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 나의 시작은 아직도 아버지의 건조업 같은 사업이 못된다 나의 시는 아버지의 건대 같은 상품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려 하고 나의 시작이 건조업만큼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한파가 몰아쳐서 눈도 맞고 얼면서 녹으면서 마른 황태처럼 과분하게 나의 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어린석은 생각일 뿐이다 나는 게을러서 아버지처럼 사업을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처지 가운데서 나의 시가 사업이 되지 못하고 잘못하면 오해가 되고 사치가 되고 마는 이상한 일이다 시라는 것이 나의 시작을 그렇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나의 시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건조업만 못하다 아버지의 건조업을 평생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덕장 문가에 한란계 걸어놓고 겨울 쉬파리 슬까봐 밤에는 구름을 낮에는 골과 몰개를 내다보던 아버지의 아들이 쓴 시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시를 버리고 명태를 말려보기 전까지는 마른 명태를 관태해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 아닐 것이다 * 몰개는 파도이며, 관태는 乾太를 싸리나무로 한 쾌씩 꿰는 일로서 모두 강원도 해변가에서 쓰이는 말임. 고형렬, <사진리 대설> 中 +) 고형렬 시인에게 마을이 진정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 사는 마을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듯이, 시가 진정 詩가 되기 위해서는 "눈도 맞고 얼면서 녹으면서" 말라가는 명태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뽀야니 떡가루를 뒤집어쓰고 잠든 눈 속에 내려 앉아서 / 모든 형상과 색이 파묻혀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마을, "해가 지고도 한참을 설광 때문에 새벽" 같은 마을, 그런 마을을 보고서야 시인은 생각한다. "사진리는 그제서야 사람 사는 마을이 되었"다고. ([사진리 대설] 부분) 그에게 詩도 그와 같다. 비와 눈 그리고 바람에 얼고 녹고 볕에 말려지는 고통과 애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시인이 겪어온 삶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다. 어머니가 "쌀밥을 꼭꼭 씹어가지고" 화자를 "무릎에 앉혀 입맞춤을" 하던([모자] 부분) 기억과, "두 겹 홑이불을 배탈이 난다고 / 아버지는 저의 배에 덮어주셨"던 기억([모기장] 속) 기억들이 얽혀 지금의 시인을 만들었다. 시인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온 삶을 이어 현재를 되새기고 그 현재로 지금을 살아가고 싶어한다. "선운사 나무 좋아 선운사 물 좋아 / 나 내일을 넘보지 않을 것이다" ([낮 선운사] 부분) 시인의 생에서 끝은 '회귀'가 아닐까. 처음을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 삶, 그 처음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자신을 키워준 자연과 마을이 있다. 지금은 그들의 기억을 안고 아내와 시와 함께 걷는 화자가 있다. 그가 향해 걷는 저 끝에는 다시 처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