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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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밥 짓기 위해 쌀 푸러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줄어 있는 자루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달에 한 번 비우는 자루처럼

 

삶과 죽음은 심상한 것

 

내게서도 시간의 낱알 한 알 두 알

 

시나브로 새어나가 어느새

 

몰라보게 생의 자루 홀쭉해졌다

 

어제는 낱알들 한꺼번에 쏟아놓은, 밑 터진 자루

 

탁탁 털어 반듯하게 개어서는

 

마음의 창고 안에 고이 모셔놓았다

 

날바다 빈 자루들 늘어가지만

 

신이 정해놓은 길 바꿀 수 있는

 

삶의 전문가는 없다

 

낱알 하나가 또 소리 없이 자루를 빠져나간다

 

 

 

이재무, <저녁 6시> 中

 

 

+) 이재무의 시는 사람을 닮았다. 사람과 시적 소재 간의 비유 관계가 성립하는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 보조관념이라는 점이다. 원관념은 그가 읊고 있는 시적 대상들이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국수] 부분) 그의 시에서 의인화되는 것들은 단순히 표현기법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정말 사람을 닮고 싶어하는 시인의 시심이 짙은 것들이다.

 

이재무에게 삶은 사람 혹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것들의 만남이고 지속이다. 그것은 일직선이 아니라 물결처럼 곡선이 넘실거리는 것이다. 삶의 높은 곳과 낮은 곳, 즐거운 곳과 쓸쓸한 곳, 행복한 곳과 슬픈 곳을 두루두루 섭렵하는 천천히 이는 물결이다. "수평에 배 대었다 떼며 비상하는 돌의 / 그 아슬아슬한 긴장에 전율하던 때 그에게도 있었다 / 하지만 수평을 걷던 돌 이내 물속으로 가라앉듯 / 삶은 순간 지워지고 만다, 흔적이란 그런 것이다" ([물수제비] 부분)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의 삶이 묻어나는 작품들을 통해 소박하고 전통적인 서정성을 지닌 이런 시집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최근 발간되는 시집들은 시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을 삶은 시집에서 풍기는 밥냄새같은 반가운 시가 늘었으면 싶다. 얼마전에 어떤 시집을 읽다가, 읽다가 포기해버렸는데, 그건 이해불가능함보다 소통불가능함의 불쾌함 때문이었다.

 

물론 이 시집에 생각보다 많이 사람이나 삶, 죽음의 시어를 내놓는 것도 사실이다. 시에 직접적으로 그런 용어를 명시하는 것이 그의 시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것이 시인의 순수하고 솔직한 체험이며 마음이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이 시집은 저녁 6시가 아니라, 오후 4시 정도의 넉넉함과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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