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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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中

 

 

+) 꽤 오랜만에 따뜻한 군고구마 같은 시집 한 권을 읽었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아 온 모호한 주체가 등장하는 시가 아니라 아니라 비교적 서정적 주체가 분명하게 등장하는 시가 한 아름 담겨있는 시집이다. 읽으면서 달달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애처로울만치 화자의 감정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 시집에는 결코 낡지 않은 서정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시인은 오랫동안 내면에 간직해온 감정을 차분하게 형상화하는데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오래된 사진을 보며 떠오르는 어떤 추억 같은 것들을 연상하게 만드는 푸근한 온돌방 같은 것이다. 그 느낌은 우리에게 동일성의 끈을 건내주는데, 마치 나도 이런 추억들이 내 안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아서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난감한 시를 볼 때마다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그것은 그런 시를 애써 독파해보고자 하는 나의 헛된 욕망 때문이었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수용하면 되는데 어쩐지 뒤떨어지고 동떨어지는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시집을 붙들고 끙끙 대곤 했다. 그러나 이번 박준의 시집을 읽으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받아들이고 되새길 수 있는 만큼만 시를 이해하자. 그것이 시읽기의 출발점이 아닐까.

 

꽤 오랜만에 사랑을, 서정을, 죽음을, 인간의 근원적 정서를, 낡지 않게 만드는 시인을 만났다. 오래된 서정을 신선하고 반갑게 만드는 젊은 시인을 만난 것 같아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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