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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무덤 - 개정판 ㅣ 시작시인선 18
김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마루 한가운데 그가 즐겨 앉는
의자가 안 보이고 원목의 의자에 어울리는
책상이 안 보인다 책상 위에 놓인 양장본의
노트가 안 보이고 언제나 뚜껑을 열어 놓은
고급 만년필이 안 보인다 머리를 긁적이며
깨알같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씨가 안 보이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릿결을 내맡기는
그녀가 안 보인다 햇살 고운 그녀와
아침마다 잎을 떨구는 초록의 나무가
안 보이고 묵묵히 초록나무를 키워온
환한 빛의 화분이 안 보인다 너무 환해서
웃음까지 삼켜버린 둘의 사진이 안 보이고
영영 안 보이는 그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의 어깨가 안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오랜 손길이 안 보이고
아무도 없는 마루를 저 혼자 떠도는
먼지가 안 보인다 문이 열리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의 빈방이
안 보인다
김언, <숨쉬는 무덤> 中
+) 김언의 시는 시 전체의 울림보다 한 문장의 울림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는데, 그건 시인이 독자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높거나, 스스로에 대한 만족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시인은 한 문장으로도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다. 그러나 그의 시 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번이나 곱씹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시집은 김언 시인의 첫 시집이다. 독자와의 소통보다,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듯 여겨지는 책이다. 나는 시인이 언급한 '시인이 보이지 않는 밑바닥'을 이 시집을 읽는 내내 의식했다. 어떻게 보면 그가 사용한 괄호 ()가 마음에 안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천천히 돌이켜보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에 독자와의 소통을 요구하지 말자. 그저 작가의 시쓰기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는 그의 시쓰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자. 이 시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