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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가 지나간다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용경식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4년 3월
평점 :
절판
이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주 만났고, 나는 이제 멋모르고 어중간하게 그들의 그룹에 끼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달리고 있는 기차에 뛰어올라 거기서 만난 낯선 네 사람과 동행하는 여행자였다. 자기가 혹시 기차를 잘못 탄게 아닌가 의심하는 여행자,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p.81~82
“우리는 내일 떠날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때까지 내 앞을 로가막고 있던 장애물과 족쇄가 제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어쩌면 내일 아침이면 사라져 버릴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차창을 내리자 시원한 공기가 밀려들면서 나의 행복감은 고조됐다. 밤안개가 전혀 끼지 않은 가로수 길을 따라 찬란한 네온 불빛들도 어른거림 없이 선명하기만한 청명한 밤.
p.146
내 생에 처음으로, 나는 확신을 갖고 행동했다. 나의 소심함, 의심, 나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 대해서도 변명하고, 나 스스로를 비방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나에게 불리한 구실을 제공하는 버릇, 이 모든 것이 각질이 되어 떨어져 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전까지 위험과 고통에 직면하지만 미래를 예견할 줄 알고 그것이 불가항력이라고 느껴서 그때마다 그것들을 회피하는 그런 종류의 꿈을 꾸곤 했다.
p.179
파트릭 모디아노, <서커스가 지나간다> 中
+) 어느 소설에 언급되었던 책을 찾아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프랑스 소설에 열광하는 나의 입장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누군가의 수첩에 이름이 적힌 것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게 되는 주인공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눈이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나 어쩐지 나는 이 소설의 첫 장면에, 그것도 그가 조사 받고 있는 조사실 밖으로 눈발이 날리고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한 소년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는 대부의 역할도 그의 정신적인 성장 이면에 존재한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가 만난 여자에 대해 궁금한 것은 사실이나 그는 묻기보다 짐작하는 것으로 자기의 입장을 정리한다.
시종일관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제외한 기타 소음이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작품은 전개되는데, 그것이 꽤 매력적이다. 어떤 상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보다,독자로 하여금 추측하게 만드는 대사와 분위기 속에서 글을 끌어가는 힘이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다른 작품을 또 찾아서 읽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