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사감과 러브레터 / 운수 좋은 날 외 하서명작선 6
현진건 지음, 윤병로 해설 / (주)하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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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윽과 남편은 기막힌 듯이 웃는다.

“흥, 또 못 알아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사회란 무엇인가? 아내는 또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릿집 이름이어니 한다.

“조선에 있어도 아니 다니면 고만이지요.”

남편은 또 아까 웃음을 재우친다.

 

p.90 - 현진건, [술 권하는 사회]

 

 

‘패배자’

그는 가만히 이렇게 자기를 불러 본다. 시냇물은 조약돌이 옹기종기 몰려 있는 수택의 발 밑을 지날 때마다 뭐라고인지 종알대고 흘러간다.

이 물소리를 해득만 한다면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수택으로서는 이 속삭이는 물소리보다도 지난날의 추억보다도 패배자의 짐을 싣고 가는 마차 바퀴 소리만이 과장이 돼서 울리는 것이었다.

‘패배자? 어째서 패배자냐? 오랫동안 동경해 오던 이상 생활의 첫 출발이지!’

 

p.135 - 이무영, [제1과 제1장]

 

 

현진건 외, <운수 좋은 날 외> 中

 

 

+) "조선 사회가 술을 권한다"는 주인공의 외침이 현재의 나에게도 가슴 깊이 다가온다.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자신을 비난하며 술을 마시던 주인공은 현재에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만큼 사회의 부조리함은 달라지지 않았다. 몇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답답한 사회 현실은 반복되고 있다. 이무영의 소설 속 주인공이 농촌으로 돌아간 것은 어쩌면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나치게 농촌과 도시를 이분화시켰다는 단점을 제외하고 이무영의 소설도 꽤 흥미로웠는데 무엇이 진정 이상 생활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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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 2008년 제53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경욱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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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처받은 진실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어. 상처받은 진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실뿐이야.

p.24  -김경욱, [99%]

 

내 얘기가 끝나고 한참 동안 미선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상한 음식을 억지로 삼킨 것 같은 기분이 엄습했다. 악취를 뿜어내는 그 감정의 정체를 나는 스스로에게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p.43  -김경욱, [99%]

 

삶이란 나약하고 낡아가는 일체의 것에 대해 잔혹하고 가차 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독일 사람 니체였다. 하지만 나약한 일체의 것에 잔혹하고 가차 없는 삶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p.65  -김경욱, [당신의 수상한 근황]

 

나는 그 사람 얼굴도 보기 전에 먼저 그 사람 이름을 알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저렇게 모두가 '보는' 곳에 사는 일이란, 그늘 한 점 없는 운동장에서 땡볕을 받고 있는 기분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의 형편은 어렴풋이 짐작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상기될 터였다. 그건 가난보다 좋지 않은 일일 수 있다고, 나는 걸음을 멈춘 채 수심에 잠겼다.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나의 선배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이 두식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p.106  -김애란, [네모난 자리들]

 

 

김경욱 외, <99% (2008 제5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中

 

 

+) 문학상의 기준이 무엇일까. 각각 제정된 문학상의 의미나 가치에 따라 기준이 정해지겠으나, 가끔 나는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까 싶다. 작품들을 상대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며, 심사위원이 누구냐에 따라서 작품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 당연히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당대의 수준있는 작품들을 선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상문학상 작품집과 현대문학상 수상집은 개인적으로 종종 읽어보는 책이다.

 

작년 현대문학상 수상집을 살펴보면서 역시 작품을 많이 써본 작가들의 자연스러운 문체와 매끄러운 서사 전개가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좋았다. 수상작인 김경욱의 소설 [99%]는 진실과 거짓의 이중적인 면모를 다루고 있는데,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인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1%와 99%의 거리, 그 사이에서 주인공은 숨겨진 진실 1%를 찾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진실인가. 이 소설은 진실을 진실로 그려내지 않고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외에 김애란의 [네모난 자리들]은 기형도의 시 구절을 인용하여 소설을 풀어내고 있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선배를 짝사랑하는 주인공이 삶, 혹은 사랑의 돌파구를 찾아 사라진 선배의 방에 방문한다. 그곳에 갇혀 있는 선배의 사랑을 안쓰러워 하면서도 자신의 사랑 또한 빈 집에 놓아두고 나오는 장면은 압권이다.

 

윤형수의 [만 장]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잠꼬대로 미래를 예견하는 은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은자의 아들 자훈이가 그들을 찾아다니며 은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각각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며 그들이 바라본 은자의 모습을 열거하는 구성이 제법 흥미로웠다. 끝내 은자와 자훈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들의 관계와 일생 그리고 심리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앞서 말한대로  어떻게 수상작을 선정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지만, 이런 책에 실린 모든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며 최근 작품들의 경향을 살펴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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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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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참고 견뎌야만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생을 꿈꾸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불행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때로는 견뎌서 얻은 것이 없는 삶이라서 시간을 느낄 수가 없다. 내가 살아온 시간은 읽어온 책들의 숫자로만 가끔씩 점검되고 확인된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그리고 오늘 이후의 날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책 속에 미래가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책 속에는 온통 오늘과 어제뿐이다. 하지만 내가 읽은 과거가 또 누군가에게는 미래가 될 것이 분명하다.

p.23

 

오늘과 내일이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삶을 살면서도 이정도면 괜찮다고,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힘든 상황에서도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곳이 있는 삶이 낫고, 그저 묵묵히 견디고 참아가면서 사는 것보다는 단번에 부수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삶이 낫다고 생각해.

p.129

 

나는 다른 사람의 시간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무얼 하든 어떤 식으로 살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자기를 파괴시키는 행위에 관해서는 두렵긴 하지만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영향을 받을 누군가가 있다면 곤란하다.

p.255

 

 

박주영, <백수생활백서> 中

 

 

+) 이 소설 속의 서술자가 있는 상황에 내가 있더라면 어땠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나도 그런 삶을 꿈꿔보곤 한다. 평생 책을 읽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과 나의 차이점은 그녀는 책을 소장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도서관이라는 문화적 혜택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어쨌든 나는 다음 구절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비슷한 사유 구조를 갖고 있을까. 대상에 대한, 그러니까 적어도 '책'에 대한 서술자와 나의 생각은 놀라울만큼 일치했다. 그만큼 책을 소유하고자(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작가는 꿰뚫고 있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살고 싶다. 책을 읽을 시간을 뺏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하기 싫다고 말한다면 별 핑계도 다 있다고 하겠지만 나한테는 그것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의 진실이다. 문제는 책 읽을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균형, 그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경제적인 논리에 해당한다. 노동을 하고 수입을 얻어 다시 새로운 생산을 만들어내는 논리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창출해내지 못하는 백수에 해당한다.) 작지만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에 기대어 산다. 스스로도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 타인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책을 읽으며 살 수 있는 삶이 그녀의 전부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작가는 충분히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장편소설이라기에는 스토리가 너무 단순하고, 제법 중복되는 작가의 주장이 반복되어 나와서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통일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내용 전개에 별 문제가 없으니 좀 참고 읽을 수 있다. 쓰고 읽는 것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말을 통해 어쩜 이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책을 읽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물질적인 세상에서 노동력 창출이라는 거창한 틀에 한 몫할 수 있는 일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런 우습지만 부러운 생각을, 오늘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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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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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됐다면서? 이혼 횟수가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어서 다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거야........ 겁쟁이들은 결코 사랑을 얻지 못해. 무엇이 그리 겁날 게 있어? 까짓것 상처밖에 더 받겠느냐고. 그리고 인생에 상처도 없으면 뭔 재미로 사냐 말이야."

p.64

 

오죽하면 인간에게 가장 오래된 두 가지 불치병이 있는데 하나가 어제 병이고, 다른 하나가 내일 병이라고 하고 싶다. 둘 다의 공통점은 아시겠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을 젊을 때는 그렇게 싫어했고, 지금도 젊을 때는 그러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나이가 드니까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다.

p.84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 살아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 싫지만 하는 수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그것을 껴안고 또 넘어서면 분명 다른 세계가 있기는 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상처는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상처를 버리기 위해 집착도 버리고 나면 상처가 줄어드는 만큼 그 자리에 들어서는 자유를 맛보기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신의 특별한 축복이 아닐까도 싶다.

p.171

 

- 그럼 싫어하는 사람은?

- 누구라고 꼭 집어 예를 들면 좀 너무하니까 부류를 들어 설명을 하면 이렇다. 아무것도 안 하고 푸념만 하고 있는 사람, 멋 안 내는 사람, 위선이 뭔지도 몰라 못 떠는 사람, 공손하게 존댓말하는 나에겐 불친절하고 반말 찍찍하는 아저씨들에겐 굽실거리는 종업원들이 정말 싫다.  요즘엔 특히나 제가 해야 하는 말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싫다.

p.251

 

공지영,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中

 

 

+) 최근에 공지영이 에세이를 많이 적어내는 것을 보며, 차라리 소설이나 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책이 훨씬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책을 읽으면서 킥킥 거리며 웃었는데, 공지영이 말했듯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 맞는 것 같다. 무엇보다 술취한 아저씨가 집을 못찾는 이야기는 정말 압권이었다. 하하하,

 

그녀의 말대로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다. 육체가 아파도, 마음이 아파도 일단 웃고 나면 한결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거나 할 때면 개그콘서트 같은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거나, 유쾌하게 쓰여진 글들을 찾아 읽곤 한다. 이 에세이는 위로와 위안을 주었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와 사뭇 다른 무게를 지닌 작품이다.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는 이야기들, 그러나 읽다보면 또 촌철살인의 시선이 있다. 나는 그게 공지영 작가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연륜이나 개인적인 체험에서 근원한 것이 아니다. 공지영이라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개성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무엇보다 그녀의 책을 읽을 때마다 어쩜 이렇게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참 신기하다. 싫어하는 사람까지 정말 꼭 닮았다.

 

옆집 언니처럼 매우 친근감이 가는 작가다. 그만큼 대중적이라거나 통속적이라거나 하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건 문장의 힘을 간과한 사람들이 목소리라고 생각된다. 한 문장을 만들어내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알까. 그 한 문장 한 문장의 힘으로 지금의 그녀가 있다. 사람들이 다른만큼 모두 같은 평을 내릴 수는 없겠으나 문장, 글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싶다.

 

하지만 이런 책을 공지영이 계속 출판하게 된다면 나도 심히 실망하게 되겠다. 문장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기분이 들테니까. 그래서 그녀의 인간적인 새 소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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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이구아나를 찾습니다
조영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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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어쩌랴. 살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에도 인생의 전부를 걸때가 있는데. 늘 그렇듯이 나는 자조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그런 어이없음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어이없음과 황당무계함이 내주는 길을 따라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충실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이 설령 뒤가 막힌 막다른 골목이나 뒤가 무지하게 뻥 뚫린 천 길 낭떠러지로 향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파는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무심히 걷다가 만난 24시 편의점 같은 것이다. 새로울 것도 반가울 것도 없는 무덤덤한 일상 속에서 조우하는 설렘, 그 곁을 지나던 나는 마침 몹시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팠다. 냉장고에서 꺼내든 생수 한 병 혹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 한 그릇에 영혼을 팔듯 덜컥, 예고도 없이 빠져버린 턱에 나를 맡겼다. 아버지를 파는 일은 그렇게 턱이 빠지지 않았다면 꿈에도 떠올리지 못했을 일이다.

pp.9~10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 중에 분명한 건 없었다.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것들뿐이었다. 분노도 모독도 반성도 아니었다. 혓바닥이 슬그머니 입안의 구멍으로 향했다. 뜨끈한 설렁탕이 먹고 싶었다.

p.250

 

그는 새가 되는 꿈을 꿨을까. 멋지고 커다란 새가 되어 하늘을 비상하는 꿈. 왜 인간들은 툭하면 새가 되는 꿈을 꾸는지. 초원을 질주하는 야생마나 땅속을 기어 다니는 두더지 같은 건 왜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하는지. 그놈의 날개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의 날개. 그는 마침내 옥상 난간에 섰다. 멀리 희부연 동이 터오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지막 날갯짓을 퍼덕였다. 한순간 비상하는가 싶더니 기우뚱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날개는 오래전 이미 꺾여 있었다. 본래부터 그런 날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p.277

 

 

조영아, <푸른 이구아나를 찾습니다> 中

 

 

+) 이 소설에는 추락하는 남자들의 전형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인데, 맨 처음 서술자가 치과에서 치료하며 보게 되는 '공사장의 인부'가 첫번째 남자다. 서술자는 그를 "저 사람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누군가의 아버지겠지."라고 생각하며 뛰어내리는 그를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두번째로 서술자 자신이 '기러기 아빠'로서 명퇴한 남자로서, 아버지를 팔아서 연명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세번째는 서술자의 같은 회사 동료였다가 퇴직하고 치킨집을 꾸려가다 자살(추락사)한 정과장이다. 이들 이외에도 가장의 권위가 추락한 사회에서 아버지를 필요에 의해 매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제시하며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 빼고 입안에 생긴 구멍에 묘한 연민을 느끼면서 서술자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그것에 집중시킨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집에서 아내가 걱정하는 '이구아나'와 함께 살아가는 그의 존재감은 가족들에게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처음 사내는 이구아나와 거리를 두고 가족들에게, 특히 아내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아내는 "이구아나가 있으니 안심이 된다"면서 남자가 외롭지 않을꺼라는 말을 한다. 그것은 남편보다 앞서 이구아나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아내에게 언제나 중심은 이구아나이지 남편이 아니다.

 

결국 남자가 선택한 방법은 아버지를 빌려준다는 렌탈 시스템이다. 그것에 의존하여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스스로가 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자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아버지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고, 실제 아버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것은 간절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사내는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를 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가족 사이에서 자신의 비중을 인식하게 되면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들어설 수 있을꺼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구성이 잘 짜여진 작품이다. 아버지라는 것에 국한시켜 소설을 읽기보다 한 사람의 자신을 되찾는 문제로 본다면 더욱 의미있을 것이다. 이구아나가 자신의 껍질을 벗고 아파트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가족의 가장으로서가 아니라, 차라리 자신을 되찾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어금니가 빠진 빈 공간이 허전하기 보다 시원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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