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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ㅣ 문학.판 시 2
이성복 지음 / 열림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은 압력의 차이'
우리의 피를 소란케 하는 건
무덤에 대한 열망일 뿐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윌리엄 버들러 예이츠, [流轉(유전)]
어떤 식육 식물은 제 속의 공기압을 아주 낮게 해. 지나가는 벌레들이 저절로 빨려들게 한다. 드럼 통 석유를 따라붓는 일도 같은 이치. 처음엔 열심히 펌프질하지만, 나중엔 펌프를 떼지 않고선 멈출 수 없다. 모든 건 압력의 차이. 인생도 따라붓기의 일종이라면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의 구분은 진공 무덤 속으로 빨려드는 순서를 말한다. 늙어 힘 빠지고 동작이 굼뜬 것은 저기압 중심 가까이 왔다는 것, 바야흐로 느긋한 식사가 시작되리라는 것.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中
+) 이성복의 이번 시집은 우리말로 번역된 외국 시인들의 시를 읽고, 거기서 비롯된 것을 글로 엮어낸 점에서 독특하다. 시집에 실린 각 시의 제목 아래 인용된 외국 시인들의 시에서 떠오른 단상이 그 시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어떻게든'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외국 시의 구절을 사용했거나, 혹은 내용을 읽고 비롯된 감정들을 시로 썼거나, 시어가 간직한 상징성을 이끌어내서 시를 지었기 때문이다. 즉, 그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시로 소화했다는 점이다.
시인이 그들의 시를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말대로라면 "평소에 좋아하던 다른 나라 시에 말붙이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이 시들을 지은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확인하는" 작업, 이성복이 이번 시집에서 다룬 전체적인 틀이다. 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때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말로 표현되리라 믿지만,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말이나 글로 형상화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가 외국 시인들의 시를 인용한 것은 잠시나마 그들의 시 구절을 빌려 자기 생각의 일부를 드러낸 것은 아닐까. 시를 읽으면서 너무 인용한 시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