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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김미월 지음 / 창비 / 2011년 12월
평점 :
약자가 말이 많은 게 아니었다. 강자가 말이 많았다. 정확히는, 강자에게 선택권이 있었다. 강자가 말을 하면 약자는 듣고 강자가 침묵하면 약자는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p.21
진수는 더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어릴 때 그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꿈은 꾸는 동안에만 아름다웠다. 그는 세상의 주변이었다.
p.25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영어선생은 시란 반드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해되지 않아도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선생의 이야기 또한 선뜻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최소한 전달은 되었다. 이해도 안되고 전달도 안되고 그래서 차라리 다행인 문예부 선생의 말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p.47 -[29200분의 1]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신은 숱한 사소한 죄들을 저지르면서 그래도 큰 죄는 짓지 않는다고 안도하며 사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게 더 무서운 것일지도 몰랐다. 일개 바늘도둑이라 해도 그가 이제껏 훔친 모든 바늘의 값을 환산하면 소값 못지 않을 터이므로.
p.171 -[정전의 시간]
김미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中
+)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 소설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읽을수록 재미있는 스토리와 소재들로 가득하다. 동명이인의 등단인데 자신으로 오해받은 출판사 직원의 모습[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과 중국어 강사가 만난 중국인 불법 체류자들의 모습[중국어 강사], 한밤중이면 아랫층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궁금한 주인공의 모습[안부를 묻다], 아내와 휴가를 호텔로 떠나는 남자의 모습[프라자 호텔] 등이 그것이다.
나는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 단편들이 대부분 장편으로 쓰여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이번 김미월 작가의 단편소설들은 대부분 결말이 아쉬웠다. 뭔가 이야기가 더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제대로 완성된 마무리는 한 두편에 불과하다고 해야할까. 이 작가의 문장력은 뛰어난 편이다. 문장들이 흡입력있고 자연스럽다. 그런 문장력으로 흥미로운 소재들을 끌어모아 글을 쓰기 때문에 재미있는 작품이 많다.
그런데 아쉬운 건 늘 결말이다. 뭔가 인위적인 것 같기도 하고, 작위적인 것 같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늘 결말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면모를 드러낸다. 김미월 작가의 이런 모습이 보완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소설을 창작해 내리라고 믿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기대감이 더 높아졌다. 어쩐지 조만간 완벽한 그녀의 소설이 등장할 것만 같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