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그게 아니에요. 일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일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을 구경만 하는 것은 더 힘들어서 그래요. 더구나 노인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말이에요.

할머니는 비웃었다.

- 개자식들! 내가 불쌍하게 보인다 이 말이구나?

- 아니에요. 할머니.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이 부끄러웠을 뿐이에요.

p.12 [(상) 비밀노트]

 

난 이제 쉰 살빡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난 책 한 권쯤 쓸 수 있을 거야. 여러 권도 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p.133 [(중) 타인의 증거]

 

- 저는 물론 어린애였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요.

-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도 흐릿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p.149 [(중) 타인의 증거]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그것을 만들어낸 신의 악의가 상식을 초월한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p.196 [(하) 50년간의 고독]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中

 

 

+) 이 작품들의 원제목들은 각각 <커다란 노트, 증거, 세번째 거짓말>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번역하면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하에서 3부로 발간한 것이다.

 

첫번째 <비밀노트>는 나치로 짓밟힌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형제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행동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데, 그런 시선이 오히려 전쟁의 잔혹함을 더 잘 드러낸다.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는데, 그건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행동들이 인간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비참한 면모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을 쓰면서 자신들의 성장을 기록해가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현실에서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았을까 싶다.

 

두번째 <타인의 증거>는 쌍둥이 중 한명인 루카스를 중심으로 전쟁 이후의 피폐한 사회 분위기를 잘 그려낸다. 아이들이 성장한 이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혼란스러운 사회 한 가운데에서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내가 존재하고 있어도 타인에게 증명할 수 없음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곧 증거의 유무에 따른 존재 증명이 되는 것이다.

 

세번째 <50년간의 고독>은 루카스가 국격을 넘어 클라우스를 만나게 되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읽으면서 순간순간 밀려들었던 의혹이 점점 커지는 때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쌍둥이라고 가정했을 때, 왜 갑자기 2부에서 클라우스와 루카스가 헤어지게 되는지 제시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3부에서 설명하는 가족관계는 1부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거짓인가? 1,2,3부는 각각 작가가 집필한 시간차로 생긴 모순인지, 고의적으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책을 엮어내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엮은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존재의 거짓말이 전쟁의 고통과 인간의 절망을 잘 설명한다는 점이다. 모순이 많은 책이나 적나라하게 인간의 본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름끼칠만큼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암울한 분위기만큼 철저하게 염세적이라는 점에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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