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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몽타주
박찬욱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한번 정한 가훈을 무를 수는 없다면서, 즉 이 일에만큼은 '아니면 말고'를 적용할 수 없다면서, 이렇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였다. "현대인들은 자기 의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오만한 태도, 세상에는 의지만 가지고 이룰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닥쳐오는 좌절감을 어찌할 것이냐.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고 그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땐 툭툭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 경쟁만능의 사회에서 참으로 필요한 건 포기의 철학, 체념의 사상이 아니겠느냐. 이 아빠도 <복수는 나의 것>으로 네 친구의 아빠가 만든 영화를 능가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싶었으나 끝내 그 20분의 1밖에 안되는 성적으로 끝마쳐야 했을 때 바로 그렇게 뇌까렸던 것이다. '아니면 말고...........'"
p.16
그냥 뭉뚱그려서 '관객'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다양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그들은 서로 상반된 취향을 갖기도 하죠. 그럼 누구한테 맞출 것인가. 30만 명과 상의해가면서 영화를 찍을 수 없다면, 결국 믿을 건 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재미있으면 다들 재미있어할 것이란 믿음. 모든 작가는 창조자이자 첫번째 감상자기도 한데, 이제껏 수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기준에 의해 자기 작품도 호오가 판가름날 수밖에.
p.187
예술가들끼리 비교는 무슨 비굡니까?
p.207
경제학에서 미학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물적 조건이 상이하면 상이한 미학이 발생한다는 뜻이고, 더 쉽게 말하자면 가난한 영화에는 특유의 멋진 매력이 따라서 생긴다는 소리입니다. (중략) 뭐가 달라도 달라야 비싼 영화와 차별성이 생길 테니까요. 첫째도 개성, 둘째도 개성, 무엇보다도 오직 개성. 이야말로 가난한 예술가의 무기입니다.
p.221
박찬욱, <박찬욱의 몽타주> 中
+) 이 책은 영화감독 박찬욱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에세이와, 인터뷰 원고들, 영화 촬영 제작일지 등 다양한 글을 모아 구성한 책이다. 박찬욱 개인의 생각에 대해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개인적으로 <친절한 금자씨>와 <복수는 나의 것>,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등의 영화를 관심있게 보았다. (아무래도 영화 연출보다 각본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표현이 옳을 듯 싶다.)
잔인하거나 정말 이럴 수도 있을까 의심이 드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놀라울만큼 인간의 깊숙한 치부를 드러내는 능력은 박찬욱의 주특기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이런 영화들로 그를 규정짓고 싶지는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만 해도 분명히 다른 부류니까. (그러니까 소위 그를 지칭하여 '복수' 시리즈 감독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별로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영화를 만들지 모르는데 그런 말들로 그의 영화에 편견을 만드는 건 좋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정리고 추려내고 요약해서 딱 한 두마디로 압축하는 걸 즐기는지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어떤 감독에 매니아적인 면이 있지는 않다. 그저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으로서, 그가 만든 몇몇 영화의 코드가 탄탄한 각본으로 구성되어 내게로 다가왔다는 점에 신뢰감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나 드라마의 대본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만간 기회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