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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평점 :
'씨앗이 팔아넘겨져서는 안 된다.'
씨앗으로 쓰려는 것은
그 해의 결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만을 골라낸다
씨앗이 할 일은 단 두 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자리에 파묻혀 썩어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정직한 절망으로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中
+) 이 시집은 박노해 시인이 2000년대 들어서 지은 작품 약 300여편이 실린 책이다. 그의 시는 비유적이기보다 직설적인 편인데, 어찌보면 시라기보다 잠언이나 산문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번 시집에서도 참 좋은 문구는 많은데 참 좋은 시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것들도 많다. 그건 그만큼 직설적인 명언투의 문장 때문일텐데, 간혹 어떤 독자들은 군더더기 비유보다 이런 표현이 낫다고 여기기도 한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시가 간직한 함축성이나 상징성이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박노해 시가 갖고 있는 장점은 진정성이다. 삶이나 사람들을 볼 때 주변인으로 대하지 않고 그들을 모두 자신의 일부로 가져와 시를 쓰고 있다. 박노해의 시에서 노래하는 희망이나 불의한 것에 대한 저항 혹은 분노는 타인의 시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화자 본연의 목소리로, 마치 화자가 그의 일부가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박노해 시인만의 그런 진실함이 시를 읽는 내내 빠져들게 만든다. "억압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 고독하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아니다] 전문) 이 시는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단어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은 박노해 시인만의 필법 때문이다.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는 솔직하고 담백하다. 때로 우울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시가 있고, 그런 상황에서도 밝게 웃는 희망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도 있다. 시인은 이 모든 상황을 직설적이고 솔직한 필법으로 균일하게 제시한다. 이 시집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시들이기에 청소년도, 일반인들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복잡하고 소통되지 않는 어려운 시에 질렸다면, 마음을 잔잔하게 울리는 이 시집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