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항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그가 공항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검역 안내문과 전염볌 예방수칙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경고가 많은 걸 보면 위험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p.8

 

모든 비관은 결국 예상된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p.41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까지 미리 염려하기에 미래는 너무나도 까마득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과거의 시간이었다. 현재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방대해서 멀고도 멀었다. 어차피 그가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뿐이었다. 석유처럼 검은 하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언제나 제 할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시간은 진창 속에 빠져 있기도 하고 오물과 섞이느라 더디 흐르기도 한다. 그러니 미래는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p.167

 

 

편혜영, <재와 빨강> 中

 

 

+) 편혜영의 소설을 생각하면 난 종종 어둡고 우울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첫 장편 소설인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약회사의 직원으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아 파견근무를 가게 된 C국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쫓기다, 쥐를 잡는 임시방역원으로 일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과 인간성 상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가족과도, 회사 동료와도 소통의 부재로 고독을 경험하게 되는 현대인의 슬픈 단면을 제시한다. 

 

비현실적인 면모가 더 많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쓰레기에 파묻힌 인간, 거대한 쥐, 그 쥐들을 잡기 위해 인간에게 좋지 않은 약품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읽을수록 지저분하고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는 작품이다. 그것은 그만큼 작가가 리얼하게 상황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존의 단편들과 달리 인물의 내면 심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 모습은 놀라웠다. 

 

편혜영의 소설에서 발견하는 치밀한 배경 묘사가 참혹한 형상을 그대로 드러내서 읽기 싫을 정도였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배경에 치중하기 보다 인물과 배경, 즉 상황과의 적절한 조화가 돋보인다. 앞으로 발전이 기대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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