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날개' 산에 올라 두리번거렸다 나무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걷고 걸어 나무 하나를 찾았다 나무를 찾고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반을 얻었다 다시 나무 하나를 찾았다 하지만 아직은 서쪽으로 더 자랄 일이 있는 나무여서 나무에 돌을 매달고 다시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일 년쯤을 기다려 두 나무에서 큰 가지 하나씩을 베었다 사개를 맞대고 질빵을 걸으니 반은 절반을 마주 보며 어깨가 되었다 어깨 위에 또 하나의 어깨를 메고 그 위에 세상을 얹고 걸어나갔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세계를 지났다 한번 얻은 지게는 버릴 것이 못 되었다 어깨를 자른대도 지게는 나를 따라왔다 내 살을 지고 내 터를 지고 풍경마저 한몸처럼 옮겼다 누구나 죄진 사람같이 지게로 태어나 죄처럼 업혔던 시절이 있었다 업힌 것이 날개인 줄 알고 퍼드득퍼드득 살려고도 하였다 이병률, <찬란> 中 +) 이 시집 속의 화자에게 세상이란 어떤 존재일까. 아니, 그에게 세상 속의 자신이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은 안과 밖의 경계지음이 아니다. 화자는 세상에 있는 동시에 세상이 되는 것이다. 곧 화자가 곧 세상이 되는 곳에서 그는 존재한다. "나는 여기에 있으며 안에 있다 / 안쪽이며 여기인 세계에 붙들려 있다 / 나는 지금 여기 숱한 풍경들을 스치느라 / 저 바깥을 생각해본 적 없는데 / 여기 있으냐 묻는다 // 삶이 여기에 있으라 했다" ([이 안] 부분)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기억의 집] 부분) 화자가 세상과 멀어지는 일에 대해 생각한 순간 그것은 곧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화자가 세계를 자신과 동일시할수록 모든 것들은 견고해진다. 그 견고함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응시하는 자신의 심리로 표현된다. 화자는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 광장에서 멀어지리"라고 짐작한다. ([찬란] 부분) "상처가 상처를 지배"하고, "미래를 가만히 듣는" 생각을 통해 ([창문의 완성] 부분) 창문이 완성되는 세상, "삶을 줄이기 위해 다리의 힘을" 쓰는 세상 ([다리] 부분), "검은 봉지를 형제 삼아 지네온 고양이"의 울음을 통해 그가 "살아온 날들"에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보기도 한다. ([고양이가 울었다] 부분) 세상 속의 존재들을 응시하는 눈, 그 눈을 따라 내면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마음이 있다. 안타깝고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철저하게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가 보인다. 이병률의 시집 <찬란>은 그렇게 화자와 동일시 되는 세상과, 그 존재들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화자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시집 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다. 어쩌면 시적 대상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도 같다. 그 거리는 연결점이 촘촘히 이어진 사실적 구성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이라고나 할까. 대상에 거리를 두고 시인의 생각을 불어넣고 있는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