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랜덤 시선 7
김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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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한 사람'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이고 우리는 그걸 파헤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을 어제까지 휴지로 덮어두었다는 건 우리 생각이고 내 생각은 또 다르다 나는 잘못한 적이 없는 사람이고 한편으로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 심지어 나한테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잘못한 적이 없는 사람이고 우리는 그걸 모른 척할 때가 더 많다 모른 척하고 넘어갈 때가 더 많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더 용서받지 못할 인간인가 그렇다와 아니다 사이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 불충분하다는 증거다 내가 나를 방면하는 것도 우리가 눈감아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이고 우리는 그걸 모른 척할 때가 더 많다 모른 척하고 넘어 갈 때가 더 많다 나는 끝까지 결백한 사람이고 우리는 그걸 파헤치고 싶을 때만 파헤친다 그럴 때가 더 많다

 

 

김언, <거인> 中

 

 

+) 나를 쪼개어 본다면 어떻게 나누어질까? 그것이 가능할까? 그의 시에는 유달리 '입술, 이빨, 혀, 코, 입, 눈, 얼굴, 몸'등의 신체 부분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그게 신체의 일부인지, 화자의 전부인지, 화자를 대신하는 대유적 표현인지 구분을 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건 '나' 혹은 '우리'로 설명하고 있는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너가 아니라 우리이며 우리는 나이다. 결국 '나'는 타인과의 사이에서 생성되는 자아와 본래의 자아로 나뉘는데, 그것이 곧 우리이자 나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은 이러한 경계지음에 대해 조롱하며 경계없음의 실체를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마멸하고 없는 순진한 돌덩이가 그의 얼굴이다. / 없는 사람을 중심으로 앞에서 봐도 투명하고 / 뒤에서 봐도 덩어리가 분명한 공기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 / 그 자리의 공기는 그 자리의 공기를 향해서 달려간다"([불멸의 기록]) 공기가 공기에게 달려가는 것, 공기의 일부, 그리고 공기의 실체, 그것은 곧 공기이다.

 

시인은 잘게 부수거나 나누고 혹은 합치거나 섞어도 결국 그 자체의 공기가 되는 성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성질은 추상적인 관념에도 적용되는데 '불안, 공포, 죽음, 침묵' 등이 그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것을 향해 가는 것, 그렇게 무수한 변화와 변모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결국 본래로 돌아가는 것. 이 시집에서 시인은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서 본래의 자기를 되찾는 공간으로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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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1987년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열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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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며 축적이란 말도 그에게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고, 권력욕이나 명예욕 같은 것에 몸달아 본 적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분방스럽고 다양해도 사실 그가 취해온 삶의 방식은 지극히 단순했다. 자기를 사로잡는 여러 개의 충동 중에서 가장 강한 것에 사회적인 통념이나 도덕적 비난에 구애됨이 없이 충실하는 것, 말하자면 그것이 그를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한 그의 행동 양식이었다.

- [금시조]

 

하지만 싸운다는 것도 실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가 그러했고, 누구와 싸워야 할지가 그러했고, 무엇을 놓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가 그러했다. 뚜렷한 것은 다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뿐- 다시 한 번 어른들 식으로 표현한다면, 불합리와 폭력에 기초한 어떤 거대한 불의가 존재한다는 확신뿐- 거기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대응은 그때의 내게는 아직 무리였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마흔이 다 된 지금에조차도 그런 일에는 온전한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종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으나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 <이문열 문학상 수상 작품집> 中

 

 

+) 이문열이란 작가의 행적에 대해 말이 많고, 그의 소설에 대한 평자들의 판단도 극과 극을 달리며 논란이 많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재미있는 만큼 치열하게 글을 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어떻게 권력에 순응하여 가는지 철저하게 분석한 소설로서 권력과 순종, 타협과 비굴, 반항과 순응의 논리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초등학생 교실을 배경으로 초등학생인 석대와 병태의 지배 구조는 사회의 지배 구조와 흡사하다.

 

그 속에서 권력이 무엇인지, 권력의 힘과 단맛 그리고 쓴맛까지 모두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사회학적 이론보다도, 어른들의 사회에서 보게되는 장면보다도 정확하게 우리의 머리에 새겨진다. 학생들이 읽어도, 어른들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가는 작품이다. 이 외에 <금시조>, <시인>, <시인과 도둑> 등의 작품은 당시 작가가 짚어주는 당대의 문제점을 보게 된다. 작가에 대한 여러가지 평들을 떠나서 일단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권력자와 그 아래 소시민들의 구도를 잘 제시한 작품으로 수작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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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랜덤 시선 9
안현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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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물회'

 

말린 물고기만 씹으며 겨울을 난 사내가

물고기를 물에 말아 알뜰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다

사랑할 때 애인의 몸을 뜯어 먹는 여자처럼

 

시든 언어만 씹으며 늙어가는 여자가

언어를 언어로 꿰어 멸망한 부족의 목걸이를 만들고 있다

죽을 때 스스로의 몸을 깊은 숲에 두는 족장처럼

 

사위어가는 것들의 모든 우울함으로 꽃은 피고

우울한 물고기의 이름은 우울한 물고기다

그것이 한계다

 

한계와 임계 사이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우울한 물고기 이름이다

이를테면 제대로 실패한 자만이 실패를 싱싱하게 맛볼 수 있다

 

 

안현미, <곰곰> 中

 

 

+) 안현미의 시는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상상의 세계로 꾸며졌다. 그것을 환상의 표상들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시인은 서정적인 틒 안에서 도발적인 시적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 근접한 것임에도 불구고하고 시인의 작법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서정을 끌어들인다. 그것을 이해하느냐 혹은 이해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안현미의 시를 극과 극으로 판단하는 결과가 나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인이 환상적인 표징들보다 좀더 서정에 공들였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상상의 세계에서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 시인, 혹은 언어, 인간 등등 뿌리는 그것에서 시작하여 지나치게 많은 가지를 치고 만들어졌다. 시인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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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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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위인전 속 인물들을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로 그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하는 행동에 확신이 있었는지. 겁나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냉동창고 담벼락에 기대앉아 속엣것을 올리면서 나는 반드시 유관순 언니를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했다.

p.69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이상해지더라. 그냥 글자만 쓰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라. 마음을 깊이 뒤집어 밭을 가는 것도 같고. 맘속에서 찌개를 끓이는 것도 같고."

p.137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p.220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 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올리는 일이든.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p.256

 

 

김형경, <꽃피는 고래> 中

 

 

+) 김형경의 소설을 읽다보면 감정의 절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된다. 이 소설에는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순진한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들이 공장을 지을 때까지 자신들의 바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순간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그들은 그렇게 바다를 잃었다. 외지인들이 등장하면서 할아버지는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의 공장을 반대하면서부터 나라에서는 이상한 법을 만들어 고래잡이를 금지시켰다. 졸지에 할아버지는 고래를 잃고, 자신의 삶을 잃었다.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게 되고 한순간에 홀로 남게 된다.

 

그렇게 한 순간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그 잃어버린 것을 단 한번이라도 느껴보고자 기회를 만든다.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고래를 잊지 않기 위해 고래 박물관을 만들고,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고래 잡이 배를 몰며 바다로 뛰어든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열정이며 삶이며 희망이다. '나'는 잠재된 분노를 친구에게 터트리고 정신적인 성장의 고통으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것도 할아버지와 고래잡이 배를 경험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이라는 걸. 누구도 확신이 있어서 자신의 길을 걷거나 꿈을 갖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들이 상상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시작한다. 설사 그림이 좀 달라지면 어떤가. 여러번 고쳐가야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법이다. 그것처럼 삶도 많은 수정을 거쳐야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김형경은 이 모든 이야기를 감정을 싹 뺀 절제된 어조로 그린다. 그것이 오히려 더 슬프고 안타까움을 유발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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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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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좀 진부한 것 같아. 처음엔 꽤 재밌었는데 이것저것 사려다 보니 뭘 아는 게 있어야지. 돈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예를 들면?"

" 음........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옷 가게도 그렇고 자동차도 그렇고. 뭐 그런 거지. 세금을 어떻게 빼돌릴지도 잘 모르고."

 수진은 불분명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정적인 웃음이 아니란 거였다.

 "그래서 오빠는 부자가 못 되는 거야. 부자들은 돈을 쓰는 것보다 돈을 버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거든."

p.86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전에 없던 새로운 버릇이 생긴 건 확실해. 이를태면 한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 거야. 아침에 출근하는 동안 내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거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고, 결국은 시간 낭비일 뿐인데도 집착하게 돼."

 "그건 프로그래머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단순한 가정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을 실제로 준비하고 대비한다는 거야.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상황에서는 그런 태도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겠지. 가령 태풍이 들이닥치거나 낙뢰가 내리칠 때를 대비한 행동 요령을 숙지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그런 태도가 비상식적으로 여겨진다는 거야. 인간은 이상하리만치 신뢰나 믿음에 의지하려 들거든."

 "당연한거 아냐?"

 "그래. 그 당연한 인식이 내게서 사라지고 있는 거야."

p.115

 

 

신경진, <슬롯> 中

 

 

+) 심사위원들의 지적대로 이 책은 매우 잘 읽히는 장점이 있으나 오문이 있고 도박사들의 정보를 인용하여 전달하는 형식이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도박을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곧 일상이며 그것에서도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는 주제의식의 전달은 새로웠다. 하지만 나는 정보 전달과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 소설의 형식이 작품의 진지함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좀 더 현실적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정보 전달자를 제3의 인물로 선정하고 진행했다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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