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동물원 민음의 시 132
이근화 지음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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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라이크 쇼팽'

 

시장 바구니에 커피 봉다리를 집어넣은 여자

빈 병에 커피를 채우고 커피물을 끓이는 여자

커피물이 끓을 동안 손톱을 깎는 여자

쇼팽을 들으면서 발톱마저 깎는 여자

커피물을 바닥내고 다시 물을 올리는 여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물을 두 번 끓이는 여자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저 여자

손톱을 깎으며 눈물을 보였던 여자

커피 한 봉다리로 장을 본 여자

횡단보다 앞에 서 있었던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서 오래 울었던 그 여자

빨리 건너지 않으면 더 오래 울게 될 거야

아직 건너지는 마 좀 더 울어야 되지 않겠어?

커피 봉다리를 들고 오래 울고 있었던 여자

이제 커피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자

오래 서서 울게 될 여자 신호등이 될 저 여자

손톱 발톱이 마구 자랄 여자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中

 

 

+) 이 시집에는 유달리 '고양이'가 많이 등장한다. "고양이는 뜻없이 멈춰 서고 / 고양이는 뒤돌아본다." 과연 고양이는 어떤 존재일까. "어떤 자세로도 고양이는 추락하지 않는다 / 붉은 꽃잎 같은 고양이 // 길의 이쪽과 저쪽에서 / 고양이와 내가 살아가는 교묘한 방식"이 시집 곳곳에서 드러난다.  ([멍든 자국] 부분) 사실 이 시집에는 화자가 동일시하는 존재들이 제법 등장한다. 고양이를 비롯하여 두루미, 비둘기 등등 이 동물들의 특징은 화자가 선 자리에 그들이 대치되거나, 그들이 존재하는 자리에 화자가 대치되는 식으로 나타난다.

 

"세계를 자신의 밥과 혼동했으므로 / 나는 당신과의 식사가 불편하다. // 그렇다고 내가 침을 흘리지 않는 건 아니지 / 내가 동물이 아니라는 건 또 아니지." ([단지 금발인 여자] 부분) 화자는 혼돈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누군가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착각하기도 하고, 세계가 곧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며, 무엇이 세계이고 무엇이 자신인지 구분짓는 것 자체의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것은 이 시집의 화자에게 만큼은 자연스러운 본능 같은 것이다. 애초에 자아와 세계를 분리한다는 것이 화자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대체 '나'는 누구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나에게 이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붕 위의 식사] 부분)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 혹은 내가 아닌 것들이 느끼는 감정과 느낌 자체가 중요하다.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뜨거워지거나 부드러워지거나 하는 것. 그것이 시인이 느끼고 있는 세계이자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난해한 부분도 많았으나 그건 화자의 혼란스러움이라 생각된다. 아니, 어쩌면 깔끔하게 정리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의 사유 구조로 이해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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