나씩 하는 것 같긴 한데..' 시의성은 있다고 보지만 그다지 관심이 가진 않았다. 나는 일단 그런 걸 할 자본도 없고 그럴 깡도 없을뿐더러 나는 내가 돈에 있어서만큼은 모험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개미처럼 묵묵히 일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부한 내용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겨울서점의 '12시간 책 읽기 챌린지'를 보던 차에 겨울님이 이 책을 읽고 감탄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역시 페이지터너라는 칭찬을 하시면서!! 궁금해서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7월이 되자마자 알라딘 장바구니더미에서 이 책을 덥썩 물었다! (참고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선별해서 담아놓은 알라딘 장바구니에는 200권이 넘는, 300만 원은 족히 되는 책들이 내가 그들을 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럴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본 책! 가볍게 집어 들었지만 어찌 보면 흔한 소재를 이렇게나 잘 풀어낼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장편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장류진 작가는 상황에 적합한 표현을 아주 맛깔나게 서술하였다. 적절한 인용은 스토리를 한층 더 풍부하게 하였다. 단순히 표현만 좋은 것이 아니라 이 표현들이 사회 현실을 너무나도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이에 더해 페이지터너라는 수식어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무리 현실 사회를 고스란히 담아 잘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재미가 없거나 읽기 어려우면 말짱 꽝. 하지만 이건 당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짜디짠 흙수저의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절대 어둡지만은 않았다. 그 안에서는 희망과 행복하고 즐거운 요소들이 구석구석 담겨있었다. 그렇게 주인공들과 일희일비하며 읽다 보니 어느새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버린 상태였다.
불호였던 평을 보자면, 어떻게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성공 시나리오를 쓰냐는 것이다. 일확천금이 이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나도 읽으면서 '말도 안 된다 정말ㅋㅋ' 하면서 읽었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소설의 묘미 아닌가, 누가 망상이라 하냔 말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쯤 이런 행복한 상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는 돈과 삶에 대한 기준과 가치관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회사란.. 말그대로 비즈니스!
29p - 하지만 은상 언니와 지송이를 알고 나서부터는 회사에서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각기 다른 부서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었고 서로를 평가할 필요도 없었다.
대학교에 오기 전부터 '대학교 친구는 비즈니스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느끼기엔 대학교는 고등학교보다 무언가 경직된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그저 비즈니스인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실 그렇게 따지면 어디를 가던 비즈니스다. 하지만 비즈니스 친구도 이젠 소중한 관계임을 한다. 내 인생에서 결국엔 지나가고 말 사람이어도. 지나가는 그 순간순간을 잘 보내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기. 쓰고 나니 말이 쉽지-_- 하하.
이 얘기를 하던 게 아닌데 아무튼 하고자 했던 말은, 나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친구가 좋다. 서로 평가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어 불편하지 않는, 내가 무엇을 잘하든 못하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 주는, 이해관계가 없어도 나라는 존재가 좋아서 나를 찾아주는! 그런 친구! 인누와!
그리고 짠내나는 분투기,,ㅜㅜ
70p - 현관문 열자마자 침대가 보이지 않고, 자는 공간에서 부엌이 보이지 않고, 밥 먹을 때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휴식과 식사와 수면과 배설의 경계. 생활에 따른 공간의 분리.
96p - 따라서 방이 좁을수록 변기의 존재감은 커졌다. 4평이 채 안되는 방에서 유리로 된 벽 안에 자리한 변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97p - 나는 분명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전보다 세개쯤의 나은 점과 한개쯤의 별로인 점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플러스마이너스를 해보면 결국 두개쯤 나은 곳으로 나아가는 셈이었다. 비단 주거 공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인생 자체가 그랬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지날수록, 한살 더 먹을수록 늘 전보다는 조금 나았고 또 동시에 조금 별로였다.
103p - 지난 몇년간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같은 회사에 다녀도, 비슷한 월급을 받아도, 결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이에는 투명한 선과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었다. (중략) 그 아래에 내 자리를 만들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랬다.
192p - 고기도 먹어본 놈이나 많이 먹는다는 말이 맞나봐. 내가 이런 것들을 즐길 자격이 있나 싶은 거 있지. 솔직히 아까부터 주책맞게 엄마 생각까지 나.
// 야! 니가 그럴 자격이 왜 없냐? 그럴 자격 있다. 누구든 좋은 걸, 더 좋은 걸 누릴 자격이 있어.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너도, 나도, 우리 엄마도, 그건 다 마찬가지인 거야.
196p -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라는 말. 자연스럽고 흔한 말이지만 그런 자연스러움은 결코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48p - 창문 두개가 마주 보고 있어서 환기가 잘되는 곳에 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그런데, 고작 그런 게 욕심일까? 잘 때는 음식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은 마음을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근래에 자취에 대한 로망이 점차 생기면서 졸업하고 독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 계획의 첫 번째 단계는 당연 집, 원룸을 알아보는 것. 여기저기 허위 매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략적인 시세를 파악하고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거에 대한 내용에 공감이 많이 갔다. 강남 세브란스 실습 때 고시원에 살면서 느꼈던 답답함. 단순히 좁은 것만이 아니라 경계 없음에서 나오는 불쾌함. :( 생활에 따른 공간의 분리가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구나 하고 느낀다. 독립하게 되면 잘 알아보고 계약해야지!
그래, 이거다! 내가 듣고 싶은 말..
134p - 한마디로 이건 아가씨 잘못이 아니다, 이거예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이런 큰 강을 만나면 불은 꺼질 수밖에 없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내가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고. 누군가 나를 온전히 알아주는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잘 해왔다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라고.
언젠가 한 번 느껴봤던 감정.
156p - 조금 이상했다. 벌써 다 알고 있다는 느낌, 미래에서 나를 과거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 일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더는 이 회사에 다니지 않는 때가 온다면, 그리고 그때 이곳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게 아니라 정확히 바로 지금 이 장면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 나는 지금 이 순간의 한복판에 서서 이 순간을 추억하고 있었다.
소중한 추억의 감정들을 앞으로도 많이 느끼고 싶다.
말도 안되는 말 하지도 마세요 팀장님ㅎ.
13p -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네네"만 반복하며 살다가는 뜨거운 증기를 가득 머금은 밀폐용기처럼 위험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열기가 비집고 나갈 숨구멍 같은 게 필요하다는 것을, (생략).
279p - 회사 로고 같은 건 일상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애초에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모순된 틀 안에서 불가능한 걸 요구했다. 비유하자면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주세요'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장류진 작가님이 감정과 상황을 비유하는 스타일이 참 좋다. :) 참으로 통쾌한걸? 나도 곧 내년이면 회사(?)에 들어갈 텐데 상사가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다. 존경스럽고 배려심도 많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합리적인 사람이길 기도합니다. 물론 동기도 나와 쿵짝이 잘 맞는 천성 좋은 사람이기를!
옛말은 틀린 말이 하나 없다더니, 아주 진국인 명언이다.
289p - 중국 송나라 시대 학자 중에 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있어. 인생삼불행. 인생에 세가지 불행이 있다는 말이야. 일단 첫번째로 유고재능문장.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나는 거. 능력이 애초에 날 때부터 출중하다보니 어떻게 되겠어? 노력을 안 하는 거야. (중략) 그다음 둘째는 석부형제지세. 부모 형제의 권세가 대단한 거. 부모의 재력, 권력, 그런 것만 빋다보면 결국 자기 자신이 일구어내서 열매 맺는 경험을 못하는 거지. (중략) 그리고 마지막이 뭐냐, 소년등과일불행이야. 제일로다가 불행하다는 거야, 소년등과하는 것이. 너무 어린 나이에 과거급제해서 출세를 하면 인생을 살아보기도 전에 삶에 대해 교만해져버리는 거야. 그게 행복해 보여도 사실은 불행의 지름길인 거지.
그래.. 나는 재능을 타고나지도, 부모가 부자이지도, 내가 출세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실을 불행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래도 씁쓸하다. 하지만 뭐, 이젠 별생각 들지 않는다. 나는 대기만성형이다! 꾸준히 노력해서 천천히 앞으로 또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지! ^ㅡ^
내가 하고 있는 것. 믿고 싶은 것.
327p - 뭐랄까, 사실 그건 주문 같은 거였어. 그냥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될 거라고 믿어야만 했어. 잘되지 않을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도 한쪽으로는 늘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어.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무조건 될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 그게 바로 지금 내 마음!!! 인천시 말고 서울시 공무원이 끌리는 이유는 왜일까. 그래도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울 고등학교 전교 1등인 OO 친구가 나의 선택을 지지해 주었으니, 나는 간다, 어디로? 서울시로! 2022년에 합격할 예비 서울시 공무원 입니다. :)
이런 감정을 이렇게 세심하게 표현해내다니.
330p - 평생을 저 작은 돌멩이처럼 아슬아슬한 감각으로 살아왔다. (중략) 이런 내 심정을 고백하면 항상 이런 목소리들이 뒤따라 들려오곤 했다. 네가 그런 걱정을 왜 해? 너 지금 우리랑 같이 이곳에 발 디디고 똑바로 잘 서 있잖아. 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너정도면 엄청 괜찮은 편이야. 어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우거진 솔숲 가까이에, 저기 가장 안쪽에서 나를 향해 그러게 외치고 있었다. (중략)
두려움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깎여나가 떨어진 돌가루만큼, 딱 그만큼만 물러설 뿐이었다. 깎이면 깎이는 대로, 그때그때 조금씩 뒤로 비켜서면서, 추락의 시기를 기약 없이 유예하면서.
그 상황에 직접 들어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설명해 줄 수도,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제는 구태여 설명하지도 않게 된다. 그렇게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그 알지 못함을 '위로'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런 것을 표현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332p - "돈도,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가는 거야."
앞으로 나는 돈을 지금보다도 더 열렬히 사랑할 것이다.
스토리 자체가 훌륭하기보다는 작가의 통찰력과 표현력이 돋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스토리도 나무랄 데 없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작가이다. 단편집으로 <일의 기쁨과 행복>이라는 책도 쓰셨던데 그것도 꼭 읽어봐야겠다! 주제도 관심이 가고 아무렴 이제 guaranteed된(?) 작가라는 느낌이 팍팍 든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