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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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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를 이 책으로 끌어당겼던 건, ‘사회파 연애소설’이라는 정이현 작가의 추천사 속 한 구절이었다. ‘사회파’와 ‘연애소설’이라는 말은 서로 조금 다른 카테고리 안에 있는 말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전에 읽었던 윤고은 작가의 전작 『밤의 여행자들』이나 『도서관 런웨이』가 연애소설이 아니었던지라, 작가가 어떻게 로맨스를 풀어나갈지 궁금하기도 했다. 초록색과 나무, 그림자를 좋아하는 내 마음에 쏙 들었던 표지도 한 몫을 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정이현 작가의 추천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사회파 연애소설’이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사회생활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회에서 일어난 문제가 두 사람에게 몰아치고, 함께 헤쳐나가려던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틈을 만든다.

‘미아’는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여자였다. 미래에 필요할 지 모를 생존배낭을 만드는 일을 하며, 미래에 들을 단 하나의 음악을 생각하는 사람. ‘태오’는 과거를 바라보는 남자였다. “어딘가 부유하는 느낌이 있는(31쪽)” 90년대를 동경하는, 깨어나면 과거가 될 자신의 꿈 속을 매일 누비는 사람. 그렇게 다른 시간을 바라보며 살아온 두 사람은 함께 일하는 사이가 되어, 현재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현실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사회 문제들은 읽는 우리와도 밀접한 문제들이다. 자동화시스템의 도입으로 줄어드는 직원들, AI 직원의 도입, 사건사고에 대한 사이버불링. 당장 몇 년 안에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문제들이 글 속에서 발생하는 것을 보며 섬뜩해질 때가 많았다. 미아가, 태오가 겪는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난다면. 주인공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글을 읽어내려가다가도 문득 현실로 돌아와 내 생각에 빠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사랑이다. 미아와 태오는 그들에게 밀려오는 거센 시간의 파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힘껏 쥐고 버티려 애쓴다. 이야기를 읽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나, 책장을 끝까지 넘기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치열한 노력에도 결국 마주해야 했던 그 사랑의 끝을 함께 지켜보는 일이 내게도 제법 힘든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읽는 내내 두 사람과 함께 테니스나무 아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을 맺었던 그 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랑은 왜 이리 아름답고도 힘겹고 슬픈 것일까. 윤고은 작가의 현실적이고도 섬세한 문장으로 담아낸 사랑이 이 이야기 속에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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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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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난 뒤 한 유명한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다.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시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살아내는 몸과 그 몸을 관통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억은 모두 다르다. 이 책 속의 주인공들 또한 같은 시간 속에서 각자 다르게 시간을 감각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이야깃거리는 ‘몸’이다. 주인공 경선의 몸에 생긴 변화로 언니인 안나와 딸 다은, 손녀 다니엘에게 하나의 접점이 생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년에 접어든 경선과 안나는 세월을 거치며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을 이야기 내내 종종 떠올린다. 1년도 채 차이나지 않는 짧은 터울로 태어난 두 자매는 너무나 다른 몸을 가졌기에 다른 생각과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았다. 몸의 변화가 불러오는 사건들 속에서 그들은 다른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게 된다. 몸이 맞부딪힌 시간, 그 속에서 생겨나는 기억.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각자의 몸으로 실을 내어 짠 그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속수무책으로 끌렸다. <시간의 감촉>.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을 전제하는 감촉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왠지 생생하고, 홧홧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내고 싶다는 나의 숨은 의지 때문일까?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은 ‘시간의 감촉’을 한데 모은 더미일지 모른다. 그 감촉은 모두에게 다 다를 것이다. 나의 몸이 순간순간 느꼈던, 느끼고 있는, 느끼게 될 그 감촉들을 잘 거두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이가 거둔 시간의 감촉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에게 펼쳐질 새로운 미래의 시간을 모두가 온전히 감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작가의 말처럼, “우리 모두 그 언젠가의 시간 속 얼굴이 ‘웃을 때에 가장 예쁜 얼굴’이 되기를(382쪽)”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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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리커버 에디션)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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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소소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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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타오르다
우사미 린 지음, 이소담 옮김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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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굉장히 강렬하다. '최애, 타오르다'라는 제목도 예사롭지 않은데, 심지어 "최애가 불타버렸다."라는 문장으로 글이 시작된다. (물론 '불타버렸다'는 표현은 정말 말 그대로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누군가를 '최애'로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겪게 된 주인공 '아카리'의 이야기는 책장이 넘어갈수록 점점 그 불씨를 키워간다. 옮긴이의 말을 빌려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삶의 의미를 최애를 좇는 데에서 찾으려 했던 주인공 아카리가 최애의 폭력 논란과 연예계 은퇴로 충격을 받는 이야기이다." 소재가 극적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만큼 충분히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뒤통수를 때리는 듯 강렬한 반전보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카리의 심리 묘사에 집중한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통증이었다. 순간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예리한 통증, 그다음엔 밀쳐졌을 때 오는 충격과도 비슷한 통증. 창틀에 손을 올린 소년이 방 안으로 몰래 들어와 짧은 부츠를 신은 발끝을 달랑달랑 흔들었을 때, 그의 작고 뾰족한 부츠 끝이 내 심장을 파고들더니 무심하게 걷어찼다. 그 통증이라면 잘 알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나에게 통증이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내 살 속에 익숙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이따금 생각났다는 듯이 저릿저릿할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넘어지기만 해도 자연히 눈물이 나던 네 살 때처럼 아팠다. 하나의 통점으로부터 쫙 퍼지듯이 육체가 감각을 되찾았고, 조악한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빛으로 세상이 선명해졌다." (15-16쪽)


소위 '덕통사고(덕질+교통사고, 교통사고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덕질 입문의 순간을 비유하는 말)'라 말하는 상황이다. 그저 주인공의 어릴 적 스쳐지나갔던 낯선 인물 중 한 명이었던 타인이 주인공의 '최애'로 탈바꿈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는 작가의 표현에 감탄하며 읽는 걸 잠시 멈추었던 것도 같다.


제목부터 대놓고 '최애'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 이야기 내내 '덕질'을 하는 '팬'이 주인공인 만큼 읽으면서 나의 덕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아카리를 완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카리 같은 팬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에는 나에게도 최애가 전부였던 시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아카리처럼 자기 자신을 다 바쳐 최애를 사랑하기에는, 최애를 통해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에는 나에겐 나도 너무 소중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최애를 볼 수 있었던 시간들 대신 내 일상을 살아갈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아카리를 비난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아카리처럼 최애가 보는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고, 나처럼 최애를 좋아하지만 나의 일상 역시 소중한 사람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들 어렵지 않게 해내는 평범한 생활도 내게는 쉽지 않아서, 그 여파 때문에 구깃구깃 구겨져 괴롭다"고 말하는 아카리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 괴로움을 양분 삼아 있는 힘껏 쏟아부었던 그 애정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중단되어야 했다는 것도.


아마 누군가에게는 이 이야기가 그저 한심해보일지도 모른다. 팬들의 사랑을 받는 당사자들조차 자신의 팬들에게 "내가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절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팬들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못하지만, 때로 누군가는 아카리처럼 그 좋아하는 마음을 붙잡고 힘겨운 자신의 여생을 겨우 살아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마음이 동기부여가 되어 진로를 결정하게도 하고, 아무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그 마음으로 위로와 힘을 얻기도 한다. (나에게도 최애의 노래와 목소리를 통해 수많은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함부로 아카리의 이야기를, 그 차갑고도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비난하거나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 창비 가제본서평단 참여로 발간일 전 가제본을 제공받았음


아하, 이 사람이구나. 어린잎을 지나온 바람이 그즈음에 자꾸만 늦어지던 체내 시계의 나사를 조여 나를 움직였다. 체육복은 못 찾았지만 단단한 심지 하나가 몸속을 꿰뚫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다. - P19

다들 어렵지 않게 해내는 평범한 생활도 내게는 쉽지 않아서, 그 여파 때문에 구깃구깃 구겨져 괴롭다. 그래도 최애를 응원하는 것이 내 생활의 중심이자 절대적인 것이라는 점만은 세상 그 무엇보다 명확했다. 중심이 아니라 척추랄까.
공부나 동아리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해서 번 돈으로 친구와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사거나, 대부분은 그렇게 인생을 꾸미고 살찌움으로써 더욱 풍족해질 것이다. 나는 역행하고 있다. 무슨 고행이라도 하듯이 나 자신이 척추에 집약된다. 무의미한 것을 깎아내고 척추만 남는다. - P43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 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 P69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그래서 최애를 해석하고 최애를 알려고 했다. 그 존재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고 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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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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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주문하고, 택배를 뜯고, 책 첫 장을 펼쳐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에 대해 짐작할 수 없었다. 책을 꺼내자마자 보였던 띠지의 추천사는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허구가 아니다. 후일담 문학이 아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 지금의 르포이고, 지금의 시이며, 지금의 신화다." 이 문구 역시 책을 읽지 않은 나에게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의 나는 이 추천사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하게 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제목을 처음 본 나는 이 제목이 보석 중 한 종류인, 조개에서 채취되는 진주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진주는 우리나라의 지명 중 하나인 '진주'였다. 진주라는 도시는 책의 화자에게, 그리고 책의 내용 전반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인 '아버지'를 만나고자 방문했던 도시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도시의 지명을 제목으로 정한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진주를 둘러싼, 그 진주에 갇혀야 했던 화자의 아버지를 둘러싼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지명으로서의 '진주'가 아닌, 내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보석으로서의 '진주'를 떠올렸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간 이물질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조개가 분비하는 체액이 이물질을 감싸며 형성된 조직이 성장하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책 속의 이야기도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슷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독재에 맞서 자유를 찾는 데 힘쓰던 아버지의 잦은 부재 속에서, 어린 마음으로 다 이해하기도 전에 겪어내기부터 해야 했던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그 상황에 굴복하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생각하고 다짐하고 때로는 글로, 그림으로, 편지로 쏟아냈던 마음들이 슬픔을 감싸며 만들어낸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가 이 책 한 권에 담겨있다고.


독자에게 모든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시작은 굉장히 난감하고 어려웠다. 에세이 같지만 소설 같기도 하고, 시 같지만 산문이기도 한 이 글에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끝까지 읽어내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생기고, 읽다보니 어느덧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어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슬픔'이다. 읽는 동안 종종 울컥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던 구절도, 마음이 아파 읽기를 잠시 멈추게 되는 순간도 많았다. 글의 어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기만 한데, 그 담담함이 더 사무치게 슬펐다. 얼마나 아파야, 얼마나 그 아픔을 속으로 삭여야, 얼마나 마음을 추슬러야 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을까. 이 슬픔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것이지만, 이야기를 읽는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숨죽인 슬픔을 감수해야만 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 책의 시작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시작한다. 민주화 운동에 젊음을 바쳤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며 도왔던 어머니는 이야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다. 아버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나왔던 현대사에서 충분히 찾아낼 수 있는 장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로 지도자를 바꿔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독재의 그늘 아래 빛을 찾아 나아가던 사람들, 그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던 그들의 가족들을 담아낸 이 책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스탈린의 독재에 대항했다 탄압당했던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슈탐의 아내 나데즈다 만델슈탐을 소개하며, 죽기 직전까지 남편의 시를 보존하기 위해 암송했던 시 전부를 복원하는 데 힘썼던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시간, 이 언어를 여기 기억함으로써 / 그 시대, 그 어둠, 그 고통, 그 잘못을 / 우리가 반복하지 않기 위해. / 우리가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110쪽) 이것은 곧 작가의 목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슬픔이 누군가에게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이야기 속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누군가 다시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완성해냈을 것이다.


책의 말미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 어떤 언어로 꺼낼 수 있나. / 그것은 나의 오랜 질문이었다." (275쪽) 자신 내면의 오랜 질문을 위해 긴 시간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작가의 심정은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쓰다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쓰는 과정을 반복하며 결국 이야기를 책으로 완성해낸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려간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며 책을 끝낸다. "나의 이야기는 당신을 향해 쓰이고, 당신에게 가닿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그것을 알 것 같다." (294쪽) 작가의 이야기였지만 우리를 위해 쓰였고, 우리에게 와닿아 비로소 완성된 이 이야기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이 책을 덮는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이야기의 슬픔을 우리가 조금씩 나누어 언젠가 그 슬픔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딸은 이제부터 수첩에는 어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만을 적기로 마음먹는다. 말할 수 없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은 어디에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말로는 할 수 없는 것만을 쓸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는 결코 닿을 수 없으며 그들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을 쓸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쓰고 말할 것이다. - P96

돌아보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돌아보지 않는 것. - P100

이 시간, 이 언어를 여기 기억함으로써
그 시대, 그 어둠, 그 고통, 그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 P110

그들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언젠가부터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으며 가장 중요한 어떤 것에 관해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다른 아내에게, 남편은 다른 남편에게, 형은 다른 친구에게, 동생은 또다른 친구에게, 잠시나마 감정을 꺼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 열심히 살았어. 그래도 잘했지.
그게 최선이었어. - P203

나에 대해 쓴다고 해서 나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나의 이야기는 당신을 향해 쓰이고, 당신에게 가닿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그것을 알 것 같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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