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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책을 주문하고, 택배를 뜯고, 책 첫 장을 펼쳐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에 대해 짐작할 수 없었다. 책을 꺼내자마자 보였던 띠지의 추천사는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허구가 아니다. 후일담 문학이 아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 지금의 르포이고, 지금의 시이며, 지금의 신화다." 이 문구 역시 책을 읽지 않은 나에게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의 나는 이 추천사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하게 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제목을 처음 본 나는 이 제목이 보석 중 한 종류인, 조개에서 채취되는 진주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진주는 우리나라의 지명 중 하나인 '진주'였다. 진주라는 도시는 책의 화자에게, 그리고 책의 내용 전반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인 '아버지'를 만나고자 방문했던 도시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도시의 지명을 제목으로 정한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진주를 둘러싼, 그 진주에 갇혀야 했던 화자의 아버지를 둘러싼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지명으로서의 '진주'가 아닌, 내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보석으로서의 '진주'를 떠올렸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간 이물질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조개가 분비하는 체액이 이물질을 감싸며 형성된 조직이 성장하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책 속의 이야기도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슷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독재에 맞서 자유를 찾는 데 힘쓰던 아버지의 잦은 부재 속에서, 어린 마음으로 다 이해하기도 전에 겪어내기부터 해야 했던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그 상황에 굴복하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생각하고 다짐하고 때로는 글로, 그림으로, 편지로 쏟아냈던 마음들이 슬픔을 감싸며 만들어낸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가 이 책 한 권에 담겨있다고.
독자에게 모든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시작은 굉장히 난감하고 어려웠다. 에세이 같지만 소설 같기도 하고, 시 같지만 산문이기도 한 이 글에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끝까지 읽어내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생기고, 읽다보니 어느덧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어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슬픔'이다. 읽는 동안 종종 울컥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던 구절도, 마음이 아파 읽기를 잠시 멈추게 되는 순간도 많았다. 글의 어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기만 한데, 그 담담함이 더 사무치게 슬펐다. 얼마나 아파야, 얼마나 그 아픔을 속으로 삭여야, 얼마나 마음을 추슬러야 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을까. 이 슬픔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것이지만, 이야기를 읽는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숨죽인 슬픔을 감수해야만 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 책의 시작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시작한다. 민주화 운동에 젊음을 바쳤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며 도왔던 어머니는 이야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다. 아버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나왔던 현대사에서 충분히 찾아낼 수 있는 장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로 지도자를 바꿔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독재의 그늘 아래 빛을 찾아 나아가던 사람들, 그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던 그들의 가족들을 담아낸 이 책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스탈린의 독재에 대항했다 탄압당했던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슈탐의 아내 나데즈다 만델슈탐을 소개하며, 죽기 직전까지 남편의 시를 보존하기 위해 암송했던 시 전부를 복원하는 데 힘썼던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시간, 이 언어를 여기 기억함으로써 / 그 시대, 그 어둠, 그 고통, 그 잘못을 / 우리가 반복하지 않기 위해. / 우리가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110쪽) 이것은 곧 작가의 목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슬픔이 누군가에게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이야기 속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누군가 다시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완성해냈을 것이다.
책의 말미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 어떤 언어로 꺼낼 수 있나. / 그것은 나의 오랜 질문이었다." (275쪽) 자신 내면의 오랜 질문을 위해 긴 시간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작가의 심정은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쓰다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쓰는 과정을 반복하며 결국 이야기를 책으로 완성해낸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려간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며 책을 끝낸다. "나의 이야기는 당신을 향해 쓰이고, 당신에게 가닿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그것을 알 것 같다." (294쪽) 작가의 이야기였지만 우리를 위해 쓰였고, 우리에게 와닿아 비로소 완성된 이 이야기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이 책을 덮는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이야기의 슬픔을 우리가 조금씩 나누어 언젠가 그 슬픔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딸은 이제부터 수첩에는 어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만을 적기로 마음먹는다. 말할 수 없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은 어디에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말로는 할 수 없는 것만을 쓸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는 결코 닿을 수 없으며 그들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을 쓸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쓰고 말할 것이다. - P96
돌아보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돌아보지 않는 것. - P100
이 시간, 이 언어를 여기 기억함으로써 그 시대, 그 어둠, 그 고통, 그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 P110
그들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언젠가부터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으며 가장 중요한 어떤 것에 관해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다른 아내에게, 남편은 다른 남편에게, 형은 다른 친구에게, 동생은 또다른 친구에게, 잠시나마 감정을 꺼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 열심히 살았어. 그래도 잘했지. 그게 최선이었어. - P203
나에 대해 쓴다고 해서 나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나의 이야기는 당신을 향해 쓰이고, 당신에게 가닿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그것을 알 것 같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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