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창비시선 316
이기인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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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는 내가 당신의 어깨를 본다
내일은 소리 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나는 초조를 잃어버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더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첫눈이 쌓여서 가는 길이 환하고 넓어질 것 같다
소처럼 미안하게 걸어 다니는 일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정든 집으로 몸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닮아가는 구두 짝을 우스꽝스럽게 벗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밤늦게 지붕을 걸어 다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껴안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벽에 걸어놓은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말을 알아듣고
벗어놓은 양말에 뭉쳐진 검정 언어를 잘 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매트리스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삐걱삐걱 고백을 오늘밤에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깨는 초라한 편지를 쓰는 불빛을 걱정하다가
아득한 절벽에 놓인 방의 열쇠를 나에게 주었다
자기 중심을 잃어버린 별들이 옥상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다
뒤척이는 불빛이 나비처럼 긴 밤을 간다


 

이기인,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中

 

 

+) 사소한 풍경들에 시인의 시선이 닿으면 그건 사소한 것이 아닌게 된다.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시집 전체에 울린다.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어떻게 들어줄까요."([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부분)라고 말하지만 사실 시인은 이미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다. 다만 그 낮은 것들의 숭고함을 혼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일은 나간 이가 돌아올 때까지 가늘게 흔들리겠으나 주저 않기 싫다는 토란 줄기의 약속!"([줄기가 자라는 시간] 부분)은 그의 눈에 비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다짐이다. 시인은 그 다짐에 동조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한다. 진중하게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건 현실에서 철저하게 아래로, 아래로 밀리고 있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비 맞은 현대식 건물에서 정규직이 아닌 이들이 와르르 어데로 가라고 빗물처럼 쓸려나온다. /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빗소리가 이상하게 내 집 지붕위로도 떨어진다."([생의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빗소리] 부분) 시인이 바라보는 그들은 더이상 그들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시인은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낮고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시인은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더 나은 내일을 노래한다. "내일은 소리 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고.([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부분) 우리에게서 피어오르는 희망의 빛이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작은 혁명이 되리란 걸 보여주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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