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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이야 (양장)
전아리 지음, 안태영 그림 / 노블마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하려면 확실하게 하든가!"
누구에게나 언어적인 급소가 있다. 나는 인상을 쓰고 대거리를 하려다가도 '확실'이라는 한 마디를 듣고 나면 비 맞은 개처럼 기가 죽곤 했다. 확실, 이라는 단어는 내게 계기판이 고장 난 연료통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확실한 삶'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걸까.
p.29
"기왕 하려면 주인공이 낫지 않나?"
"사람들이 기대가 높아지면 정작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잊게 될 때가 있잖아. 잃는 것도 많고."
p.148
나는 그때 커피 자국으로 얼룩진 티스푼을 내려다보며 다짐했다. 결혼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일생을 솔로로 보내겠노라고.
p.200
나는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을 끝내지는 않았다. 그에게 더는 마음을 줄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끝이었다. 그 예감은 요란스럽거나 격하지 않으며 홀로 잠에서 깬 새벽녘의 푸른 어둠처럼 그저 서늘하게 다가왔다.
p.223
전아리, <팬이야> 中
+) 기존 전아리의 작품에 비해 구성 부분에서 살짝 끊김이 느껴지는 것이 좀 안타까웠지만, 여전히 전아리라는 소설가는 실력있는 작가란 생각에는 변함없다. <팬이야>는 계약직 여성의 연애와 정신적인 성숙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다. 하루하루를 큰 책임감없이 짤리지 않을 만큼만 일하며 지내던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고, 연예인을 좋아하던 막연한 사랑에서 자신이 주는 만큼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이야기이다.
혼기가 꽉 찬 여자들의 고민, 계약직으로 회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고민들을 하나로 모아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전개하는 소설이다. 깔끔한 전아리의 문체로 단정적인 종결이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일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연애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고 그렇게 스스로를 보면서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점을 잘 정리하고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