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 사는 집 문지 푸른 문학
조명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흘러간 것들을 현재에 붙들어놓는 일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다면서 이모는 지금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멈춰있는 상태라고 했었다. "어렵니? 네겐 아직 어렵겠지. 하지만 사진을 찍어 보면 알 수 있어. 멈춤, 멈춤. 그 반복이 바로 움직임이란 걸 말야. 예를 들면 넌 늘 그 모습 그대론데 그런 상태가 계속돼서 자라고 움직이고 사는 거라고."

p.84 

 

아무리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행되기 전에는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예정되어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은 일,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하지 않은 일들은 흘러간 강물처럼 사라져버리고, 가슴에 남아서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란 어째서 예정도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p.92

 

엄청나게 술에 취한 상태로 내 방에 들어온 이모가 너처럼 어린애가 뭘 알겠냐면서 어쩌고저쩌고 주절대던 끝에 한 말이 생각났다. 순진하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 좋은 의미에서 덕목이 아니라 죄악이라고. 사람이 순진하기만 하다면 발전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p.150

 

 

조명숙, <농담이 사는 집> 中

 

 

+) 이 소설은 가족 이야기를 고등학교 2학년 '영은'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교통사고로 아빠를 잃은 영은은 수학 문제집 풀기로 슬픔을 달래는 엄마와 함께 산다. 또한 늘 웃으며 이런 저런 옷을 다시 수선해서 새로운 옷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취미인 할머니도 함께 산다. 그리고 아버지가 외국인(다른 가족들은 모두 그를 '코끼리'로 부른다)이라 믿고 핀란드로 찾으러 간 씩씩한 사진작가 이모도 같이 산다.

 

그런데 사실 가족들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하는 그 '코끼리'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그저 농담일 뿐이다. 하지만 코끼리는 그들 각자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다. 어려운 순간을 견디게 만드는 그런 존재이다. 할머니에게도, 이모에게도, 엄마에게도, 그리고 영은에게도. 그 코끼리가 그들의 집에 농담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농담이 사진 집'이란 이 가족에게 희망이며 서로를 끌어안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 책이 청소년 대상의 소설이 아니라 성인 대상의 소설이라도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다만 코끼리의 상징성이 가족들에게 각각 연결되는 부분이 살짝 인위적으로 느껴져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가족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우정, 다문화권 사회에서의 고민들을 엿볼 수 있기에 가볍지만 진지하고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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